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78]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댄 코버트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답을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 찾아간다. 제프 맥페트리지. 이름은 생소하지만 그의 작품은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애플 워치 페이스, 나이키 운동화, 에르메스 가방, 심지어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2013년)에서 AI '사만다'의 인터페이스까지. 우리는 매일 그의 디자인과 마주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시각적 환경을 만든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이런 숨겨진 창작자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댄 코버트 감독이 4년간 그를 쫓아다니며 포착한 것은 한 예술가의 작업 과정이 아니라, 일과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제프 맥페트리지가 기존의 '예술가'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는다는 점이다. 술에 취해 고뇌하거나, 담배 연기 속에서 영감을 찾거나, 가족을 등지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전형적인 예술가상과는 정반대다. 그는 절제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며, 규칙적으로 러닝을 하고, 아내와 두 딸과의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천재 예술가라면 돈과 여자를 좇는 게 진부하다"라는 그의 말은 허투루 내뱉은 철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그는 명료한 사고가 창작의 토대라고 믿으며,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고통받는 예술가라는 낡은 신화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선언이다. 댄 코버트 감독은 인터뷰에서 "촬영을 거치면서 제프 맥페트리지의 예술뿐만 아니라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라고 고백했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그의 작업실에서 딸과 장난치는 모습, 아내와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홀로 그림을 그리는 평범한 순간들이 가장 빛난다.
"내 디자인 언어는 언제나 평범한 것에 기반하고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는 특별한 기교나 현학적인 메시지가 없다. 대신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포착한 재치가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 브랜드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복잡하고 피로한 현대인들에게 그의 디자인은 한 줄기 신선한 바람 같다.
영화의 깊은 메시지는 시간의 사용법에 관한 것이다. 제프 맥페트리지는 날마다 의도적으로, 목적 있게 살아간다. 규칙적인 운동, 꾸준한 작업, 가족과의 시간.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루틴이 그의 창작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댄 코버트 감독이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써야 할까요?"라고 던진 질문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제프 맥페트리지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보여준다. 시간을 통제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느낀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노동,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보내는 현실. 이런 상황에서 제프 맥페트리지의 삶은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작업에서 의미를 찾는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해요"라는 그의 말은 소박해 보이지만 깊다. 자신의 노동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업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실패를 대하는 태도다. 완성되지 못한 작품에서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실마리를 찾아내는 그의 시선은, 완벽주의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제프 맥페트리지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다. 화려한 성공담이나 극적인 역경 극복 스토리 대신, 그는 일상에서 꾸준히 의미를 만들어가는 삶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롤모델이 아닐까.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은, 우리가 모두 제프 맥페트리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창한 예술적 재능이 없어도,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하지 않아도, 자기 일에서 의미를 찾고 목적 있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그의 삶은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
※ 영화 리뷰
- 제목 :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Geoff McFetridge: Drawing a Life, 2023)
- 개봉일 : 2025. 08. 13.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80분
- 장르 : 다큐멘터리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댄 코버트
- 출연 : 제프 맥페트리지, 스파이크 존즈, 소피아 코폴라, 사라 드빈센티스, 아티바 제퍼슨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