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26] <맨홀>
영화는 '선오'(김준호)가 방에서 누워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미 무언가 깊은 곳에 가라앉은 사람처럼 보인다. 오랜 자취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누나 '선주'(권소현)와의 재회도 잠시, '선오'는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돌변한다. 순직한 소방관 아버지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세상과 그를 가정폭력 가해자로 기억하는 '선오' 사이의 간극이 서서히 드러난다. 엄마(박미현)와 누나는 "시간도 흘렀고, 이미 돌아가셨으니 용서하자"라고 말하지만, '선오'에게 용서란 배신처럼 느껴진다.
어린 시절 '선오'와 '선주' 남매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숨었던 곳은 맨홀이다. 좁고 어두운 공간이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안전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맨홀이 '선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차근차근 보여준다. 하지만 누나는 성인이 되며 맨홀을 떠났고, 아버지의 기억마저 "불쌍한 사람이 그런 것"으로 정리해버렸다. 홀로 남은 '선오'만이 여전히 맨홀에 자신의 물건을 채워 넣으며 그 공간을 유지한다.
고등학생이 된 '선오'는 우연히 만난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며 처음으로 또래의 즐거움을 맛본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친구 '희주'(민서)와 데이트하며, 잠시나마 평범한 18살처럼 웃는다. 하지만 친구들이 동네 이주노동자들과 시비가 붙으며 상황은 틀어진다. '선오'는 보복 폭행을 당하고, 친구들은 범인이라며 한 이주노동자를 붙잡아온다. "네가 당한 만큼 돌려줘"라는 친구들의 부추김 앞에서, '선오'는 생애 처음으로 깊은 고뇌에 빠진다.
폭력을 증오했던 자신이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 그는 아버지와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망설임 사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결국 그 이주노동자는 숨을 거둔다. 시체는 맨홀에 유기된다. 과거 폭력을 피해 숨었던 공간이, 이제는 자신의 폭력을 감추는 무덤이 된 것이다. 박지리 작가의 원작 소설 <맨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선오'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반면 한지수 감독은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내레이션도, 과도한 클로즈업도 없다. 대신 공간과 시선, 침묵으로 '선오'를 바라본다.
한지수 감독은 "1인칭 독백을 어떻게 영화로 옮길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라고 밝혔다. 어떤 부분은 대사로 풀었고, 어떤 설정은 바꿨다. 가장 큰 변화는 '희주'의 형부를 이주노동자로 설정한 것이다. 원작에서는 한국인이었지만, 영화는 '선오'의 시선만으로는 이주노동자가 혐오와 폭력의 대상으로만 보일 우려가 있었기에, '희주' 가족을 통해 그들의 일상적이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선택 덕분에 영화는 폭력의 아이러니를 더 입체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선오'의 이름에는 善(선할 선)과 汚(더러울 오)가 공존한다. '선오'는 선하고 싶지만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아버지의 폭력은 '선오'의 피와 살에 각인되었고, 그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패턴을 반복한다. 영화가 잔인한 것은, '선오'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최악의 지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맨홀 바닥에 떨어진 아버지의 사진은 이 굴레를 상징한다. 폭력으로부터 도피하던 공간이 폭력으로 오염되는 순간, 카메라는 그 사진을 비춘다.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결국 '선오'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되었다.
권소현이 연기한 누나 '선주'는 같은 트라우마를 다른 방식으로 소화한 인물이다. '선주'는 연극배우가 되어 역할 놀이로 상처를 승화했고, 아버지를 "불쌍한 사람"으로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권소현은 "'선주'도 트라우마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선오'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투영될 때 그 트라우마가 반응한다"라고 말했다. 같은 폭력을 겪었어도 누군가는 용서하고, 누군가는 증오하며, 누군가는 되풀이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드는 질문은 하나다. 나라면 어땠을까? '선오'처럼 폭력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손길을 내밀 수 있을까. 아니, 내밀어야 할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선오'의 표정을 보여줄 뿐이다. 그 표정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답을 찾아야 한다. ★★★
2025/11/05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맨홀> (Hideaway, 2025)
- 개봉일 : 2025. 11. 19.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06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한지수
- 출연 : 김준호, 권소현, 민서, 박미현, 이재흥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