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05] <포제션>
샘 닐을 처음 본 건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년)이었다. 공룡학자 '앨런 그랜트' 박사는 처음 보는 거대한 생명체 앞에서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배우가 10년 전, 훨씬 더 설명할 수 없는 괴물 앞에서 진짜 공포를 마주했었다는 것을 안제이 주와프스키 감독의 <포제션>(1981년)을 본 뒤에야 알았다. 공룡보다 무서운 건 인간의 감정이고, 그 감정이 형체를 얻었을 때 배우가 지어야 하는 표정이 얼마나 진짜여야 하는지를.
주와프스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실제로 이혼 과정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폴란드로 돌아가 <은빛 지구>(1988년 칸 영화제를 통해 공개됐으나, 1976년~1977년에 촬영이 이뤄졌다) 촬영 중 정부의 개입으로 제작이 중단되고, 다시 나라를 떠나야 했던 감독에게 베를린 장벽은 그저 배경이 아니었다. 분단된 도시, 분리된 부부, 갈라진 자아. <포제션>은 이 모든 분열을 한 화면에 밀어 넣고 폭발시킨다.
첩보원 '마크'(샘 닐)가 서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온다. 긴 임무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던 그는 첫날부터 아내 '안나'(이자벨 아자니)에게 이혼 통보를 받는다. '마크'는 술에 취해 3주를 날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집에는 어린 아들이 방치되어 있다. '안나'는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마크'는 '안나'가 '하인리히'(하인츠 베넨트)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인리히'를 찾아갔을 때, 그조차 '안나'가 자신을 떠났다고 말한다. '마크'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안나'를 미행시킨다. 탐정은 '안나'가 크로이츠베르크의 낡은 아파트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곳을 조사하러 들어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마크'가 직접 그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촉수를 가진, 인간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 '안나'는 그것을 보살피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포제션>을 보는 내내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부 싸움 장면에서 '안나'가 전기 칼로 자기 목을 긋고, '마크'가 그걸 보고 자기 팔을 그으며 "아프지 않다"라고 말할 때. '안나'가 지하철 통로에서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지르고 바닥을 구를 때. 괴물과의 성관계 장면이 노골적으로 등장할 때. 계속 '이건 너무 센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과한 게 맞는데, 그 과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상대방이 외계인처럼 느껴지고,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그 순간. 안제이 주와프스키 감독은 그 감정을 문자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뿐이다. 괴물은 은유가 아니라 감정의 실체화다. 이자벨 아자니가 촬영 후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자벨 아자니는 훗날 이 영화를 "심리 포르노"라고 불렀다. 샘 닐 역시 "정말 미치도록 빌어먹게 초현실적인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두 배우 모두 이 작품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힘들었던 촬영으로 꼽는다. 그리고 그게 화면에 다 보인다. 연기가 아니라 경험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안나'가 지하철 통로에서 발작하듯 몸부림치는 시퀀스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안나'는 장바구니를 벽에 내던지고, 쏟아진 우유와 달걀 위에서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지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경련하듯 움직이다가, 마치 무언가를 낳는 것처럼 하체에서 피와 점액을 쏟아낸다. 결국, '안나'를 맡은 이자벨 아자니는 1981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세자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포제션>의 괴물은 카를로 람발디가 만들었다. 그는 이듬해 '이티'를 디자인했다. 같은 손에서 나온 두 생명체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티'가 따뜻한 외계인이었다면, <포제션>의 괴물은 촉촉하고 끈적이며 성기를 연상시키는 형태다. 람발디는 주와프스키 감독의 지시를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라는 주문에, 정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걸 만들어낸 것.
'안나'는 그 괴물에게 먹이를 준다. 사람을 죽여서. 괴물은 점점 진화해 '마크'와 닮은 형태로 변한다. 폭력적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안나'를 떠나보낼 수 있는 '마크'. 이 도플갱어는 무엇일까?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낯설어질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우리가 사랑한 건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상적 이미지였다고 깨닫는다. <포제션>은 그 심리를 괴물로 시각화했다.
한편, 영화 첫 장면에는 베를린 장벽이 등장한다. 벽에는 "장벽은 무너져야 한다"라는 낙서가 있다. '안나'가 괴물과 함께 사는 아파트는 장벽 바로 옆에 있고, '마크'의 집 창문 너머로는 동독 쪽 폐허가 보인다. 감시하는 군인들, 텅 빈 거리, 분단된 도시. 이 모든 게 배경이 아니라 주제다. 감독에게 베를린 장벽은 아내와의 이별만큼이나 개인적인 상처였다. '마크'와 '안나'의 이별은 동시에 동독과 서독의 이별이고, 예술가와 조국의 이별로 그려진다.
냉전은 영화 뒤편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마크'의 정체 모를 상사들, 끊임없는 감시, 핵전쟁의 암시. 영화 마지막에 사이렌이 울리고 불이 꺼질 때, 우리는 이 부부의 파국이 세계의 종말과 겹친다는 걸 알게 된다. 당연히 <포제션>은 불편하다. 124분 내내 비명과 폭력과 체액이 난무한다. 부부는 서로를 때리고, 자해하고, 괴물과 성관계하고, 사람을 죽인다. 영화를 보는 동안 몇 번이나 '이제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봤다. 왜일까?
과함이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제이 주와프스키 감독은 감정을 검열하지 않는다. 이별의 고통, 배신의 분노, 집착의 광기를 있는 그대로 화면에 쏟아붓는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다. 우리 안에도 저런 괴물이 있다는 걸 아니까. ★★★☆
※ 영화 리뷰
- 제목 : <포제션> (Possession, 1981)
- 개봉일 : 2025. 10. 08.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124분
- 장르 : 공포, 드라마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안제이 주와프스키
- 출연 : 이자벨 아자니, 샘 닐, 마르기트 카르스텐센, 하인츠 베넨트, 조한나 호퍼 등
- 화면비율 : 1.66: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