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로 병원에 갔다가 그대로 갇힌 출산날
처음에는 당연히 (해외에서 아기를 낳더라도) 친정엄마나 정 안되면 시엄마라도
막달부터 옆에 있을 줄, 그리고 산후조리와 신생아 케어는 당연히 하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Covid 19" 의 영향이 이렇게 어마무시하게 닥칠줄이야!!
친정 or 시엄마가 오시기는 커녕 남편과 우스갯소리처럼
"텀블러에 미역국 담아 나르기" 조차 불가능할 거란걸, 그땐 몰랐더랬다.
예정일을 꽉 채우고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던 (구) 뽁띵 (현) 미니구미.
막달 마지막 검사에서 의사는
"만약 예정일 전에 나오면 바로 병원에 오고, 그때까지 안나오더라도 예정일 오후에 병원에 입원하러 와,
나도 오후 6시에 병원에 오도록 할게"
라고 말했고 나는 약간은 느긋-하게 출산가방이라는것을 쌌다.
며칠 전 이슬(로 추정되는)이 비치긴했지만 뽁띵이는 방을 뺄 생각이 없어보였고
예정일 당일 새벽에 배가 콕콕 아파오길래 '이것이 가진통인가!!!' 싶어 후다닥 남편을 깨웠고
끙끙대며 아침 시간 도착한 병원.
어우 이렇게 아프니까(앞서 나가는 남편을 때리고싶을 정도였다) 벌써 좀 열린거 아니야? 싶었는데
웬걸. 1센티 열렸댄다.
이날 오후에 입원 예정이긴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집에 다녀오기 애매한- 상황이었던지
병원의 헤바메 Hebamme (조산사)는 부지런히 걸으라는 말을 남겨주었다.
아마 그 다음날 예정일이었다면 집에 다시 돌려보냈을 분위기.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나도 다시 집에 갔다 오기도 귀찮았고 그냥 병원에 있자 싶은 맘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그 당시 심각해졌던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병원 견학하고 간 그 사이에 병원 지침이 바뀐것.
‘보호자’ 여도 병원을 나서면 “환자가 퇴원할 때까지” 다시 들어올 수 없다고 지침이 바뀐것이었다!
그 당시 남편이 잠시 일터에 전달할 것이 있어 다시 나갔다와야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안돼!!” 라는 지침에, 부랴부랴 남편의 동료가 병원 문 앞까지 와서 물건을 받아갔더랬다.
보호자 1인 외에 면회하러 들어올수도 없었기에, 입구 앞에서 열쇠만 건네받고 가야했던 상황.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 남편 세면도구나 여분의 옷 같은것 좀 같이 받을걸 하는 생각이…
남편은, 면도기도, 갈아입을 옷도 없이 이틀간 병원에 ‘갇혀’ 있게 되었더랬다.
텀블러 미역국은 커녕!! 이럴줄 알았음 컵라면이라도 가방에 챙겨갈 걸.
자연분만을 대비해 도넛 방석도 챙겼건만 마침 그날 새벽 정신없어서 집에 두고와버린지라
병원 안에서 남편이 당연히 집에 갔다오면서 챙겨와야겠다 싶었는데,
결론적으로 도넛 방석은 필요가 없긴했었다.
그렇게 아침 7시반 병원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간 출산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