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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꺼낸 감독이 말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결혼론

[별세개반이상만 #52] <머티리얼리스트>

by 양미르 에디터

셀린 송 감독은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2023년)에서 '인연'이라는 운명론적 개념을 통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셀린 송 감독이 내놓은 <머티리얼리스트>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시작하죠. 더 이상 전생이나 운명 따위는 없습니다. 오직 키 183cm, 연봉 2억 원, BMI 20 이하 등의 냉혹한 스펙만이 존재할 뿐이죠. 그렇다면 이는 감독의 후퇴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한 단계 진화한 시선이죠. 시절인연을 꺼낸 바로 그 감독이기에, 현실의 무게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것인데요. <머티리얼리스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인의 결혼론을 솔직하고 잔인하게 해부한 작품입니다.

뉴욕 맨해튼의 고급 결혼정보회사 '어도어'에서 일하는 '루시'(다코타 존슨)는 이미 아홉 번의 결혼을 성사한 스타 커플 매니저죠. '루시'의 하루는 까다로운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정작 '루시' 자신은 5년째 독신입니다. '루시'에게도 명확한 기준이 있는데요. "다음에 만날 남자는 결혼할 남자이고, 그는 반드시 부자여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냉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가장 정직한 고백이기도 하죠.

4583_4155_4121.jpg 사진 =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 소니 픽쳐스

과거 연인 '존'(크리스 에반스)과 주차비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싸우다 이별한 상처가 '루시'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런 '루시'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납니다. 고객의 결혼식에서 만난 신랑의 형 '해리'(페드로 파스칼)는 말 그대로 '유니콘'이죠. 160억 원짜리 트라이베카 펜트하우스에서 혼자 살며, 키도 크고, 잘생겼고, 교양도 있고, 무엇보다 '루시'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보입니다. 그런데 같은 결혼식에서 케이터링 서빙을 하던 '존'과 마주치죠. '존'은 여전히 룸메이트와 살며, 연극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머티리얼리스트>의 가장 도발적인 지점은 주인공 '루시'의 성격과 선택입니다. '루시'는 관객의 호불호를 확실히 갈라놓죠. "당신이 계산서를 망설임 없이 집어드는 걸 보고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는 장면, '해리'의 펜트하우스에 압도되는 모습은 일부 관객들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속물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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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셀린 송 감독이 실제 커플 매니저로 6개월간 일했던 경험에서 나온 이 캐릭터는, 우리가 평소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죠. 누구나 한 번쯤은 상대의 조건을 따져본 적이 있고, 누구나 경제적 안정에 대한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루시'는 다만 그것을 숨기지 않을 뿐이죠.

셀린 송 감독은 '루시'를 단순히 돈만 밝히는 여자로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상처받은 여성의 자기 보호 본능으로 해석하죠. 가난한 연애에서 받은 사회적 수치심, 미래에 대한 불안감,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이 모든 것이 '루시'로 하여금 '안전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해리'는 그 안전함의 상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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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루시'가 주선한 커플 중 한 여성이 데이트 중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루시'의 동료들은 이를 "업계의 리스크"라며 치부하지만, '루시'는 처음으로 자신의 시스템에 의문을 품습니다. 완벽한 조건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그리고 '해리'의 다리에서 발견한 수술 자국은 '완벽한 유니콘'조차 가공된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영화의 진짜 주제가 드러나죠. <머티리얼리스트>는 '돈 vs 사랑'의 이분법을 제시하는 영화가 아니라, 진정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계산된 완벽함과 불완전하지만 솔직한 감정 사이에서, '루시'는 후자를 선택하죠. '존'과의 재회에서 그가 여전히 '루시'의 음료 주문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5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의 마음이 모든 계산을 무너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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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오프닝인 선사시대 원시인 남녀가 뼈와 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은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죠. 수만 년이 지났지만, 사랑은 언제나 무언가를 주고받는 '거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죠. 셀린 송 감독은 이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거래 안에서도 진정한 감정을 잃지 않는 것이죠. '루시'가 마지막에 '존'을 선택하는 것은 물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무형자산'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머티리얼리스트>는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죠. 당신의 연애 기준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정말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나요? 당신은 '루시'를 비판할 자격이 있나요? 이 질문들 앞에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스크린 속 '루시'가 아니라 극장에 앉은 우리 자신을 해부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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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송은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보여준 서정적 아름다움 대신, 한층 날카롭고 현실적인 시선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덜 아름답지만, 더 정직한 영화가 탄생했죠. 시절인연을 말하던 감독이 이제는 현실의 무게를 이야기합니다. 그 변화가 아쉽기보다 성숙해 보이는 이유는, 결국 두 영화 모두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머티리얼리스트>는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속물적이지만 인간적인,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

2025/08/08 메가박스 성수

※ 영화 리뷰
- 제목 : <머티리얼리스트> (Materialists, 2025)
- 개봉일 : 2025. 08. 08.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17분
- 장르 : 멜로/로맨스, 코미디
- 등급 : 12세 관람가
- 감독 : 셀린 송
- 출연 : 다코타 존슨, 크리스 에반스, 페드로 파스칼, 죠 윈터스, 마린 아일랜드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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