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38]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감상 영화 ④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공동집행위원장 민성욱·정준호)가 지난 4월 30일 개막, 5월 9일까지 전주 영화의거리를 비롯한 전주시 일대에서 관객들과 함께하는 선 넘는 영화제를 진행했다. 슬로건 '우리는 늘 선을 넘지'를 내건 이번 영화제는 57개국 224편의 상영작을 공개했으며, 국제경쟁 부문 대상은 조엘 알폰소 바르가스 감독의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가, 한국경쟁 대상은 조현서 감독의 <겨울의 빛>이 차지했다. 전주에서 몇몇 작품을 감상한 에디터의 짤막한 후기들을 모았다.
1. <계엄령의 기억>
- 섹션 : 월드시네마
- 감독 : 월터 살레스
- 출연 : 페르난다 토레스, 셀튼 멜로, 페르난다 몬테네그로 등
- 등급 : 12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38분
브라질의 군사 독재 시절, 한 가족의 상처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계엄령의 기억>은 올해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받은 작품답게 역사의 상처를 개인의 서사로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1971년 브라질, 관객은 행복했던 '파이바' 가족의 일상을 목격한다. 아버지 '루벤스 파이바'(셀톤 멜로)는 전직 국회의원으로 다섯 아이와 아내 '에우니시'(페르난다 토레스)와 함께 해변가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군부 독재 정권의 그림자는 이미 그들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군 기관원들에 의해 '루벤스'는 '신문 조사'를 위해 끌려간다. 페르난다 토레스가 연기한 '에우니시'의 모습은 압도적이다. 페르난다 토레스는 울부짖거나 과장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단단하게 세운 어깨와 묵직한 침묵으로 고통을 견뎌낸다. '에우니시'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동시에 가족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읽는다. 트라우마의 순간에도 '에우니시'는 자녀들에게 미소 짓도록 격려한다. 군부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가 정치적 구호나 이념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일상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독재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평범한 가족 나들이조차 군인들의 검문으로 불안해지고, 친구들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며, 야간 통행금지로 자유가 제한된다. 이것이 독재의 진짜 얼굴이다. 그렇게 영화는 직접 기억하는 이들은 사라지더라도, 그 기억은 유산이 되어 후대에 남겨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 <하나는 적고 둘은 좋아>
- 섹션 : 시네필전주
- 감독 : 오딜롱 로페스
- 출연 : 오딜롱 로페스, 아라시 에스테베스, 앤젤라 그로서 등
- 등급 : 12세 관람가 / 상영시간 : 95분
브라질 군사 독재 시기인 197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당시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모순 속에서 탄생한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며 자연스럽게 같은 시기 한국의 유신 체제하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떠올랐다. 두 나라 모두 정치적 억압과 검열 속에서도 창작의 불씨를 지키려 했던 예술가들의 분투가 오버랩된다. 영화는 두 개의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 '약간의 행운이 따라준다면'은 중산층 부부의 경제적 몰락을 그리고, 두 번째 '우연히 새로운 삶이'는 두 소매치기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다룬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 오딜롱 로페스 감독은 당대 브라질 사회의 불안정성과 인종 문제를 교묘하게 녹여냈다. 주목할 점은 오딜롱 로페스가 브라질 최초의 흑인 장편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선택한 도시적 배경과 중산층 초점은 당시 브라질 영화의 주류였던 '시네마 노보'의 농촌적 초점과 차별화된다. 이는 한국에서 유신 체제 동안 일부 감독들이 권장되던 국책영화나 전통적 서사에서 벗어나 도시의 소외된 이들을 조명했던 시도와 맞닿아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인종 문제에 대한 접근은 특히 인상적이다. 흑인 소매치기와 백인 부유층 여성 사이의 관계를 통해 브라질 사회의 인종적 위계와 착취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시대를 앞서간 통찰력을 보여준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를 조던 필의 <겟 아웃>(2017년)의 초기 버전처럼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 한국 영화에서도 계급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있었지만, 인종이라는 층위가 더해진 브라질 영화의 복잡성은 또 다른 차원의 사회 비평을 가능케 했다.
3. <새로운 물결>
- 섹션 : 시네필전주
- 감독 : 이카루 마르칭스, 조제 안토니우 가르시아
- 출연 : 카를라 카무라치, 크리스티나 무타렐리, 시다 모레이라 등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상영시간 : 104분
1983년 당시 브라질 사회를 강타한 새로운 물결을 표현한 작품이다. 두 감독은 단순한 스포츠 영화가 아닌, 20년 가까이 지속된 군사 독재 체제의 끝자락에서 분출된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았다. 놀랍게도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 여성들의 축구 경기는 1979년까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영화 속 '갈매기' 축구팀의 존재 자체가 저항의 상징이었던 시대적 맥락은 작품의 기본 전제를 형성한다. 브라질 정부는 곧바로 상영 금지 조처를 내렸는데, 문제가 된 것은 성적 표현 자체가 아니라 퀴어 캐릭터들의 자연스러운 존재와 남성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들이었다고.
<새로운 물결>의 매력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로운 영화 스타일을 브라질의 맥락에 과감하게 접목한 점이다. 포르노그래피적 표현에서부터 실험적인 연출 기법까지, 이 영화는 새롭게 찾아온 표현의 자유를 그 한계치까지 밀어붙인다. 브라질의 '포르노찬차다' 성 코미디 장르의 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평범한 오락을 넘어서 '욕망의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카메라는 모든 형태의 신체를 편견 없이 담아내며,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던 시선으로 다양한 형태의 성적 만남을 묘사한다. 이성애, 동성애를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억압적인 군사 정권 시대에 성적 자유가 곧 정치적 자유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물결>의 혁명적 에너지는 여전히 생생하다. 다소 거친 제작 환경과 낮은 예산, 때로는 비약적인 내러티브 전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놀랍도록 전복적이고 현대적이다. 데이비드 보위의 '차이나 걸'과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음악이 담긴 사운드트랙부터, 당시의 색감을 되살린 4K 복원본까지,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성별이나 성정체성, 인종 등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비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