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이라는 철학
'흔적 없이 살고 자연에 순응하기 위해 산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아주 작은 17평 주택이었다. 그 집에서 많게는 10명의 식구가 모여 살았었다.
그리곤 마치 TV 드라마 화면 속의 인물이 스르륵 사라지듯 한 명씩 , 한 명씩 집을 떠났다. 내가 중1이었을 때 나보다 10살 많은 큰 오빠가 제일 먼저 독립해서 나갔다. 2년 뒤엔 큰 언니가 결혼을 해서 나갔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작은 오빠는 직업군인이 되어 나갔고, 그다음 해엔 작은 언니가 결혼을 해서 나갔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무튼 나는 22살부터 아버지, 엄마와 셋이서 이 17평의 집을 아주 넓게 쓸 수 있었다.
내 방은 2평 남짓 되었을까.. 앉은뱅이책상 겸 화장대, 5단 서랍장, 작은 tv, 미니 컴포넌트가 있던 방이었다.
공간은 좁아도 내겐 더없이 넓고 큰 세상이었다.
내 방 벽엔 가고 싶은 곳이 다 담겨 있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다.
첫 일본 여행에서 겁도 없이 덜컥 사온 미니 컴포넌트로 세상의 음악을 들었다.
유럽 여행에서 사 온 엽서들을 벽에 붙이며 세계지도에 작은 점들을 찍었다.
여기, 여기, 여기.. 아, 그리고 여기..
내가 건너온 20대는 열심히 돈 벌고, 더 열심히 논 세월이었다.
30대는 그저 치열하게 살뿐이었고 40대는 여유와 불안이 혼재했다.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런 재미는 고작 한 달 정도 갔을까.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의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 아파트가 넓어졌고, 아이들은 '누구세요?' 할 정도로 커버렸고, 남편과 나는 어느새 늙어있다.
넓은 평수 아파트에 사는 나는 17평 작은 집에서 살 때보다 더 큰 세상을 즐기며 살았을까.
물질적으로 내가 가진 것만큼 행복도 함께 커왔을까.
경제적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던 마흔 초반의 나는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에 힘들어했고, 마음의 공간이 좁았던 나머지 오랜 친구와 (나 혼자 마음으로) 절연을 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을 때나 있을 때나 남편에게 서운할 때가 많았고, 이유 없는 불안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운 적도 많았다.
그러다 몇 해 전 생사의 모멘텀을 겪으면서 내게 주어진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감사함을 시작으로 스스로 치유의 방법을 찾았고 다행히 내면의 약함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
치유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혼자 산책을 하며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인생의 어리석음을 내려놓는다.
남편에게 늘 솔직한 감정을 보여준다.
불안은 실체가 아닌 허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기도하며 반성한다.
내 인생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을 채우는 것에 치중하며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 삶에 단호한 확신이 없다. 해서 가끔 예전처럼 불안이 찾아올 때가 있다.
특히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내겐 고질적으로 환절기 감기처럼 불안이 찾아온다. 그러다 마침 나를 때리는 문장 하나를 만났다. 지난 연휴 동안 읽은 책 <조그맣게 살 거야>의 한 문장이 번개처럼 나를 때린 거다.
흔적 없이 살고 자연에 순응하기 위해 산다.
흔적 없이 살기.. 어딘가에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나에게는 참으로 어렵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내 흔적은 여기저기에 표식처럼 남는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표식이 생긴다면 이런 낭패가 없다.
진민영 작가는 '나는 돈 계산하고 셈하려고 세상을 사는 게 아니다. 나는 흔적 없이 살고 자연에 순응하기 위해 산다.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내게 자연스럽지 않고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수치와 경제를 앞세워 합리화할 수 없다'라고 당차게 말한다.
돈 계산하고 셈하는 세상은 내가 여태껏 살고 있는 방식이다. 남편의 주식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산 아파트 현재 시세에 은근 안도하고, 매일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며 택배를 받는다.
내 삶의 방식을 합리화하고 싶지만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으니 작가의 말이 뼈 때리게 마냥 다 맞다.
앞으로 몇 년은, 두 아이가 각자 자기 밥그릇에 제 돈으로 밥을 담을 수 있을 때까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애써 구실을 만들지만 작가의 삶의 방식에,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인생 정의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지난 여름에 읽었던 <일상이 포레스트>란 책에서 미니멀리즘의 가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고 있다.
옷부터 시작해서 사진, 책, 이불이며 컵들을 정리하다 급기야 잘 작동되고 있던 에어컨까지 정리했다.
