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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노래 Nov 04. 2016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야야코 #책 읽는 고양이 # 약간의 거리는 예의다

코가 시릴 때, 드러낸 손이 시릴 때, 마침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은 한 줌의 행복이다.

무릎 담요를 하고 환한 창가에서  읽는  시간의   행복은 어릴  무척 좋아했던 '똥과자'(요즘은 '달고나'라 부르는)처럼 부풀어 오른다. 


오늘은 얼마 남지 않은 책을 다 읽을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감사한 날이다.

무릎에 담요를 덮고, 오른쪽 볼은 창밖의 햇볕으로 따땃한.. 모처럼의 여유가 허락된 시간에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는 책을 읽었다.

책에 줄 긋는 사람이 아니건만, 156페이지 밖에 안 되는 핸디 한 얇은 책에 줄 긋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소노 아야코의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마흔 이후의 나의 가치를 발견하다>, <빈곤의 광경> 이후 그녀와의 네 번째 만남이다.

그녀의 문장은 한마디로 무덤덤.. 하다.

유려한 문장이거나 은유가 기가 막히다거나 화려한 형용사를 구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간다.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한다.

위대한 문장가나 사상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한 말을 인용하고 풀어내다가 겨우 결론 부분에 가서야 자신의 생각을 짧게 말하고 글을 맺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인용한 것인지도 모르고 읽으며 '우와, 이 사람 글 좀 봐..' 하며 감탄하다가  '-라고 말했다..'라는 글과 맞닥뜨렸을 때 튀어나오던 우쒸 우쒸.. 의 경험들, 혹시 나만 많은가?

소노 아야코는 자신의 삶을 인용할 뿐 유명한 누구를 데리고 오지 않아서 좋다.

말하자면 이렇다.

74쪽이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내온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순간과 운이 없었던 날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음에 동참하게 되었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과 싸워온 세월들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서 부와 권력과 행복이 뒤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게으르고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소소한 발견의 재미를 알아나가는 것도 지혜라고 해야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생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인생은 좋았고, 때론 나빴을 뿐이다.

그래, 인생을 좋고 나쁨으로 어떻게 단정 짓겠는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들어오고 나감일 뿐이지.

사람도 그러하다.

내 잣대에서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는 나더러 좋은 사람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며 손가락질할 수 있다.

그러다 그 평가가 뒤집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쉽게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나는 나의 오늘을 살뿐이다.

운이 좋은 하루일 수도 있고, 재수 없는 하루일 수도 있는 나의 오늘 말이다.


그녀는 우리가 다 비겁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다만 365일 중에 몇 날만큼이라도 덜 비겁하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비겁하다

"그렇게 뒤섞여 뿌려도 쑥갓은 쑥갓으로 자라나고, 청경채는 청경채로 자라나고, 유채는 유채로 자라나잖아요. 우리네 같은 보잘것없는 인간은 사상적으로 타협해서 유채를 심었는데 쑥갓으로 커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관찰은 매우 훌륭했다. 식물은 이것저것 뒤죽박죽 심어 놓아도 자기 자신을 잃는 법이 없다.
그걸 보면서 나는 식물보다 인간이 훨씬 비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종자가 다른 식물들을 한 곳에 심어 놓아도 청경채는 청경채고 유채는 유채다.

우리 속담에도 콩 어쩌고, 팥 어쩌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뭐 그러랴.

올곧은 생각과 정의감들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마련이고, 어울리는 사람들에 따라 변질되기도 한다.

간혹 중심을 잃기도 하고, 잊기도 할 때 가장 정의로웠고 뜨거웠던 젊은 날을 떠올려 보자.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볼 수 있게 하자. 아니,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고 있다면.. 인간은 그리 쉬이 변질되지도 않을 것이고 퇴색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핸디 한 책이다.

그럼에도 단시간에 후딱 읽어치우는 책이 아니다.

나는 책을 하루에 아주 조금씩 읽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지만, 소노 씨의 글을 몇 문장 읽다 보면 어느새 생각이 많아졌다.

내 지나온 , 그리고 현재의, 앞으로의 인간관계들에 대한 후회와 걱정과 계획들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또 책을 펴서 소주제 몇 편을 읽는다. 그리곤 또 생각..

거의 2주를 그렇게 한 것 같다.

생각과 반성과 다짐을 함께 만들어주는 멘토 같은 책이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어머니는 집 주변 환경도 공기가 잘 통하는 곳이 좋다고 하셨다. 옛날 시골집들은 주변에 팔손이나무나 단풍, 자양화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집 주변을 둘러싼 나뭇잎과 가지를 손질했다. 통풍이 나쁘면 집이 썩고, 그 집에 사는 사람도 병에 걸린다고 믿으셨다.
그 믿음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이 뒤얽힐수록 서로 성가셔진다. 살다 보면 나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싶다.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되도록 하는 것.

친한 사람일수록 약간의 거리는 필수다. 고백건대 나는 친하다는 명목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막말을 해대어 상처 준 일이 많다. 친한 사이에 이런 것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어쭙잖은 결계를 치며 감정 폭력을 일삼아 왔을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예의는 친한 사이일수록 더 지켜져야 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약간의 거리를 두어 그도 나도 서로에게 시원한 바람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좋겠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감사한 금요일 오전, 좋은 책 한 권 마치고 나니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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