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24] <럭키 데이 인 파리>
올해 아흔 살을 맞은 우디 앨런이 50번째 장편 연출작 <럭키 데이 인 파리>(2023년)를 내놓았다. 숫자만으로도 경이롭지만, 이번 작품이 그에게 또 다른 이정표가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처음으로 프랑스 배우들과 프랑스어로 만든 영화라는 점이다. 본래 영어 대본으로 구상했으나, 우디 앨런은 완성 후 프랑스어로 제작하는 편이 더 흥미로울 거라 판단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그가 스크립트 슈퍼바이저와 촬영감독의 도움을 받아 가며 연출했다는 사실은, 창작에 대한 집념이 나이와 언어를 초월한다는 걸 증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우디 앨런이라는 작가가 어떤 언어로 작업하든 결국 같은 주제와 스타일로 회귀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럭키 데이 인 파리>의 원제 'Coup de Chance'는 '뜻밖의 행운'이라는 뜻이다. 국내 개봉명이 이렇게 된 것은 <미드나잇 인 파리>(2011년)가 40만 관객을 불러 모았기 때문에 흥행을 염두에 둔 선택으로 보이지만, 두 영화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과거로의 판타지 여행을 통해 낭만적 향수를 그렸다면, 이번 작품은 파리의 상류층을 배경으로 한 냉혹한 치정 스릴러다. 우연한 재회가 불러온 불륜, 그리고 그 끝에 도사린 폭력 말이다.
'파니'(루 드 라쥬)는 파리 고급 아파트에 살며 경매회사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부유한 금융인 남편 '장'(멜빌 푸포)과의 결혼 생활은 겉으로 완벽해 보인다. 주말이면 별장에서 사냥을 즐기고, 저녁엔 상류층 파티에 참석한다. 하지만 '파니'는 이런 삶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남편의 속물적 친구들, 과시적 소비, 통제하려는 성향. 이혼 경력이 있는 '파니'는 결혼이 노력만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어느 날 '파니'는 거리에서 고등학교 동창 '알랭'(니엘스 슈나이더)과 우연히 마주친다. 뉴욕 프랑스인 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그는 이제 작가로 일하며 파리에 머물고 있다. '알랭'은 고교 시절 '파니'를 짝사랑했다고 고백하고,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서 점심을 먹으며 시집과 소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파니'는 남편에게서 느낄 수 없는 예술적 교감을 '알랭'에게서 발견하고, 이내 불륜에 빠진다.
'장'은 아내의 변화를 눈치챈다. 점심시간이 길어지고, 전화를 받을 때 표정이 달라진다. 의심 많은 그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파니'를 미행시키고, 불륜 사실을 확인한다. 여기서 영화는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급선회한다. '장'의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설정, 과거 동업자가 의문스럽게 실종됐다는 소문은 복선이었던 셈이다. 그는 뒷골목 청부업자들을 동원해 '알랭'을 제거하고, '파니'는 연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착각한다. 정작 진실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건 범죄소설 마니아인 '파니'의 엄마 '카미유'(발리에리 르메르시)다.
영화의 핵심 주제는 제목에 담겨 있다. '뜻밖의 행운'. '알랭'은 '파니'와의 재회를 행운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 자체가 40경 분의 1의 기적"이라며 삶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반면 '장'은 "운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우리 운명을 만든다"라고 잘라 말한다. 로또를 사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인데, 두 남자의 대조적 세계관은 영화 내내 충돌한다.
우디 앨런 감독은 오랜 세월 운명과 우연에 관한 질문을 반복해 왔고, 이번 영화에서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우연은 누군가에겐 축복이지만 누군가에겐 재앙이다. 선과 악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지 않는다. 이런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우디 앨런의 트레이드마크지만, 반복될수록 신선함을 잃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가 바뀌었음에도 우디 앨런 특유의 감정 불안정성과 지적 수다가 그대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캐릭터들은 예술과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인생의 의미를 논하며,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대사는 설명적이고 때로 과도하다. '장'의 냉혈함은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라는 대사로, '파니'의 반항적 성향은 "내 영혼은 여전히 반항적이다"라는 말로 직접 전달된다. 뉘앙스나 암시보다는 직접적 선언을 선호하는 우디 앨런의 각본 스타일은 언어를 초월한다.
프랑스적 요소는 표면적이다. 레스토랑에서 푸아그라와 랍스터를 먹고, 파리의 비스트로를 배경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하지만 <럭키 데이 인 파리>는 프랑스 영화라기보다 "프랑스어로 만든 우디 앨런 영화"에 가깝다.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나 에릭 로메르 감독의 냉소적 시선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1940년대 필름 누아르와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암흑가 영화를 표면적으로 인용하되, 우디 앨런식 유머와 대사로 재해석한 콜라주에 가깝다.
우디 앨런은 이 영화가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암시했다. 미투 운동 이후 할리우드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제작비 조달이 어려워졌다. 이 영화도 프랑스와 영국 자본으로 간신히 완성됐다. 하지만 최근 스페인 마드리드시로부터 150만 유로 지원을 받아 차기작 제작이 가능해졌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가 정말 은퇴할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만 말하고, 자신의 질문만 반복한다. 언어가 바뀌어도, 배경이 바뀌어도, 그는 여전히 우디 앨런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강점이자 한계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럭키 데이 인 파리> (Coup de Chance, 2023)
- 개봉일 : 2025. 11. 12.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96분
- 장르 : 멜로/로맨스, 스릴러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우디 앨런
- 출연 : 루 드 라쥬, 멜빌 푸포, 니엘스 슈나이더, 발리에리 르메르시, 기욤 드 통케덱 등
- 화면비율 : 2.00: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