물론 에어컨을 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그 뜨거운 후회는 남편과 나를 여름에 활활 달구었다. 그렇지만 정리의 희열은 나름 중독성이 강하다.
우리 부부는 요즘도 뭘 또 정리할까 서로 여기저기 뒤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은 옷을 버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옷을 사는 고질병 때문이다.
남편은 식료품을 택배로 주문한다. 택배 종이 상자가 없는 날이 없는 우리가 무슨 미니멀 라이프를 살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조그맣게 살 거야'라고 말하는 작가의 생활은 정말 대단하다. 마치 최소한의 개인 물품을 갖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수녀님처럼 그렇게 사는 것 같다. 지금 죽어도 정리할 물건이 딱히 없는 개인의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녀의 미니멀리즘 시작은 어쩌면 욕심을 없애는 것부터일지 모른다. 그렇게 정리당한 욕심은 불안을 정리한다. 불안이 없으니 더 가지고자 하는 물질의 가치 욕구가 사라진다.
우리가 더 가지고자 하는 물질의 욕구는 삶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누가 나를 무시할 것 같은 불안, 내가 죽으면 내 아이들은 어떻게 살까 하는 불안, 가족 중 누가 중병에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 아직 나에게 닥치지도 않고, 영원히 닥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재테크를 하고, 넓은 집으로 옮기고, 명품백을 사고, 좋은 가죽 소파를 사고, 집에 어울리지 않은 장식품과 대형 가전,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대형 스크린 TV를 사는 것이다. 고백건대 나의 이야기다.
행복을 가져다줄 성공을 위해, 사회가 말하는 공식을 따랐을 뿐인데, 우리를 기다리는 건 재앙이다. 현재 행복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사는 환경과 후손의 미래를 위협한다면, 분명 그 규칙과 기준 등은 모두 다시 정해야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하고, 함께 고민하고 행동한다면, 사회에서 세뇌당한 타락한 소비주의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또 다른 사치품과 물질, 값비싼 쓰레기들이 아닌, 전해받는 따뜻한 사랑, 함께 주고받는 소속감, 인정, 가친관의 공유다.
나는 진민영 작가처럼 살 수는 없다. 그녀의 가치는 자신에게 몹시 단호하고 거침없다.
다만 그녀의 글에서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어 다행이다.
버리기도 기술이고 훈련이다.
'어떤 물건이든 '처분'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다음 범주안에 속한다.
1번. 실용적 쓰임이 있는 물건
2번. 심미적 쓰임이 있는 물건
3번. 1,2를 충족하지 않는 물건
이 셋을 분류하여, 3번을 찾아내어 처분하면 된다.
쓰임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을 처분함으로써 공간은 여백을 되찾고 머릿속은 홀가분해진다. 스트레스는 줄고 시간과 돈이 모인다. 모인 시간, 돈, 정신적 여유로 나는 평소 관심 있게 주시하던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게 된다. 투자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와 시간적 자유를 얻는 것이 미니멀리즘의 본질이다.'
정보와 생각을 미니멀하게 만들기
'미니멀 라이프는 삶의 전반에 걸친 단순화 작업이다. 정보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물건이 아무리 적어도 사소한 일로 전전긍긍하고, 적어놓은 메모나 지식에 집착한다면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다.'
관계 미니멀리즘
'물질적으로 아무리 미니멀해져도 내면까지 미니멀해지기란 쉽지 않다. 어딘가에서 문자 메시지가 오고, 회원 가입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내 개인 정보는 어느새 여기저기 허공을 떠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포맷을 한다. 업무상 연락처를 교환해도 일이 마무리되면 삭제한다. 카카오톡도 문자 수신함도 정기적으로 비우고 삭제한다. 오프라인을 비롯해 온라인 공간도 정보나 물건이 쌓이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만남을 최소화하면 그 시간만큼 최선을 다해 집중할 수 있다.'
길고 느리고 밍밍하게
'관광과 쇼핑을 거의 하지 않고 그 공백과 여유 자금으로 머무는 시간을 연장한다. 그리고 길고 느리고 밍밍하게 여행하며 오래도록 진하게 향기를 흡수한다.'
50대 후반에는 나도 그저 하염없이 '길고 느리고 밍밍하게' 여행하듯 살아가고 싶다.
그때가 오면 17평 주택에 살 때 가졌던 나만의 넓은 세상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
작가는 자신의 미니멀한 삶과 그 가치에 확신이 있다. 확신에 차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의 문장을 읽고 철학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통섭의 에너지를 얻고 싶다면 진민영 작가의 '조그맣게 살 거야'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