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traveler, 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
“여보, 오늘은 야외 식사를 해요. 준비는 내가 다 할게.”
퇴근한 나를 맞이하는 남편이 건넨 첫마디다.
어제 밤새 비가 억수같이 오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대더니 오늘 퇴근길 하늘은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거대한 구름과 구름 사이에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는 ‘실버 라이닝’을 보며 느낀 경외감은 마치 신을 마주하는 그것과 비슷했다.
“오늘 하늘이 정말 끝내주지? 나도 당신한테 나가서 먹자고 할 참이었는데 통했네.”
남편은 배달 전문 고깃집에 주문한 양념갈비 세트를 직접 가지러 가겠다며 돗자리와 의자를 챙기곤 커피 내려오라는 말을 잊지 않고 먼저 나갔다.
주문한 갈빗집이 집과 가까우니 굳이 배달비 2천 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편하게 집에서 받자고 하겠지만 굳이 남편의 기쁨에 흠집 내고 싶지 않았다.
주문한 고기를 찾으러 가는 길에 그의 눈은 대청천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까 탐색하느라 바쁠 테고, 머릿속은 어떻게 음식을 세팅할까 그림 그리느라 바쁠 것이다. 남편은 그 짧은 시간 자체를 즐기러 주문한 음식을 직접 찾으러 간 것이다. 함께 산 세월이 길수록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커지는 것.. 이것이 진짜 '부부의 세계'다.
남편이 아낀 2천 원의 즐거움은 2천 원의 가치보다 훨씬 크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틀 전에 주문해서 마침 오늘 오후에 도착한 ‘강릉 커피’ 원두를 꺼내어 향을 잠시 맡으며 아주 흡족한 채 원두를 분쇄한다.
내가 잠시 느낀 원두 향의 행복감과 남편의 2천 원의 행복은 결이 비슷하다.
아주 작은 것에서 느끼는, 그리고 딱 그 시간에만 허락된 감정 아닌가.
정성을 다해 커피를 내리고, 보온병에 담아서 집 뒤 산책로를 따라 대청천으로 내려가니 남편은 벌써 돗자리를 아주 애매한 자리에 깔아 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여긴 사람들이 우리 앞으로 지나다니는 길인데 여기 앉아서 고기를 먹자고? 여긴 아니야~ ”
어쩌면 이다지도 센스가 없냐고 말하려다 참는다.
말이란 뱉으면 독침이고 삼키면 지혜가 될 때가 많다는 것을 요즘 참 많이 느낀다.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도 아닌데 굳이 핀잔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퇴근길에 보았던 웅장한 구름 속 아주 좁은 틈 사이로 빛을 내리던 실버 라이닝을 보며 가졌던 감사함을 다시 떠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그냥 내뱉어지는 말이 되지 않도록 나는 나를 더 다스려야 한다.
우리는 대청천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포인트의 넓은 바위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은 바위에 자리를 깔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며 후다닥 자리를 다시 펴고, 아이스 백을 옮겨 왔다.
물 가에 앉으니 산책 중인 사람들과 거리도 생겨 좋았다.
남편은 자기가 머릿속에 그린대로 음식을 잘 세팅했고, 기분 좋게 며칠 전 산 칠레산 화이트 와인을 개봉했다.
어제 밤새 내린 비로 대청천 물소리 위력은 대단했다.
저녁 바람도 기분 좋은 강도로 불었다.
고기도 맛있고, 화이트 와인도 훌륭했다.
초여름 평일 저녁, 여기저기 텐트를 치기 시작하는 동네 주민들.. 물 건너편에도 딱 우리 부부 연배의 부부가 저녁식사 거리를 펼치고 있다.
“여보, 오늘은 마음이 참 편안하고 좋네. 이게 여행이지 뭐. 그렇지?”
이 외의 문장들은 말하기도, 듣기도 그저 사족일 따름이었다.
남편의 말대로 우리는 참 편안하고 좋은 여름 저녁 작은 여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