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02] <어쩌면 해피엔딩>
"한국에서 SF는 안 된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그런데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고 나니 이 편견이 얼마나 게으른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화려한 CG나 거대한 우주선 없이도,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기에 더 깊이 있는 SF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근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두 '헬퍼봇'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 '제임스'(유준상)를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는 구형 헬퍼봇5, '올리버'(신주협)는 어느 날 충전기를 빌리러 온 이웃집 헬퍼봇6, '클레어'(강혜인)를 만나게 된다.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버려진 존재가 된 두 로봇. '감정 모듈'조차 없는 이들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올리버'는 '제임스'가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은 채 같은 공간에서 같은 하루를 반복한다. 반면 '클레어'는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대조적인 두 존재가 서로를 통해 감정을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결국 사랑에 빠지는 여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두 로봇이 함께 여행을 떠나며 겪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서로를 이해해 가는 순간들, 그리고 감정이 깊어질수록 함께 느끼게 되는 고통까지,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담아낸다.
이원회 감독은 중학교 때부터 뮤지컬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2018년 대학로에서 공연된 창작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되, 영화만의 언어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이 감독은 "영화로 만들어질 때 다양한 비주얼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부분을 자연스럽게 담으며 영화로서의 매력들을 잘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라고 밝혔다.
영화는 뮤지컬 특유의 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카메라가 포착한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 공간의 디테일, 빛의 흐름 등을 통해 스크린만이 줄 수 있는 친밀함을 만들어낸다. 특히 '클레어'의 과거 서사를 추가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대에서는 상상으로만 그려졌던 '클레어'의 상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캐릭터는 한층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감독이 "'클레어'의 상처와 서사를 더해 관객이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도록 각색했다"라고 한 의도가 정확히 실현된 셈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흥미로운 지점은 SF적 설정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미래, '헬퍼봇'의 구형 모델이라는 설정은 사실 우리 사회의 은유다. 쓸모없어졌다고 여겨지는 존재들, 외로움 속에서 기다림을 이어가는 이들, 상처로 인해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올리버와 클레어는 로봇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영화는 화려한 미래 도시나 복잡한 기술을 보여주는 대신, 낡은 아파트의 따뜻한 인테리어와 일상적인 공간들을 택했다. 금속성 광택이나 첨단 장비가 없는 이 세계는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로봇이 인간과 함께 살아온 세계, 그리고 이제 그들마저 버려지는 세계. 이 설정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감정 모듈이 없는 로봇들이 감정을 배워간다는 설정도 역설적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들은 오히려 무심하게 로봇을 버리지만, 감정이 없어야 할 로봇들은 서로를 통해 사랑을 배운다. 이런 서사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감정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뮤지컬 영화답게 음악은 서사의 중요한 축이다. 신주협과 강혜인의 목소리로 완성된 넘버들은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올리버'가 '제임스'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 '클레어'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 그리고 두 로봇이 함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들. 음악은 대사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을 전달한다.
다만 뮤지컬 특유의 직접적인 감정 전달 방식이 영화적 여백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과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으나, 이는 장르의 특성이기도 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뮤지컬 영화이고,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선택을 했다. 노래가 흐르는 순간 관객은 캐릭터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그 친밀함은 이 영화만의 강점이 된다. 한국에서 SF 영화를 만드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예산의 문제도 있고, 관객의 선입견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거대한 스펙터클 대신 친밀한 관계에 집중하고, 복잡한 설정 대신 보편적인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 결과 SF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로맨스가 탄생했다. ★★★
2025/09/30 메가박스 성수
※ 영화 리뷰
- 제목 : <어쩌면 해피엔딩> (My Favorite Love Story, 2025)
- 개봉일 : 2025. 10. 02.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95분
- 장르 : 뮤지컬, 멜로/로맨스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이원회
- 출연 : 신주협, 강혜인, 유준상, 강홍석, 정순원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