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91] <비밀일 수밖에>
김대환 감독의 신작 <비밀일 수밖에>는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표면적으로는 예비 사돈간의 어색한 동거를 그린 가족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각자의 비밀을 드러내야만 하는 순간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진실을 억압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포착한다.
강원도 춘천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는 '정하'(장영남)의 일상은 겉보기에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수많은 비밀 위에 세워진 불안한 균형이다. '정하'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휴직했지만, 아들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남편 사후 새로운 사랑인 동성 연인 '지선'(옥지영)과의 관계 역시 보수적인 학교 사회와 아들 앞에서는 철저히 감춰야 할 비밀이다.
이런 '정하'의 일상에 캐나다에서 유학 중인 아들 '진우'(류경수)가 의사인 여자친구 '제니'(스테파니 리)와 함께 예고 없이 나타난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니'의 부모인 '문철'(박지일)과 '하영'(박지아)까지 갑작스럽게 춘천에 나타나면서 상황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제니'의 부모가 정하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서로를 전혀 모르는 두 가족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며칠간의 동거 과정에서 각자가 감춰온 비밀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진우'는 실제로는 어학원 사무직원으로 일하다가 그마저도 그만두고 유튜버가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의사인 여자친구와 '제니'의 부모 앞에서는 이를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 '제니'의 아버지 '문철'은 겉으로는 권위적이고 까다로운 모습을 보이지만, 실상은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쳐 있고 과거 가족들에게 빚을 떠넘기고 캐나다로 도망치듯 이민을 간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있다.
김대환 감독은 <비밀일 수밖에>를 <철원기행>(2016년), <초행>(2017년)에 이은 가족 탐구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위치시켰다. 전작들이 아버지와 젊은 세대의 결혼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재혼과 엄마, 그리고 감독의 고향인 춘천을 중심 키워드로 삼았다. 김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가족은 가장 익숙하지만, 때때로 저마다 비밀을 간직한 가장 낯선 존재"라며 "그래서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고 설명했다.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평범한 재혼 이야기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굳이 영화로 만들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현시대에 꼭 필요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제시하려 했다. '정하'와 '지선'의 관계는 기존의 혈연과 법적 결합에 기반한 가족 개념을 확장하는 시도다. 주목할 점은 '정하'가 비밀이 드러난 후에도 어른스러운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들이 영화적 상상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밝혔다. 즉, 갈등의 해결책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어떤 선택이 옳은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셈이다.
<비밀일 수밖에>의 흥미로운 지점은 기존 가부장제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영화 초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정하'의 남편은 사춘기 아들을 옭아맸던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그의 퇴장은 구시대적 권위의 종말을 암시한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제니'의 아버지 '문철'이다. 그는 권위적인 태도로 예비 사돈에게 큰소리를 치지만, 정작 자신의 부모에게는 불효를 저지른 모순적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가장 성숙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은 '정하'의 동반자 '지선'이다. '지선'은 복잡한 가족 관계 속에서도 누구와도 조화롭게 어울리며, 진정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보여준다.
영화는 모든 갈등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정쩡한 봉합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 선택이다. 우당탕 소동을 겪고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실제 가족 관계의 복잡함을 반영한다. '문철'이 30년 묵은 숙제를 마주하고, '정하'가 사회적 편견과 맞서기로 한 변화는 작지만 의미 있는 전진이다.
그렇게 <비밀일 수밖에>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진실을 억압하는 것이 사랑일까? 진정한 가족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김대환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로 완성된 이 작품은, 변화하는 시대에 가족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
2025/09/01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비밀일 수밖에> (Homeward Bound, 2025)
- 개봉일 : 2025. 09. 10.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3분
- 장르 : 드라마, 코미디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김대환
- 출연 : 장영남, 류경수, 스테파니 리, 옥지영, 박지일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