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적도 없는 1980년대 파리의 감성이 스며든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35] <파리, 밤의 여행자들>

by 양미르 에디터
4894_5248_2442.jpg 사진 =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 ⓒ (주)영화사 진진

어떤 영화는 사건으로 말하고, 어떤 영화는 분위기로 말한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확실히 후자다. 198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지만, 작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이혼, 재취업, 가출 소녀와의 동거, 첫사랑의 상처. 이 모든 것이 담담하게 흘러가고, 관객은 그저 파리의 어느 가족이 몇 년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런데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이유는, 이 영화가 기억해 낸 1980년대 파리의 감각이 묘하게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시공간인데 말이다.


영화는 1981년 5월, 프랑스 대선 결과가 발표된 밤의 파리에서 시작한다. 거리는 축제 분위기지만, 차 안에 앉은 '엘리자베트'(샤를로뜨 갱스부르)에게 그 환호는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진다. 남편은 이미 떠났고, 두 자녀 '마티아스'(키토 라용-리슈테르)와 '주디트'(메간 노섬)를 혼자 키워야 하는 상황. 경력 단절 주부였던 '엘리자베트'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자신이 애청하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밤의 여행자들'의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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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소녀 '탈룰라'(노에이 아비타)를 만난 '엘리자베트'는 '탈룰라'가 거리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집으로 데려온다. '탈룰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가족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티아스'는 '탈룰라'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주디트'는 함께 영화관에 몰래 들어가는 등 금세 친해진다. 하지만 '탈룰라'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가족의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미카엘 허스 감독은 198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16mm 필름 볼렉스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파리 풍경 인서트부터, 프랑스 국립시청각연구소와 로댕 미술관이 소장한 아카이브 기록까지 다양한 출처의 영상을 활용했다. 감독은 "당시를 살아가던 익명의 '밤의 여행자들'을 담은 아카이브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적극적으로 탐색했다. 여러 포맷을 오가는 작업을 통해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을 넘어 시대의 공기 자체를 되살리고자 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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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략은 효과적이다. 디지털과 필름 영상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질감은 마치 낡은 앨범을 넘기는 듯한 감각을 준다. 에펠탑과 센 강변 같은 랜드마크는 물론이고, 1911년 개관한 예술영화관 '에스쿠리알'이나 라디오 프랑스의 실제 스튜디오 같은 공간들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 파리지앵의 일상 속으로 빨려 든다. 엘리자베트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들, 새벽 가판대에 쌓인 신문과 잡지들, 동네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다양한 프로그램. 이 모든 것이 쌓여 하나의 시대를 구성한다.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존 케일, 킴 와일드, 텔레비전 같은 뮤지션들의 곡이 흐르며 당대의 자유로운 에너지를 전달하고, 조 다생의 'Et si tu n'existas pas'(만약 그대가 없다면)는 가족이 함께 춤추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며 영화의 온기를 완성한다. 48회 세자르영화제 음악상 후보에 오른 앤톤 샌코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신시사이저와 클래식 악기의 조합으로 그 시절만의 감성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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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곳곳에서 프렌치 시네마의 계보를 의식한다. 가족이 함께 보는 에릭 로메르의 <만월의 밤>(1984년), '탈룰라'가 찾아가는 자크 리베트의 <북쪽에 있는 다리>(1981년). 이 레퍼런스들은 영화적 교양을 과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인물들의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을 암시하는 서사적 기능을 한다.

더 흥미로운 건 '탈룰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누벨바그 시대의 아이콘 파스칼 오지에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라는 점이다. 오지에는 에릭 로메르와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연기하며 주목받았지만, 1984년 25세의 나이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 '탈룰라'는 파스칼 오지에가 <북쪽에 있는 다리>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가죽 재킷을 입고, '마티아스'와 함께 <만월의 밤>을 본 뒤 파스칼 오지에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미카엘 허스는 자신이 유년기에 느꼈던 1980년대 파리의 공기를 되살리면서, 동시에 그 시절을 빛냈던 영화인들에게 조용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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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중심에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밤의 여행자들'이 있다. 이는 1980년대 프랑스에서 방영되었던 실제 라디오 프로그램 '밤중의 사건들'에서 착안한 설정이다. 익명의 사연자들이 전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 방송은, 청소년 시절 라디오를 즐겨 듣던 미카엘 허스 감독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목소리만으로 연결되는 인간관계의 친밀함을 포착하려는 시도다. '엘리자베트'가 시청률이 떨어지는 심야 방송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도 라디오가 가진 목소리의 따뜻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낡은 것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생명줄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

물론, 영화의 미덕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미카엘 허스는 "이 영화는 갈등과 충돌을 에너지로 삼고 있지 않다. 타인을 사랑하고, 돕고, 지켜보고, 마침내 받아들이는 순간에서 시작되는 힘과 리듬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다정함과 선의는 분명 영화의 핵심이지만, 극적 긴장감의 부재는 아쉬움을 남긴다. '탈룰라'의 약물 중독 문제는 너무 쉽게 해결되고, '엘리자베트'의 재정 문제도 금방 안정된다. '마티아스'와 '탈룰라'의 관계 역시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표면을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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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이별, 첫사랑의 발견, 아이들의 독립과 같은 인생의 한 챕터를 보여주고자 했다"라고 밝혔듯, 이 영화는 사건의 드라마보다 시간의 흐름 자체에 집중한다. 그 선택이 성공적이라고 느끼는 관객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전개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도 <파리, 밤의 여행자들>이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밤의 여행자이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우리를 가장 멀리 데려갈 수 있다는 것. ★★★


※ 영화 리뷰
- 제목 : <파리, 밤의 여행자들> (The Passengers of the Night, 2022)
- 개봉일 : 2025. 12. 17.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111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미카엘 허스
- 출연 : 샤를로뜨 갱스부르, 키토 라용-리슈테르, 노에이 아비타, 메간 노섬, 티볼트 빈콘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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