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벌레와 살아있는 타자기, 그 뒤의 진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58] <네이키드 런치>

by 양미르 에디터
4463_3787_4530.jpg 사진 = 영화 '네이키드 런치' ⓒ (주)엣나인필름

거대한 벌레가 말을 걸어오고, 타자기가 스스로 움직이며, 인간이 곤충으로 변하는 세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네이키드 런치>는 윌리엄 버로스의 악명 높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환각적 악몽이다. 하지만 이 모든 기괴함 뒤에 숨어 있는 건 놀랍도록 단순한 진실이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한 사람의 모습.


1953년 미국, 해충 방역사 '윌리엄 리'(피터 웰러)는 매일 남의 집을 돌아다니며 살충제를 뿌린다. 한때 작가를 꿈꿨지만 이제는 그런 야망도 접은 채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려 한다. 문제는 할당받은 살충제가 자꾸 모자란다는 것. 알고 보니 아내 '조앤'(주디 데이비스)이 환각제 대용으로 바퀴벌레 살충제를 몰래 흡입하고 있었다. 과거 함께 마약에 빠져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이제 그 늪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윌리엄'에게 아내의 중독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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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벌레가 '윌리엄'에게 나타나 아내가 '인터존'의 스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윌리엄'은 아내에게 총을 겨누고,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를 총성이 울린다. 아내가 쓰러진 후 '윌리엄'은 마치 도피하듯 신비로운 공간 '인터존'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그는 죽은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성을 만나고, 타자기가 살아 움직이며 자신에게 말을 거는 기이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이 <네이키드 런치>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담이다. 윌리엄 버로스의 '컷업 기법'으로 쓰여진 원작 소설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완전히 해체한 작품이었다.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파편적으로 써내려간 글들을 무작위로 이어붙인 형태라 누구도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소설가를 꿈꾸던 젊은 시절부터 버로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크로넨버그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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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대로 영화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작비가 4억 달러에 달할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상영 금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대신 크로넨버그는 소설의 내용이 아닌 버로스의 창작 과정 자체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실제로 버로스가 해충 방역사로 일했던 경험, 멕시코에서 아내를 총으로 쏴 죽인 비극적 사건, 모로코 탕헤르에서의 체류 등 작가의 자전적 경험들이 영화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로 재구성됐다.

흥미롭게도 촬영 과정에서 운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원작의 배경인 모로코 탕헤르에서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본 촬영 일주일 전 걸프 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작스럽게 캐나다 토론토로 촬영지를 변경해야 했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후에 "전쟁으로 촬영이 불발되면서 '인터존'이 실제 장소가 아닌, 환각적인 정신 상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이 우연한 변경이 오히려 영화의 주제 의식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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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하면 떠오르는 '바디 호러'의 거장다운 면모는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말하는 타자기, 거대한 벌레 '머그웜프', 인간과 곤충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괴한 변형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캘리포니아에서 제작된 50마리의 '머그웜프'와 각종 기계 장비들을 토론토로 운송할 때 미국-캐나다 국경의 세관 직원들이 물품 목록을 보고 경악했다는 일화는 <네이키드 런치>의 기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가 주는 진짜 공포는 그런 시각적 충격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윌리엄 리'가 보여주는 무감각한 반응, 그 절제된 냉정함 속에서 스며 나오는 절망감이다. 피터 웰러는 윌리엄 버로스 특유의 "낮고 평평하고 거친 목소리, 죽은 눈, 감정 표출 없는 무표정"을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로보캅>(1987년)의 '로보캅'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가 보여준 이런 변신은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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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런치>가 다루는 가장 핵심적인 딜레마는 창작과 파괴의 불가분한 관계다. '윌리엄 리'는 아내를 죽여야만 글을 쓸 수 있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또다시 아내를 죽여야 하는 끔찍한 순환 고리에 갇힌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트라우마를 넘어, 예술가가 창작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한 보편적 은유로 읽힌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런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이 '인터존'에서 벌이는 온갖 기괴한 경험들을 통해 이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주디 데이비스가 1인 2역으로 연기한 죽은 아내와 '인터존'의 여성은 같은 얼굴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다. 첫 번째는 현실의 희생자이고, 두 번째는 환상 속의 뮤즈다. 하지만 결국 둘 다 작가의 창작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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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엄'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며 "'인터존'으로 가는 티켓이지. 도착하면 연락할게"라고 말한다. 그는 영원히 자신의 내면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고, 영원히 글을 쓰기 위해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환상과 악몽, 기괴한 변형들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벌레도, 말하는 타자기도, 신비로운 '인터존'도 모두 사라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는 한 사람의 모습뿐이다.

작가는 결국 현실에서 글을 써 내려가는 개인이다. 아무리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창조해도, 그 모든 것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펜을 드는 그 순간이다. <네이키드 런치>는 창작 행위 자체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잔혹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 고백이 현실이라는 견고한 땅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크로넨버그 감독이 버로스의 불가능해 보였던 소설을 영화화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소설의 파편적 내용을 재현하려 하지 않고, 그 소설이 태어난 현실적 조건들을 탐구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네이키드 런치> (Naked Lunch, 1991)
- 개봉일 : 2025. 06. 25.
- 제작국 : 캐나다, 영국
- 러닝타임 : 115분
- 장르 : 드라마, 미스터리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 출연 : 피터 웰러, 주디 데이비스, 이안 홈, 줄리안 샌즈, 모니크 메르큐어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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