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예술가가 만든 반복의 걸작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34] <볼레로: 불멸의 선율>

by 양미르 에디터
4315_3333_716.jpg 사진 =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 ⓒ 찬란

올해는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거장 모리스 라벨 탄생 150주년이다. 전 세계에서 15분마다 한 번씩 연주된다는 '볼레로', 그 곡 뒤에 가려진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이 우리에게 묻는다. 한 명의 예술가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작품 중에서 오직 한 곡만이 그의 이름보다 더 유명해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안느 퐁텐 감독은 정면에서 던진다.


1928년 파리, 당대 최고의 무용수 '이다 루빈슈타인'(잔느 발리바)은 자신의 새로운 발레 공연을 위한 음악을 '모리스 라벨'(라파엘 페르소나즈)에게 의뢰한다. 원래 스페인 작곡가 알베니스의 '이베리아 조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하기로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고, '라벨'은 마감까지 불과 2주 남짓한 시간에 새 곡을 만들어야 하는 압박에 놓인다. 예민한 감성과 지나칠 정도의 완벽주의로 유명한 '라벨'에게 이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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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그의 뇌리에는 자신이 걸어온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20대 시절 파리 음악원에서 다섯 번이나 로마 대상 수상에 실패하며 받은 아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목격한 처참한 전장의 풍경,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일생일대 사랑이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던 '미시아 세르'(도리아 틸리에)와의 관계까지. 예민한 예술가로서의 내면적 고뇌와 현실의 벽 사이에서 '라벨'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이다 루빈슈타인'과의 예술적 갈등도 만만치 않다. 상류층을 위한 화려한 공연을 꿈꾸는 무용가와 노동자들의 일상에서 영감을 찾는 작곡가 사이의 충돌이 반복되며, '라벨'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평소 관심을 두지 않던 '반복'의 힘을 발견하고, 공장의 기계소리, 시계의 초침, 고양이의 숨소리 등 일상의 리듬에서 영감을 얻어 단 하나의 선율을 집요하게 변주하는 실험적인 곡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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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해진 '볼레로'에 대한 '라벨'의 양가적 감정을 포착한 방식이다. 그는 초연 직후 "그 노래가 내 다른 곡들을 다 잡아먹잖아, 내 작품이 꼭 그것뿐인 것처럼"이라며 탄식한다. 이 대사는 그저 원 히트 원더를 만든 아티스트의 푸념이 아니라, 자신의 정교하고 깊이 있는 다른 작품들이 과도하게 간소화된 하나의 곡에 묻혀버린 예술가의 진정한 비애를 담고 있다.

'스위스 시계장인'이라는 별명처럼 섬세하고 완벽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라벨이 가장 간결한 구조의 작품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 모순. 그 모순이 담긴 여정을 영화는 충실하게 그려낸다. 마치 라벨의 음악처럼 정교하게 직조된 이 이야기는 '볼레로'라는 명곡의 탄생 비화를 넘어, 예술가의 자의식과 대중의 평가 사이에 놓인 영원한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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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퐁텐 감독은 무용수 출신답게 이 영화를 통해 음악과 몸짓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마법에 주목한다. 감독은 어린 시절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 안무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 영화 제작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특히 안느 퐁텐 감독은 "관객이 라벨의 세계를 온전히 느끼고 감각적으로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며 시각적 연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는 영화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라벨'의 내면이 불안정한 장면에서는 푸르고 흐릿한 조명이 사용되었고, 창작의 순간이나 인간관계가 활기를 띨 때는 따뜻한 색감과 풍부한 질감의 소품이 공간을 채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라벨'이 실제로 살았던 자택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는 것. 협소한 공간 탓에 제한된 인원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감독은 실제 라벨의 피아노 앞에서 배우가 '볼레로' 선율을 떠올리는 장면을 담아내며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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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역을 맡은 라파엘 페르소나즈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그는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10kg을 감량했으며, 수개월간 피아노와 지휘 훈련을 받았다. 실제 라벨의 무성영화 자료를 연구하며 특유의 긴장된 자세와 섬세한 손동작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이러한 노력은 피상적인 모방을 넘어 '라벨'의 내면적 고립감과 예민한 심리를 체화한 연기로 이어진다.

무용수 '이다 루빈슈타인' 역의 잔느 발리바 역시 자신의 무용 경력을 살려 모든 춤 장면을 직접 소화했다. '미시아 세르' 역의 도리아 틸리에는 친밀함과 거리감을 자유롭게 오가며 '라벨'과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앙상블은 영화가 단순한 전기적 나열을 넘어 살아 숨쉬는 인간 드라마로 승화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2025/04/17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볼레로: 불멸의 선율> (Boléro, 2024)
- 개봉일 : 2025. 04. 30.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121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안느 퐁텐
- 출연 : 라파엘 페르소나즈, 도리아 틸리에, 잔느 발리바, 엠마뉴엘 드보스, 뱅상 페레즈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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