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97]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엘렌 쿠라스 감독의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종군 기자 중 한 명인 리 밀러의 삶을 조명한 전기 영화다. 영화는 1977년 노년의 '리 밀러'(케이트 윈슬렛)가 젊은 기자(조쉬 오코너)와 인터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전형적인 액자 구조를 통해 관객은 1930년대 말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시골로 이동한다. 당시 '리 밀러'는 패션모델과 예술가들의 뮤즈로 활동하며 자유로운 보헤미안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피카소, 만 레이 같은 거장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던 그는 영국의 초현실주의 화가 '롤런드 펜로즈'(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하지만 유럽을 조여오는 전쟁의 그림자는 이들의 목가적인 일상을 뒤흔든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리 밀러'는 영국 보그의 편집장 '오드리 위더스'(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제안으로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런던 대공습이나 여성들의 전시 활동을 기록하는 정도였지만, '리 밀러'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리 밀러'는 종군 기자 자격을 얻기 위해 온갖 장벽과 맞서 싸운다. 미군의 종군 기자로 승인을 받은 '리 밀러'는 라이프지 사진기자 '데이비드 셔먼'(앤디 샘버그)과 함께 유럽 전선을 누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파리 해방, 그리고 나치 강제 수용소의 해방까지, 두 사진가는 역사의 현장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들이 바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부헨발트와 다하우 수용소에서 마주한 참혹한 광경들, 나치 부역자로 지목된 여성들의 수치스러운 모습, 그리고 전쟁이 남긴 상흔들을 리 밀러는 침착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해 낸다. 특히 전쟁이 끝난 직후 히틀러의 뮌헨 아파트에서 촬영한 욕조 사진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다하우 수용소의 진흙이 묻은 군화를 욕실 매트에 올려놓고 나체로 히틀러의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촬영한 이 사진은 권력에 대한 조롱이자 승리의 선언이었다.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를 연출한 엘렌 쿠라스 감독은 <커피와 담배>(2003년), <이터널 선샤인>(2004년), 등에서 촬영감독으로 활약한 베테랑이다. 엘런 쿠라스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도 그 시각적 감각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감독은 제작 과정에서 "리 밀러의 곁에 함께 있고 싶었다. 리의 숨소리를 듣고, 리가 보는 것을 함께 보며, 리가 겪은 일들을 같이 경험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는 리 밀러의 실제 사진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질감과 구도를 재현해 내며, 관객들이 리 밀러의 시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시각적 재현도 뻔한 서사 구조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다. 인터뷰를 통한 회상, 시간 순서대로 나열된 사건들, 예측할 수 있는 갈등 구조 등은 수많은 전기 영화에서 봤던 익숙한 패턴이다. 리 밀러처럼 기존 틀을 깨뜨리며 살았던 인물을 다루면서도 영화 자체는 너무나 관습적인 접근을 택한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케이트 윈슬렛은 '리 밀러' 역할을 위해 8년간 프로젝트를 추진해 온 열정만큼이나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케이트 윈슬렛은 "리 밀러는 모든 일을 사랑과 열정, 용기로 해낸 사람이다. 리 밀러는 '살아 있음'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영감 그 자체"라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케이트 윈슬렛은 거친 군복 차림으로 전장을 누비는 강인함부터 과거의 상처를 고백하는 연약한 순간까지 리 밀러의 복합적인 면모를 설득력 있게 구현해 낸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는 '리 밀러'가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모습을 그릴 때다. 강제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후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리 밀러'의 모습은 기록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리 밀러는 전쟁 후 사진 활동을 중단하고 요리에 몰두하며 과거를 봉인해 버렸다고. 그의 아들 안토니 펜로즈조차 어머니가 종군 기자였다는 사실을 사후 다락방에서 발견한 사진들을 통해 알게 됐을 정도였다.
영화는 이런 침묵의 의미를 탐구한다. 진실을 기록하는 일이 기록자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왜 중요한지를 차분하게 성찰한다. 리 밀러가 남긴 사진들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잔혹함을 증언하고 있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Lee, 2023)
- 개봉일 : 2025. 09. 24.
- 제작국 : 호주
- 러닝타임 : 117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엘렌 쿠라스
- 출연 : 케이트 윈슬렛,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마리옹 꼬띠아르, 앤디 샘버그,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