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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노래 Sep 24. 2019

<취미로 직업을 삼다>

85세 번역가 김욱의 생존 분투기 (지금은 90세가 된..)

2014년 9월에 읽은 김 욱 작가의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는 충격 그 자체였다. 85세 노인의 리얼 다큐 생존 분투기는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안타까움의 한숨과 안도의 한숨이 번갈아 나오는 그런 책이었다. 당시 40대 후반의, 적당히 안락하고 적당히 교만하여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나와 남편,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게 하는 인생 선배의 생고생 스토리는 묘한 두려움과 희망을 주었다.

인생 어디쯤에서 싱크홀에 빠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어라.. 70이 넘어도 다시 도전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희망 말이다.

이 책은 꼭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선물도 참 많이 했다.

실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벌써 5년이 흘렀다.

김 욱 작가는 1930년 생이고 아직 생존해 계신다니 우리 나이로는 올해 딱 90세 되셨겠다.

그의 책 <취미로 직업을 삼다>가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의 깔끔 하이라이트 버전으로 나왔다.

작가 김욱의 인생을 4기로 나눠볼 때 그는 3기쯤에서 인생의 싱크홀에 빠진다. 그의 나이 65세부터다.

거칠게 줄여보자면 이렇다.


중앙일보 기자로 정년퇴직 후 투자 실패로 쫄딱 망한 김 욱 부부는 전 재산 200만 원을 가지고 문중 묘막지기가 되어 죽은 조상 무덤을 정비하고 농사를 짓는 대가로 두 부부가 거처할 곳을 얻는다. 남편보다 19살 어린 아내의 고생과 설움을 보다 못한 김 욱은 일본어 책의 번역을 시작하고 그들 수중에 500만 원이 생기자 다시 도시로 나와 제2의 인생에 도전하여 천신만고 끝에 '밥 굶지 않는 생'에 안착한다.


인간은 고약한 면이 있어 타인의 고생과 역경을 통해 나의 현실에 감사함을 새삼 느낀다. 남의 고난과 역경의 스토리가 나를 조금이라도 단단하게 만들도록 영향을 줄 때 내가 낸 책값은 전혀 아깝지 않다.

김 욱의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취미로 직업을 삼다>는 충분히 책 값을 하고 남는다. 그리고 그의 전작을 읽은 나 같은 기억력 짧고, 한 번 봤던 책이나 영화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 좋다. 그의 담백하고 위트 있는 문장은 젊은 작가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김 욱의 문장이 <약간의 거리를 둔다>에서도 살아 숨 쉬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가로서 그의 숨결과 영혼을 통해 나온 글이라 작가 김욱의 문장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기저기 이 곳 저곳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한숨 쉬는 청년들, 중년들, 젊은 백수, 늙은 백수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어제 같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을 거라 비관하며 생을 흘려보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굶어 죽을 것 같아서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 샀던 고가의 코트를 고물상 주인에게 팔아 며칠을 연명하다 결국 영양실조로 귀가 안 들리기까지 한 김 욱 작가의 생존 분투기를 읽으며 우리도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보자.

먹고 살아야 한다. 먹는 것이 해결되면 꿈도 꿀 수 있다. 꿈이 있으면 살아갈 목적이 더 풍성해진다.

90세의 김욱은 95세까지 책을 쓰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위하여 오늘을 산다.

나의 취미가 내 직업이 될 수 있는 날을 꿈 꾸며..


인생의 스승은 작은 책 속에서 숨 쉴지도 모른다.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2000년 2월 28일. 날짜도 잊지 못한다. 용달 트럭 하나를 빌려 전날 밤 미리 싸 둔 짐을 실었다. 아내가 그토록 아끼던 미제 웨스팅하우스 냉장고를 고물상에 넘기면서 돈 대신 짐 몇 개만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차 두 대로 내 손으로 지어 올린 집을 떠나 묘막으로 향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그 날이 이제는 나를 벗어나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시 이런 날이 올 줄은.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지금 붉은 가을이다-

청춘이 푸른 봄날이었다면 적추(赤秋)는 붉은 가을이다. 춘하추동 사계절에서 봄과 가을은 대칭이다. 만개할 여름을 준비하는 봄이 청춘이었다면 다시금 땅으로 돌아갈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가 가을, 곧 적추다. 겨울이 남아 있으니 아직 끝은 아니고, 게다가 결실도 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단풍은 덤이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고 애잔하기는 해도 화사했던 봄날과 뜨거웠던 한여름을 지나왔으니 좋게 보면 이 또한 휴식이 될 수 있다. 가을은 분명 차가운 계절이지만 결실로 풍요롭기도 한 계절이다. 내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에 대한 복기.. 필요하다면 부모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건과 추억들이 쌓여 있다. 내가 잘못했던 과거도 있고, 잘했던 일들도 있다. 그것들이 합쳐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 끝났다고 말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남자의 캐시미어 코트-
 
내 수중에는 비상금 5000원이 있었다. 그 돈으로 라면 다섯 개와 소주 두 병을 샀다. 라면 한 개로 하루를 버틸 작정이었다. 3일을 버텼다. 소주도, 라면도, 돈도 없었다.(...)
고물상 몇 군데를 돌아다녀서야 코트를 사주겠다는 인심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입겠다며 2만 원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아내 얼굴을 보자 왈칵 눈물이 터졌다. 울면서 귀가 안 들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가 뭐라고 대꾸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 아내는 서둘러 밥상을 차렸다. 며칠 밥을 먹고 고기를 먹고 따뜻한 국을 먹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가 들린다.  아내가 벌어온 50만 원과 보쌈과 갈비탕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었다. 며칠 후 서울의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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