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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노래 Aug 14. 2020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얻은 힌트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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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아~ 오늘 엄마가 책 한 권 샀거든. 엄마 다 읽고 나면 너도 읽어봐."

" 누구 책인데, 엄마?"

보통은 '책 제목이 뭔데?'로 묻던지 '무슨 책인데?'로 물어야 하는데 아들 훈이는 작가부터 묻는다.

이런 시건방진 시키.. 작가들 이름을 몇 명이나 알고 있다고 말이다.

"김영하 님 책이야."

"아~ 옛날에 나온 책인데 다시 냈다는 그 책? 이탈리아 여행에 관한 거? 서점에서 봤어. 엄마 다 읽으면 나도 읽어볼게."

옆에서 우리 둘의 전화 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이 나에게 핀잔을 준다. 재수하는 아들에게 괜히 바람 넣고 집중력 흩트려지게 한다고 잔소리를 제대로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남편은 모른다. 우리 아들이 일요일에는 문제집이 아닌 저 좋아하는 책 한 권 들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산다는 것을. 그 녀석은 그렇게 재수생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김영하 작가의 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책이 처음 나왔던 10년 전에 읽었다면 나는 아마 이탈리아의 뜨거운 남부 도시들을 이미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내친김에 그리스까지 여정을 이어 다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Letters to Juliet"을 본 이후로 내내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 중 베로나와 시에나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시칠리와 몰타 여행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작년에 Begin Again 이탈리아 편을 본 후로 이탈리아 여행의 욕망은 점점 커져갔다.

남편도 내 욕망에 자주 불을 지폈다.

 "여보, 내년엔 차 렌트해서 이탈리아 남부 도시 쭉 훑어보자고."

 ' 누가 자기랑 같이 여행 갈 거라고 했었나?'라고 핀잔을 줘도 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이미 렌터카 예약한 사람처럼 굴었다. 웃기는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오래 준비해온 대답>의 제목만 보면 김영하 작가가 독자에게 어떤 인사이트를 주기 위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EBS 여행 프로그램에서 작가에게 같이 프로그램을 해보자고 제안하며 어디를 여행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한 것으로부터 나온 제목이다.

프롤로그에서 요즘 우리 부부의 화두인 '미니멀리즘'과 맞닥뜨렸다.

남편은 <일상이 포레스트>란 책을 읽은 후부터 영혼의 동지를 만난 듯 신이 나서 집의 이것저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남편이 정리한 것들 중의 1호는 앨범이다. 서재 책장 한 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앨범들은 하나 같이 거대한 것들이다. 아이들 크는 모습을 신나게 담을 때는 좋았지만 앨범들이 두껍고 무거워 잘 꺼내 보지 않는다. 디카가 나오고 싸이월드가 생기고 카메라 기능이 폰의 제일 미덕이 된 이후로 앨범은 그저 책장 칸을 지나치게 차지하는 애물단지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저 앨범들을 버리면 종이 사진들은 어떡하나 싶어 버리지도 못하니 애물단지일밖에.

그러다 남편은 다이소에 가서 5*7 사이즈의 플라스틱 수납박스를 사 왔다. 그리곤 앨범에 꽂힌 수많은 사진들을 일일이 다 뺀 후 분류하고 정리해서(내가 못 생기게 나온 사진들은 가차 없이 버림) 플라스틱 박스에 차곡차곡 담았다. 마누라 박스, 딸 박스, 아들 박스.. 안타깝게도 자신의 박스는 만들지 않았다. 몇 장 되지 않는 자기 사진들은 마누라 박스 끄트머리에 끼워 넣었다. 마누라, 딸, 아들 박스를 꽉 채운 사진들을 찍어주느라 정작 자기의 기록은 변변찮은 것이다.

무튼,

작가는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을 다 맞추고 살 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영혼이 시쳇말로 탈탈 털려서 집으로 들어가기 일쑤였고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보고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의 권유로 그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캐나다에서 1년을 살아보기로 하는데 집이 너무 일찍 팔리는 바람에 그들은 짐을 맡기고 두 달 일정으로 이탈리아 시칠리 섬으로 향한다. 짐 보관소에 짐을 맡기려면 줄이는 것이 우선이고 그는 이 작업에서 또 한 번 영혼이 털리고 만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것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물질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수한 힘으로 보았다. 힘이 커지면 어른이 되고 힘이 완전히 사라지면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죽는 것이다.

힘은 좋은 공기와 물,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반대의 경우 약해진다.

권력자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많이 받는 사람이고 또 그 힘을 잘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훌륭한 인간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하나의 사상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곡의 음악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 이럴 때 나의 힘은 더욱 순수하고 강해진다.

모든 것이 막힌 것 없이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생성하게 될 때 인간은 성숙하고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수많은 , 그러나 한 번 들춰보지도 않은 DVD들, 듣지 않은 CD들, 먼지 쌓인 책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 애썼던 것일까?

