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39]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감상 영화 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공동집행위원장 민성욱·정준호)가 지난 4월 30일 개막, 5월 9일까지 전주 영화의거리를 비롯한 전주시 일대에서 관객들과 함께하는 선 넘는 영화제를 진행했다. 슬로건 '우리는 늘 선을 넘지'를 내건 이번 영화제는 57개국 224편의 상영작을 공개했으며, 국제경쟁 부문 대상은 조엘 알폰소 바르가스 감독의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가, 한국경쟁 대상은 조현서 감독의 <겨울의 빛>이 차지했다. 전주에서 몇몇 작품을 감상한 에디터의 짤막한 후기들을 모았다.
1. <아리엘>
- 섹션 : 월드시네마
- 감독 : 로이스 파티노
- 출연 : 아구스티나 무노즈, 이렌느 에스코라, 호세 디아스 등
- 등급 : 전체 관람가 / 상영시간 : 105분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대담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관객을 마법처럼 매혹적인 영화적 체험으로 인도한다. 아르헨티나 배우 아구스티나 무노즈가 자신과 동명의 역할로 등장해 '템페스트'의 공연을 위해 아소르스 제도를 방문하는 여정을 그리는 이 영화는 평범한 셰익스피어 각색을 넘어 현실과 환상, 자유와 구속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영화는 시작부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라색 빛으로 물든 바다와 하늘이 스크린을 채우고, 해변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이 등장한다.
'아구스티나'가 탄 페리에서 모든 승객이 갑자기 잠에 빠지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섬에 도착한 '아구스티나'는 더욱 기이한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섬의 모든 거주자가 셰익스피어 작품 속 인물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리엘>의 가장 독특한 점은 현실과 연극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방식이다. 섬 주민들은 매일 해 뜰 때 공연을 시작하고 해 질 때 끝내는 영원한 반복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셰익스피어라는 거대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의 노예임을 알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설정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갇혀 살아가는지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영화의 시각적 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적 언어다. 카메라는 섬의 신비로운 풍경을 초현실적으로 담아내며, 현실과 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강조한다. 반짝이는 바다와 신비로운 지형은 이 섬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마법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이는 잠든 관객마저도 배려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관객인가, 아니면 영화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캐릭터인가? 파티뇨 감독은 이러한 메타적 접근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2. <가을이 오면>
- 섹션 : 마스터즈
- 감독 : 프랑소와 오종
- 출연 : 헬렌 벤상, 조시앙 발라스코, 루디빈 사니에 등
- 등급 : 12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04분
찬란한 색채의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땅에 내려앉고, 서늘한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계절.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24번째 장편 <가을이 오면>은 제목 그대로 가을의 정서를 온전히 담아낸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저 계절의 아름다움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종 감독 특유의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용서와 두 번째 기회의 의미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부르고뉴의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는 할머니 '미셸'(헬렌 벤상)은 완벽한 노년을 보내는 듯하다.
정성스럽게 가꾸는 정원, 일요일마다 찾는 교회,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면회하러 가는 친구 '마리-클로드'(조시안 발라스코)와의 깊은 우정까지. 그러나 딸 '발레리'(루디빈 사니에)와의 관계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오직 손자 '뤼카'(갈란 에를로)에 대한 사랑만이 '미셸'의 삶에 빛을 던진다. 영화는 '미셸'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버섯 요리를 통해 첫 번째 전환점을 맞는다. 그것이 실수였든 의도였든, 독버섯 요리로 '발레리'가 병원에 실려 가면서 모녀 관계는 수습 불가능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발레리'는 모친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고 확신하며 '미셸'이 손자 '뤼카'를 다시는 볼 수 없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순간부터 <가을이 오면>은 평화로운 가족 드라마의 가면을 벗고 서서히 오종 감독 특유의 심리 스릴러로 변모한다. 영화 중반, 출소한 '마리-클로드'의 아들 '뱅상'(피에르 로탱)이 '미셸'의 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전과자 '뱅상'과 노년의 미셸 사이에 형성되는 독특한 유대관계는 영화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는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와 실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서로에게서 상실한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오종 감독은 인간이 어떻게 과거의 실수를 넘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용서와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3. <마지막 야구 경기>
- 섹션 : 시네마천국
- 감독 : 카슨 룬드
- 출연 : 프레더릭 와이즈먼, 빌 리키스, 윌리엄 리처즈 등
- 등급 : 전체 관람가 / 상영시간 : 99분
동네 야구장이 철거되기 전날,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는 표면적으로는 뻔한 스포츠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시간과 상실의 문제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감독은 사라져가는 공간과 그곳에 얽힌 인연의 소중함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솔저스 필드'라는 야구장에 모인 두 팀의 선수들은 다양한 배경과 나이를 가졌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동일하다.
이들이 벌이는 경기는 전문 스포츠가 아닌 사회인 야구의 모든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약간 헐렁한 유니폼, 맥주를 마시며 던지는 투구, 상대방을 향한 유쾌한 야유와 농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투수가 맥주를 마실수록 오히려 더 잘 던진다는 설정이나, 상대 타자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이탈리아 음식 이름을 외치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영화는 사회인 야구에서 일어나기 힘든, 거의 마법적인 순간들도 담아낸다. <마지막 야구 경기>는 야구를 통해 중년 남성들의 우정과 열정을 그려내면서도, 더 깊은 차원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아도 계속되는 경기는 그들의 집착인 동시에 헌신이다. 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마지막까지 경기를 이어가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처절한 노력을 상징한다. 한국 관객으로서 이 영화는 특히 '동대문 운동장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동대문 운동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DDP가 들어선 과정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 그곳에서 있었던 수많은 스포츠 경기와 장터의 추억이 영화 속 솔저스 필드의 마지막 날과 묘하게 겹친다. 두 공간 모두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닌, 사람들의 기억과 정서가 축적된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