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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없는 후배와 밴드 보컬 선배가 룸메이트 됐다면?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89] <잠자는 바보>

by 양미르 에디터
4650_4408_212.jpg 사진 = 영화 '잠자는 바보' ⓒ 메가박스중앙(주)

"집에서 8시간 동안 숏폼 영상만 보고 하루를 보냈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일 수 있다." 사카모토 유고 감독의 이 코멘트는 <잠자는 바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기력해 보이는 일상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며,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가치 있다는 관점. 이 영화는 바로 그런 따뜻한 시선으로 방황하는 청춘을 바라본다.


영화는 기숙사의 작은 방에서 시작된다. 무기력했던 '이리스 유미'(쿠보 시오리)는 열정으로 가득한 '쿠지라이 루카'(타이라 유우나) 선배와 동거를 시작한다.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는 대학생 '유미'에게, 밴드 보컬로서 꿈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루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인다. 혼자 마트도 잘 가지 못하고, 싫은 말도 쉽게 하지 못하는 '유미'와 달리, '루카'는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당당하고 뜨겁게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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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지만, 하찮은 일상에서도 서로의 존재는 점점 특별해져 간다. '유미'가 배고픈 '루카'를 위해 싱크대 거름망에서 새우 꼬리를 건져내 튀김 덮밥을 만들어주는 첫 장면은 영화의 기묘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순간 중 하나다. 어느 날,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루카'를 마주한 '유미'는 처음으로 같이 있지만 서로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느낀다. 자신이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음악계에서 점차 주목받던 '루카'가 대형 음반사에 스카우트되자 둘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동급생 '타구치'(츠나 케이토)가 실제로는 '루카'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유미'는 '루카'와 대조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실망하게 된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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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생 사카모토 유고 감독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방황과 정체성을 현실감 있게 포착해 내는 독자적인 연출 세계를 구축해 왔다. <베이비 어쌔신> 시리즈로 액션 연출력을 인정받은 그가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으로 돌아왔다. 원작자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팬이기도 한 그는 직접 각본 작업에 참여해 보다 진정성 있는 접근으로 영화적 해석을 더했다.

특히 '모라토리엄 시기'라 불리는 청춘의 유예기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깊은 시선이 인상적이다. 작품에서 '루카'가 언급하는 '헛사이클'이라는 신조어는 무기력하게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삶의 리듬을 의미하지만, 감독은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런 사이클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이야기한 그는,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청춘에게 위로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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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바보>의 청춘을 완성하는 건 다름 아닌 영화 속 '음악'이다. 분위기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을 관통하고 서사의 리듬을 끌고 가는 이 영화의 OST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영화의 주제곡 '네무루바카'는 원작자 이시구로 마사카즈가 직접 작사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원작 만화 속에서 일부 등장했던 가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영화만을 위해 새롭게 집필한 가사가 추가되어 원작 팬들에게는 반가움을, 영화 팬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노기자카46 출신 쿠보 시오리와 타이라 유우나의 케미는 영화의 가장 큰 자산이다. 사카모토 유고 감독에 따르면, 두 사람의 첫 촬영은 '유미'가 '루카'를 이불에서 깨우는 장면이었다고. 아직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시작됐지만, 약 한 시간 동안 서로의 리듬을 맞춰가며 장면을 완성해 냈고, 실제 룸메이트를 보는 듯한 호흡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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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잠자는 바보>는 극적인 상황 없이도 인물 간의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그려내며, 청춘기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내면을 포착한다. '청춘' 하면 떠오르는 빛나는 이미지는 '루카'와 같은 소수의 사람에 한정되고, 망망대해 같은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유미'는 평범한 청춘의 대표처럼 보인다.

방향성을 찾지 못해 헤매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조언이나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옆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방황하는 청춘에게 길잡이가 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삶에 작은 균열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잠자는 바보>는 바로 그런 관계의 의미를 따뜻하게 품어 안은 작품이다. ★★★

※ 영화 리뷰
- 제목 : <잠자는 바보> (Nemurubaka: Hypnic Jerks, 2025)
- 개봉일 : 2025. 09. 10.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106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사카모토 유고
- 출연 : 쿠보 시오리, 타이라 유우나, 츠나 케이토, 히구치 코헤이, 하세가와 다이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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