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민낯' 숫자로 취급된 20만 명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42] <케이 넘버>

by 양미르 에디터
4354_3437_216.jpg 사진 = 영화 '케이 넘버'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해외 입양인 보면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느껴요?" 영화의 중간쯤, 한 해외 입양인이 한국인에게 던지는 이 질문이 <케이 넘버>의 핵심을 관통한다. 상대방은 "안타깝다. 왜냐하면…." 이라고 말을 시작하다 그 뒤로는 다른 장면으로 커트가 되어버린다. 이 미완성된 대답은 한국 사회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타깝다"라는 피상적인 감정 표현 이후에 진정한 성찰이나 책임 있는 대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현실. 조세영 감독은 이 커트 하나로 한국 사회의 무관심과 책임 회피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1970년대 초, 길에서 발견된 미오카(김미옥)는 한국의 보육 시설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미국으로 입양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오카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미오카를 맞이하는 것은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뿐이다. 미오카는 시민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미오카에게 유일한 희망은 한국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는 것이지만, 입양 기관들은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서류 공개를 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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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민단체 '배냇'의 도움으로 미오카는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부터 지방의 작은 마을까지, 자신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미오카의 여정은 한국 해외 입양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양부모가 한국에 오지 않고도 입양할 수 있었던 '대리입양' 제도, 아이들을 '수출 상품'처럼 취급했던 관행, 그리고 입양인들의 시민권 문제까지. 미오카처럼 20만 명이 넘는 해외 입양인들이 겪었던 고통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난다.

<케이 넘버>를 보면서 1991년 개봉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장길수 감독의 이 영화는 최진실이 주연을 맡아 스웨덴으로 입양된 수잔 브링크(신유숙)의 실화를 다뤘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케이 넘버>는 해외 입양의 구조적 문제를 더 직접적으로 고발한다. 부실한 입양 기록, 조작된 서류, 입양인들의 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고통, 한국 사회의 무관심까지. 시간은 흘렀지만, 문제는 그 자리에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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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영 감독은 2004년 KBS 시청자 제작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중, 입양인들이 자신의 기록을 찾기 위해 입양기관을 방문하는 과정에 동행하게 되었다고. 그곳에서 입양인과 기관 담당자가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 후, 그 의문은 조 감독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2018년,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추방된 한국 출신 입양인의 기사를 접한 것이 <케이 넘버> 제작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한 입양인의 슬픈 사연을 넘어, 국가와 사회가 저지른 제도적 폭력의 본질을 파헤친다. 임신중절, 성폭력 피해자, 노동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다뤄온 조세영 감독의 일관된 문제의식이 이 작품에서도 빛난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기록'의 중요성과 그 불완전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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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카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단지 친부모를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투쟁이자, 숫자로만 취급된 인간 존엄성 회복의 과정이다. 'K-넘버'라는 제목은 아이러니하다. 'K-팝', 'K-무비', 'K-드라마', 'K-문학' 등 한국의 세련된 문화를 상징하는 'K'가 붙은 이 번호는, 사실 그 이면에 인간을 숫자로 취급했던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단면을 담고 있다.

"한국인의 몇 퍼센트가 수십 년간의 해외 입양에 대해 알고 있는 거 같아요?"라는 영화 속 질문은 관객인 우리에게도 직접 던져진다. 세계 최대 입양 송출국이었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 최저 출생률을 기록하는 아이러니.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그런 점에서 <케이 넘버>는 평범한 다큐멘터리를 넘어선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숨겨진 상처를 들춰내는 거울이자, 30년의 세월 동안 정체된 우리의 인식과 책임 의식에 대한 준엄한 질문이다. "안타깝다. 왜냐하면…."으로 시작했던 그 대답, 우리는 이제 그 뒷부분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

2025/05/13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 영화 리뷰
- 제목 : <케이 넘버> (K-Number, 2025)
- 개봉일 : 2025. 05. 1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2분
- 장르 : 다큐멘터리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조세영
- 출연 : 미오카 밀러, 케일린 바우어, 선희 엥겔스토프, 메리 쉬라프만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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