그냥 영화는 개봉할 때 보고, 혹시라도 그때 못 보면 나중에 DVD를 빌려 볼 수 있었을 텐데, 책도 도서관에 가서 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모든 것이 막힘없이 흘러갔다면 내 삶은 좀 더 가벼워질 수 있었을 텐데, 더 많은 것이 샘솟았을지도 모르는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생을 흘러가는 삶, 스트리밍 라이프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메멘토 모리 vs 카르페 디엠

작가는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이 결국은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vs '현재를 살아라'..

노토라는 작은 도시는 어느 여행잡지에 이탈리아 최고의 여행지로 하루아침에 뜬 도시이다.

삼백 년 전 지진으로 도시가 멸망하고 이후 부유한 본토와 달리 힘들게 삶을 살아왔던 노토는 관광지로서의 콘텐츠나 인프라가 없다. 당연히 여행객들도 없는 삭막한 도시 이건만 어쩌자고 어느 여행 전문가의 눈에 띄어 버렸다. '이탈리아 최고의 여행지'라는 타이틀과 함께.

이후 호텔을 짓고, B&B를 운영하며 무덤덤한 얼굴로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곳.. 가히 짐작이 된다. 그들의 눈빛은 이런 것일 거다. '아니,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굳이 여기를, 왜?'

작가 부부는 하루 머물 예정이었던 노토에서 사흘을 더 머문다. 무덤덤하고 약간은 퉁명스러운 노토의 사람들과 음식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지진이 조상들의 삶을 다 앗아갔고 그 여파가 후손에게 고스란히 넘어와도 이탈리아 최고의 아이스크림과 디저트를 즐기는 곳인 노토를 보며 작가는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나는 김영하 작가로부터 인생의 값진 힌트를 얻는다.

내 삶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내가 바라는 모습의 죽음을 디자인해 보자. 그리고 그 죽음을 자주 기억해보자. 후회나 회한 없는 생을 마감하려면 어제의 미래인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노토의 식당들은 거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몸을 낮추지도 않는다.

섬세하게 요리된 아름다운 음식들은 이탈리아의 물가에 비하면 고마울 정도로 싼 편이며, 특히 식사를 마무리하는 노토 특산의 디저트들은 믿을 수 없이 맛있고 저렴하다.


식도락이야말로 순간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도 없고 잘 보존하여 간직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어느 한순간 최고의 행복감을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천천히 사그라진다.

몇 줄의 문장으로 겨우 남을 뿐이다.

노토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이 삼백 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신전

우리나라 종교인들이 이 부분을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고 고민해보면 좋겠다.

나는 최근에 세례를 받은 병아리 가톨릭 신자이다. 교리반 선생님이 늘 얘기한 것이 있다. 가톨릭에서의 '교회'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의미이기 때문에 교회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소의 의미로는 '성전'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성전은 인간들이 신과 조우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만든 것이지만 과연 신이 저 크고 화려한 성전에 계실까.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짓기 위해 헌금을 걷고 새 땅을 사고, 다시 감사 헌금을 하고, 누가 크게 헌금한 덕에 이 문이 지어졌고, 어느 신도의 막대한 헌금으로 교회 도서관을 짓고.. 이런 공지사항을 신께서는 좋아하실까.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은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가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어 올렸기에 이 집들은 끝내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세월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것, 폐허가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전이라는 건축물의 운명이다.


Memory Lost

작가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드브로브니크로 향하는 배의 보세구역에 Memory Lost 란 경고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 확인해보세요.. 란 뜻으로 쓴 것 같은데 이탈리아 식 어순을 그대로 영어로 표현하니 메모리 로스트.. 직역하면 '잃어버린 기억'이란 엉뚱한 표기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이 어색한 이탈리아식 영문 표기가 더 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와 memory lost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김영하 작가.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 건달의 세월을 견딜  알았고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알고 있다고 믿는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Memory Lost.


잃어버린 기억은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굳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야 할까.

요즘엔 남편이 정리해서 쉽게 들여다봐지는 사진들을 보며 옛 기억들을 새삼 추억하는 맛에 빠져있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 뿐이다. 사진 속엔 그런 날들의 나만 있으니 말이다.

어둡고 슬프고 불행했던 기억들은 사진이 아니라도 가슴속 상처 혹은 기억 속 트라우마로 평생 가겠지만 편안할 때는 생각나지 않는다. 사진에도 없는 기억들을 굳이 찾을 필요는 없다. 늙어서 회한이 남으면 버킷 리스트에 넣어 하나하나씩 처리하고 싶다.

작가는 젊은이와 늙은이의 차이점은 잃어버린 기억에 있다고 한다. 젊은 날의 외향적 모습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앗아 가는 것이다. 다만 내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사상들을 잃어버린다면 나는 할 수 없이 늙은이가 된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사상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아.. 모르겠다. 모르겠다..

여지없이 나도 memory l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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