[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16] <베이비걸>
※ 영화 '베이비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핼리너 레인 감독은 폴 버호벤 감독의 제자다. <블랙북>(2006년)에서 배우로 출연하며 그의 연출을 온몸으로 체험했고, "특정 질문이 있어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라는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베이비걸>이 남긴 핼리너 레인 감독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동물인가, 문명인인가, 우리 안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 공존할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이고, 폴 버호벤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로미'는 로봇 자동화 회사의 CEO다. 완벽한 커리어, 자상한 남편 '제이콥'(안토니오 반데라스), 사랑스러운 두 딸,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와 교외의 저택. '로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한 가지를 가지지 못했다. 19년 결혼생활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오르가슴. 남편과의 섹스가 끝나면 '로미'는 다른 방으로 달려가 BDSM 포르노를 보며 스스로를 만족시킨다. 이 설정은 강렬하고, 첫 10분만으로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는다.
출근길에 목줄 풀린 개가 난동을 부릴 때, 한 청년이 나타나 개를 진정시킨다. '로미'는 그 장면을 본다. 그날, 그 청년 '사무엘'(해리스 디킨슨)이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온다. 그는 CEO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에 커피 몇 잔 드세요? 오후엔 줄이는 게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식이다. 첫 멘토링 미팅에서 그는 더 직설적이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명령받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로미'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 뒤에 흥분이 숨어 있다.
회사 회식 자리. '사무엘'은 '로미'의 테이블에 우유 한 잔을 보낸다. 눈빛으로 명령한다. "마셔." '로미'는 한입에 들이킨다. 떠나는 '로미'의 귀에 '사무엘'이 속삭인다. "착한 아가씨(Good girl)." 이 장면은 <베이비걸>에서 가장 에로틱하다. 이후, '사무엘'과 '로미'는 호텔방에서 만나고, '사무엘'은 '로미'에게 명령한다. "네발로 기어가서 우유를 먹어. 구석에 서 있어. 내 허락 없이 오르가슴을 느끼지 마." 이런 지시를 '로미'는 따른다. '로미'는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해방감을 맛본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베이비걸>은 이 관계가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실패한다. '사무엘'은 '로미'의 집에 나타나고, 가족들과 친해지고, '로미'를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폴 버호벤 감독이라면 어땠을까? <원초적 본능>(1992년)의 '캐서린'(샤론 스톤)은 살인 용의자로 의심받았고, <엘르>(2016년)의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강간범을 유혹했다. 그들의 욕망은 사회가 설정한 모든 경계를 무시했다. 관객은 그 무모함에 매혹되면서도 공포를 느꼈다.
<베이비걸>의 '로미'는 위험한 게임을 하는 척하지만, 실은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머문다. '사무엘' 역시 마찬가지로, 그는 위험해 보이려 애쓰지만, 결국 '로미'가 원하는 것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핼리너 레인 감독은 25년간 남편과 오르가슴을 경험하지 못한 친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출발점은 진실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조심스럽다. '레인'은 '사무엘'을 의도적으로 공백으로 남겨놓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실패작인가? 아니다. 니콜 키드먼이 있기 때문이다. 니콜 키드먼은 이 불완전한 각본을 자신의 몸으로 채운다. 57세가 된 니콜 키드먼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낸다. 보톡스를 맞는 장면, 냉동 치료를 받는 장면, 완벽함을 유지하려는 강박까지. '로미'는 통제의 화신이지만, 니콜 키드먼은 그 통제 뒤에 숨은 절망을 보여준다.
일례로, 촬영 당시 니콜 키드먼은 너무 흥분해서 촬영이 중단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촬영하면서 '더는 오르가슴을 느끼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라는 것. 니콜 키드먼은 "나는 항상 배우로서 탐구를 해왔다"라며 "이번 작업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라고 말했으니, 배우의 도전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니콜 키드먼은 여성 감독과 성적 주제에 대해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던 경험을 특별하게 여겼다고.
<베이비걸>의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다. '로미'는 파멸하지 않는다. 남편 '제이콥' 과의 결혼은 지속되고, 딸들은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다. CEO 자리도 지킨다. '사무엘'과의 관계는 끝나지만 '로미'는 성장한다. 딸과의 대화를 통해 일상으로 복귀하고,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인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레인 감독은 여성의 욕망을 처벌하고 싶지 않길 원했을 테고, 이는 존중할 만한 의도다. 하지만 처벌하지 않는 것과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은 다르다.
레인 감독은 "결국 권력을 쥔 쪽은 '로미'다.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는 쪽은 '로미'"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처음부터 '로미'의 책임을 정면으로 다뤘어야 한다. 직장 내 위계, 기혼 여성의 불륜, 29살 나이 차이. 이 모든 것이 문제적이다. 영화는 "미투 시대"를 의식하기 때문에, '사무엘'에게 "합의"라고 반복해서 말하게 만든다. 하지만 만약 성별이 바뀌었다면? 남성 CEO가 젊은 여성 인턴과 이런 관계를 맺었다면?
폴 버호벤 감독의 위대함은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는 데 있었다. <쇼걸>(1995년)은 실패작이라 불렸지만, 그 도발은 진심이었다. <원초적 본능>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 날카로움은 의도된 것이었다. <엘르>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영화의 핵심이었다. 폴 버호벤 감독은 질문을 던지고, 답은 관객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 질문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베이비걸>은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은 무디다.
레인 감독은 도발하려 하지만, 관객을 너무 배려한다. 불편하게 만들려 하지만, 결국 위로한다. '로미'는 구원받고, 관객은 안도한다. 이게 나쁜 것인가? 아니다. 하지만 위대하지는 못하다. 언급한 것처럼, 레인 감독은 스승에게 배운 것을 기억한다. "특정 질문이 있어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질문을 찾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용기다. <베이비걸>은 그 용기가 반쯤만 있었던 영화다. 다음 작품에서 감독이 스승처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베이비걸> (Babygirl, 2024)
- 개봉일 : 2025. 10. 29.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15분
- 장르 : 스릴러, 멜로/로맨스, 드라마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핼러너 레인
- 출연 : 니콜 키드먼, 해리스 딕킨슨, 안토니오 반데라스, 소피 와일드, 에스더 맥그리거 등
- 화면비율 : 2.00: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