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04]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40년 전 트랙을 달리던 소녀가 이제 홍대 골목을 날아다닌다. 그것도 벽을 타고, 전봇대를 움켜쥐며. 어쩌면 곧 <스피드왕 번개>(1998년) 속 '드래곤 스파이어'라도 외칠 기세로. 전학 온 '빛나리 고등학교'에서 '나애리'(강시현 목소리)는 과거 자신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준 '하니'(정혜원 목소리)와 재회한다. 중학교 시절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애리'는 청소년 국가대표로 활약하다 슬럼프에 빠진 상태다.
한편 '하니'는 정식 육상을 떠나 서울 도심 골목에서 벌어지는 '에스런'이라는 비공식 스트릿 러닝 대회를 전전한다. 그러던 중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주나비'(이새벽 목소리)가 두 사람을 차례로 압도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넌 왜 달리는 거야?"라는 '주나비'의 도발적 질문 앞에서 '나애리'는 답을 찾지 못하고 흔들린다. 메달과 기록만을 좇던 '나애리'에게 달리기의 의미는 공백이었다.
결국, '하니'와 손을 잡은 '나애리'는 '하나의 팀'이 되어 공식 '에스런' 대회에 출전하고, '주나비'와의 최종 대결을 향해 나아간다. 오랜 적대 관계였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 그리고 승리보다 '달리는 즐거움'을 깨달아가는 성장담은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골자다. 허정수 감독은 "'하니'와 '나애리'의 관계가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어린 관객들에게는 도전과 성장의 메시지를, 성인 관객들에게는 추억과 공감을 전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여러 면에서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4년간 200여 명이 참여했고, 노브레인의 황현성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윤민의 '소실점', 류수정의 '빛나는 땀방울' 등 오리지널 OST를 완성했다. 황현성은 "'하니'와 '나애리', 두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이 두근대는 마음 하나로 이번 작품의 음악을 채웠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허정수 감독이 12분가량 이어지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한편의 뮤지컬처럼" 연출했다는 자부심도 음악의 완성도를 보면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선택은 흥미롭다. 원작자인 이진주 작가는 "'보물섬' 연재 전 기획했던 이야기 주인공은 '나애리'였다"라며, "이제 그 빚을 갚을 수 있어 행복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송원형 총괄 PD는 "'하니'는 시대상이 반영된 캐릭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사가 부족했던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훨씬 힙하고 도전적인 느낌을 살려냈다"라고 설명한다. 원작에서 악역으로 소비됐던 캐릭터의 내면을 조명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낸 시도는 충분히 의미 있다.
강시현, 정혜원, 이새벽 등 베테랑 성우진의 완벽한 싱크로율, 홍대, 이태원, 한강 등 서울 도심을 실제 답사해 구현한 로케이션, 세련된 작화까지.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은 분명 스크린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에스런'이라는 소재 선택 자체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송원형 PD는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형식 없이 달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고,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참고하면서 판타지를 더한 새로운 스포츠를 만들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라고 전한다.
그런데 왜 하필 가상 스포츠여야 했는가? 원작 <달려라 하니>의 본질은 어머니를 잃은 소녀가 홀로 육상 트랙을 달리며 상실을 극복하고 꿈을 키워가는 현실적인 스포츠 드라마였다. 여기엔 특별한 기술이나 판타지 요소가 없었다. 땀과 눈물, 좌절과 재기만으로 충분했고, 그것이 1980년대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까지 울림을 줬다.
'에스런'은 199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형적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스피드왕 번개>가 롤러블레이드와 리모컨카를 결합해 '오토롤러'를 만들었듯, 이 영화는 달리기에 파쿠르 요소를 접목했다. 벽을 타고, 기둥을 활용하며, 미끄러져 내려가는 액션. 허정수 감독은 "현실적인 육상 경기에 게임적 요소와 극적인 연출을 더해 전 세대가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스포츠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라고 언급했지만, 그 과정에서 달리기의 본질인 한계를 시험하고, 자신과 싸우며, 땀으로 증명하는 순수함은 흐려졌다.
최근 한국에서 러닝 열풍이 불고 있다. 사람들은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달린다. '에스런'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달리기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제작진은 굳이 가상 스포츠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그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는 의문이다.
결정적으로 <나쁜계집얘: 달려라 하니>는 타깃층이 명확하지 않다. 1988년 원작 애니메이션을 기억하는 30대~40대 이상에게 이 영화는 추억보다는 낯섦을 안긴다. 그들이 기대했던 건 정통 육상 드라마였지 도심 골목을 날아다니는 판타지 액션이 아니었다. 반대로 알파 세대는 1980년대 정서도, '하니'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착도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2025년 기준으로 얼마나 매력적인가? 캐릭터와 사건 전개가 평면적이라는 지적처럼, 깊이는 부족하다. 어쩌면 제작진 스스로도 그 균형점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야심 찬 기획과 성실한 제작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이 아쉬운 이유가 여기 있다. ★★☆
2025/09/29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Badass Girl, 2025)
- 개봉일 : 2025. 10. 07.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91분
- 장르 : 애니메이션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허정수
- 목소리 출연 : 강시현, 정혜원, 이새벽, 홍범기, 이상호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