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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관계가 점층 그 시대의 여성상으로 보이는 영화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98] <홍이>

by 양미르 에디터


4690_4570_444.jpg 사진 = 영화 '홍이' ⓒ 에무필름즈

황슬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 <홍이>는 30대 여성 '홍이'(장선)와 '홍이'의 어머니 '서희'(변중희)가 펼치는 불편한 동거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평범한 모녀 갈등을 다룬다는 점이 아니라, 두 여성이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온 여성상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홍이'와 '서희'의 관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해온 서로 다른 역할과 기대의 충돌로 읽힌다.


30대 후반의 '홍이'는 빚에 시달리고 있다.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임용시험에 번번이 낙방했고, 노인 대상 한글 교실에서 강사 일을 하며 공사장에서 교통정리 아르바이트까지 뛴다. 그럼에도 생활은 팍팍하기만 하다. 어느 날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 '서희'가 목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이'는 경제적 필요로 엄마를 집으로 모셔온다.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는 '서희'와의 동거는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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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평생 절약하며 모은 돈의 통장과 도장을 딸에게 건네면서도 집안 상태를 보며 못마땅해한다. '홍이' 역시 엄마를 반갑게 맞이하지 못한다. 평소 타인들 앞에서는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던 '홍이'도 엄마 앞에서만은 경계심을 드러낸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홍이'는 데이트 상대에게 여유로운 일상을 연출한 거짓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정작 엄마에게는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서희' 또한 딸을 걱정하면서도 "너 같은 애가 뭘 해도 되겠냐"라는 모진 말로만 그 마음을 표현한다.

'서희'는 전형적인 386세대 이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생에 걸쳐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소중히 여기고, 딸에게 직설적이고 때로는 모진 말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에는 딸을 위한 마음이 숨어있다. 통장 비밀번호를 '홍이'의 생일로 해둔 것이나, 바나나 식초를 정성스럽게 담그는 모습에서 딸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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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희는 이런 '서희' 캐릭터에 대해 "그 사람의 생을 오롯이 살아내고 싶단 마음으로 연기했다"라고 밝혔다. 39년간 교직에 있다가 65세에 배우로 데뷔한 변중희의 경험이 '서희'라는 인물에 깊이를 더한다. 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지 못하면서도 은근히 딸을 챙기는 '서희'의 모습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기성세대 여성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홍이'는 현재 30대 여성들이 마주한 딜레마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꿈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현실에 타협해야 하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연애할 때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 돈에 손을 대기도 한다. 이런 '홍이'의 모습은 현재 청년세대 여성들이 겪는 경제적 불안정과 관계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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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은 '홍이'에 대해 "기존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주인공이라서 끌렸다"라며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못난 모습, 후회할 선택만 하는 주인공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인 위로를 준다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홍이'는 관객이 쉽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현실감을 더한다.

<홍이>가 흥미로운 것은 두 여성 모두 자신이 속한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희'는 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어머니이고, '홍이'는 독립적이고 당당해야 할 현대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틈이야말로 <홍이>가 포착한 현실의 복잡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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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홍이'와 '서희'가 한강에서 치킨을 먹는 순간이다.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며 '서희'가 낙조의 아름다움에 대해 중얼거리는 이 대사는 변중희의 즉흥연기였다고. 이 순간 두 여성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대감이 형성된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여성들이지만,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한 공감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순간을 과도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화해와 이해의 순간이 있어도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서희'의 치매는 점점 심해지고, '홍이'의 현실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감독이 의도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여기서 드러났다. 영화는 8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관객에게 불편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현실을 제대로 보는 출발점이 된다. '홍이'와 '서희'의 관계가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이며, 두 여성이 보여주는 모습은 결국 우리 시대 여성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

2025/09/10 메가박스 코엑스

※ 영화 리뷰
- 제목 : <홍이> (Red Nails, 2025)
- 개봉일 : 2025. 09. 2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86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황슬기
- 출연 : 장선, 변중희, 이유경, 기윤, 조윤영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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