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70] <이사>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5년)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눈 덮인 산을 향해 절규하듯 외치는 "오겡키데스까?(잘 지내나요?)"를. 그 한 마디에는 죽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 그리고 어쩌면 해답 없는 질문을 던지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의 <이사>(1993년)를 본 후에는 생각이 바뀐다. 11살 소녀 '렌'(타바타 토모코)이 바다를 향해 해맑게 외치는 "오메데토(축하합니다)"야말로 더 소름돋는 외침이다.
영화는 뾰족한 삼각형 식탁에서 시작된다. 감독은 이미 첫 장면부터 가족의 해체를 예고하고 있었다. 둥근 식탁이 화목함의 상징이라면,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삼각형 식탁은 서로를 찌르고 상처 내는 관계의 은유다. '렌'은 그 뾰족한 꼭짓점에 앉아 부모의 냉랭한 기류를 온몸으로 감지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띄우려 애쓴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1993년 당시 이 영화에 대해 "아이들이 그저 어린 시절을 즐길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렌'이야말로 그런 현실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아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가정의 해체를 막을 수도 없으며, 오직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인 아이 말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아버지가 태우는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낸 반쯤 탄 가족사진, '렌'이 알코올 램프로 낸 교실의 불, 그리고 마지막 축제의 장엄한 불꽃까지. 각각의 불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지만, 결국 무언가를 태워 없애고 재로 만드는 파괴와 정화의 상징이다. 특히 교실에 불을 낸 장면에서 '렌'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혼 가정 아이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보며 느끼는 분노, 곧 자신도 그런 시선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불은 '렌'이 표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었다.
8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연을 맡은 타바타 토모코의 연기는 가히 신들렸다고 할 수 있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의도적으로 타바타 토모코에게 최소한의 연기 지도만 했다고 한다. "대사 외워 와"라는 단순한 지시만으로 아이가 스스로 캐릭터를 발현하도록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꾸며지지 않은 날것의 감정들이다.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는 배우들의 '진짜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였다. 훗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언급했듯, 이는 단순한 기법이 아닌 '태도의 문제'였다. 특히 화장실에서 '렌'이 시위를 벌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벽 너머 아이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추악한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나즈나'(사쿠라다 준코)가 유리창을 맨손으로 깨뜨리며 피투성이 팔로 '렌'을 잡는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원시적이면서도 절망적이다.
영화의 후반부, '렌'은 부모에게 "빨리 어른이 되겠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에는 무서운 체념이 담겨 있다. 어른이 되어야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아이의 절박함.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다짐을 하는 순간 '렌'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이다움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니까.
'렌'이 바다에서 외치는 "오메데토"는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물속으로 사라지는 부모의 환상을 보며 건네는 과거에 대한 작별 인사이자, 어쩔 수 없이 홀로서기를 하게 된 자신에 대한 격려이며, 동시에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성장에 대한 축하다. 하지만 더 섬뜩한 해석이 가능하다. '렌'의 "축하합니다"는 진정한 축하가 아니라 망각의 의식일지도 모른다. 마치 자기최면처럼 "이건 축하할 일이야, 축하할 일이야"라고 되뇌면서 슬픔을 지워버리려는 11살 아이 나름의 생존 전략.
영화 속 노인이 건넨 조언을 기억해보자. "오래된 기억에서 네가 필요한 건 한 손으로 헤아릴 정도면 된단다." '렌'은 그 말을 따라 불필요한 기억들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축하합니다"를 반복하며 슬픈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포장하고, 상처를 추억으로 치환하며, 결국 잊으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축하가 <러브레터>의 "오겡키데스까"보다 더 소름돋을까? '히로코'의 외침이 죽음이라는 절대적 이별 앞에서의 순수한 그리움이라면, '렌'의 축하는 '낳음당한' 존재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강제된 위로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도, 부모의 이혼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아이가 "괜찮다, 이건 좋은 일이야"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모습. 그 축하만큼 처절한 것이 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유일하게 넘어서고 싶었던 감독"이라고 고백했고, 하마구치 류스케가 "세상은 여전히 소마이 신지를 모른다"며 안타까워한 그 감독의 대표작이 드디어 한국에서 정식 개봉했다. <러브레터>가 수차례 재개봉하며 많은 사랑을 받은 것과 달리, <이사>는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기다린 만큼의 가치는 충분했다. 4K 리마스터링으로 되살아난 영상 속에서 '렌'의 "오메데토"는 여전히 강렬하고, 여전히 소름돋는다. 그 외침은 이제 한국 관객들에게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2025/07/25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이사> (Moving, 1993)
- 개봉일 : 2025. 07. 23.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25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소마이 신지
- 출연 : 타바타 토모코, 나카이 키이치, 사쿠라다 준코, 스도 마리코, 타나카 타로 등
- 화면비율 : 1.66: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