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18] <하얀 차를 탄 여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년)이 '진실의 상대성'을 말했다면, 고혜진 감독의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격'에 관해 묻는다. 한 사건을 둘러싼 엇갈린 진술들 사이에서, 이 영화가 천착하는 건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보다 '왜 그녀들의 말은 쉽게 의심받는가'에 가깝다. 조현병 병력이 있는 작가,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피해자, 과거의 상처를 품은 경찰. 세 여성의 시선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서스펜스 속에는 불신과 편견이라는 또 다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을 뚫고 나오는 건, 기대하지 않았던 따뜻한 연대의 손길이다.
폭설이 내린 새벽, 한 대의 하얀 차가 시골 병원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맨발이었고, 그녀가 끌어안고 내린 또 다른 여자는 피투성이였다. '도경'(정려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칼에 찔린 여자는 곧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현주'(이정은)는 '도경'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도경'은 혼자 사는 시골집에 언니가 남자친구 '정만'(강정우)을 데려왔고, 그날 밤 '정만'이 폭력을 휘둘렀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주'가 확인한 사실은 달랐다. 칼에 찔린 여자는 '도경'의 친언니가 아니었다. '도경'의 실제 언니 '미경'(장진희)은 예전에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인물이었고, '도경'은 오랜 기간 정신질환을 앓아온 환자였던 것. 그리고 혼수상태였던 여자, '은서'(김정민)가 깨어나며 상황은 또 한 번 뒤집힌다. '은서'는 "범인을 봤다"라면서, '도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같은 밤,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두 여자의 기억은 제각각이다.
'현주'는 혼란스럽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아니, 애초에 진실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사건을 추적할수록 '현주'는 자신의 과거와도 마주하게 된다.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이 '도경'의 떨리는 눈빛 속에서 되살아난다.
<라쇼몽>은 한 무사의 죽음을 둘러싼 네 사람의 진술을 교차 편집하며 '진실의 불가지론'을 제시했다. <하얀 차를 탄 여자> 역시 구조적으로 이와 닮았다. '도경'의 진술, '은서'의 진술, '현주'가 찾아낸 물적 증거들이 플래시백으로 반복되며 사건을 재구성한다. 관객은 계속해서 "아, 이게 진실이구나" 싶다가도 다음 장면에서 뒤통수를 맞는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인간의 이기심과 허영을 폭로하는 데 집중했다면, 고혜진 감독은 여성들이 처한 구조적 불신에 주목한다. 조현병 환자라는 낙인, "정신병자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라는 주변인들의 반응, 피해자인데도 끊임없이 의심받는 시선. 영화는 이 불신의 구조를 하나씩 해체하며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그녀들의 목소리를 쉽게 지워버리는가?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라쇼몽>식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세 여성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영화 속 인물들이 말하듯,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극적인 영웅담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정은이 쓴 방한모를 보는 순간에는 코엔 형제의 걸작 <파고>(1996년)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눈 덮인 미네소타를 배경으로 살인 사건을 추적하던 임신한 경찰 '마지 검더슨'(프란시스 맥도맨드). '마지'는 뛰어난 형사였지만, 동시에 평범한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정은의 '현주' 역시 그러하다. 무심한 듯 사건을 처리하던 동네 경찰이었지만, '도경'의 사건을 만나며 변화한다.
두 영화 모두 눈 덮인 작은 마을, 여성 형사, 그리고 인간의 악을 이해하려는 시선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여성 형사'를 전면에 내세우며, 남성 중심적 범죄 스릴러의 문법을 비튼다. 총을 쏘고 범인을 제압하는 대신, 관찰하고 공감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이정은은 촬영 내내 투박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주'의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화면 속 '현주'는 무뎌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 속엔 너무 많이 다쳐서 감각을 숨긴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반전이 거듭되다 보니 후반부에는 다소 지치는 느낌이 든다. 어느 순간부터 "또 뒤집히겠지"라는 예상이 앞서면서 충격이 무뎌진다. 결말부에서 캐릭터들이 사건을 직접 설명하는 대사가 과하다는 지적도 타당해 보인다. 관객을 믿고 여운을 남겼더라면 더 좋아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정은과 정려원이 보여준 연기의 온도, 고혜진 감독이 건네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당신의 말을 믿어요"라고 속삭이는 작은 연대는 기억할 만한 한국형 여성 스릴러로 자리한다. ★★★
※ 영화 리뷰
- 제목 : <하얀 차를 탄 여자> (The Woman in the White Car, 2025)
- 개봉일 : 2025. 10. 29.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07분
- 장르 : 스릴러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고혜진
- 출연 : 정려원, 이정은, 김정민, 장진희, 강정우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