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75] <여름정원>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되는 영화가 있을까. 소마이 신지 감독의 <여름정원>(1994년)은 31년 만에 국내 첫 정식 개봉을 맞으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스크린에 펼쳐 보인다.
여름 방학, 친구의 할머니 장례식을 본 후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세 소년 '키야마'(사카타 나오키), '카와베'(오 다이키), '야마시타'(마키노 겐이치)는 외딴집에 홀로 사는 괴짜 노인 '덴포 키하치'(미쿠니 렌타로)를 발견한다. 순수한 궁금증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찰'은 처음엔 아무런 깊이가 없는 장난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노인의 일상을 따라다니며 그의 외로운 마실길을 함께하고, 허물어져 가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아이들은 점차 노인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노인 또한 처음엔 성가신 존재였던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과거 전쟁의 참혹한 기억으로 가족과 스스로를 멀어지게 한 그였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 앞에서는 오랫동안 봉인해 둔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방치되어 황량했던 정원은 아이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받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낡고 쓸쓸했던 집 또한 점차 활기와 온기를 되찾는다. 네 사람 사이에는 혈연을 넘어선 진정한 가족 같은 유대가 형성되어 간다.
그렇게 온 여름을 함께 보내며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에 코스모스가 만개하기 시작할 즈음, 노인은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죽음이라는 감정마저도 배워가는 계절, 여름."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죽음을 구경거리로 여겼지만, 결국 죽음을 통해 삶의 진짜 의미를 배우게 된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이러한 성장의 과정을 교훈적 메시지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스러운 계절의 흐름 속에서, 마치 코스모스가 피어나듯 자연스럽게 감정의 변화를 그려낸다.
이는 감독이 줄곧 추구해 온 연출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소마이 신지는 이 작품에서도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 아역배우들을 기용했다. '카와베' 역의 오 타이키와 '야마시타' 역의 마키노 겐이치에게는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는데, 이러한 선택은 우연한 실험이 아니었다. 감독은 "아이들이 프레임을 넘어 진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했고, 전문 배우가 아닌 진짜 아이들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특히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 기법은 이러한 의도를 완벽하게 뒷받침한다. 카메라는 아이들을 쫓아다니지 않는다. 대신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발을 세게 굴러 카메라 앞까지 뛰어왔다가 시선 밖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의 역동성이 그대로 화면에 담기면서, 관객은 마치 그 골목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여름정원>이 성장담의 범위를 뛰어넘는 이유는 노인의 존재 때문이다. 베테랑 배우 미쿠니 렌타로가 연기한 '덴포 키하치'는 평범한 외톨이 노인이 아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역사의 증인이자, 죄책감에 평생 짓눌려 살아온 한 인간이다. 영화 중반, 노인이 아이들에게 털어놓는 고백은 이 작품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현지인들을 살해했고, 그중에는 임신한 여성도 있었다는 참혹한 기억. 그때 자신의 아내 역시 임신 중이었기에, 그 순간의 선택은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러한 죄책감이 그를 가족에게서 스스로 멀어지게 했고, 외로운 말년을 보내게 한 근본적 이유였던 것이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이러한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설교조로 빠지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의 순수한 존재 자체가 노인에게 구원이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아이들 앞에서 노인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시할 용기를 얻게 되고, 그 고백을 통해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맞는다. 이는 일종의 고해성사이자, 세대를 초월한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상징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황폐했던 정원에 아이들과 노인이 함께 심은 우아한 자태의 코스모스는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의 결실이자, 생명이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를 상징한다. 온 여름을 땀 흘려 정성을 쏟은 정원에서 가을꽃이 피어오를 때 노인이 마지막을 맞는 것은, 죽음이 비극적 종료가 아니라 자연 섭리 안에서의 아름다운 마무리임을 말해준다.
나비 또한 중요한 상징이다. 평생 전쟁의 트라우마에 갇혀 살았던 노인의 영혼은 죽음을 통해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듯,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노인의 죽음 이후 정원을 맴도는 나비는 그의 영혼이 여전히 아이들 곁에 머물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의 우정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증표가 된다. ★★★★
※ 영화 리뷰
- 제목 : <여름정원> (The Friends, 1994)
- 개봉일 : 2025. 08. 06.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114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소마이 신지
- 출연 : 미쿠니 렌타로, 사카타 나오키, 오 타이키, 마키노 겐이치, 아와시마 치카게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