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사랑을 가득 담고
큰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기말시험에서 수학 빼고 다 백점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백점 받은 것을 칭찬하지 않고, 수학 망친 것만 야단을 쳤다.
그때의 나는 철저하게 학부모 마인드였다.
그때부터 아이는 수학에 트라우마가 생겼고, 중학교 3학년 수학 시험시간에 식은땀을 흘리며 어지러움을 호소해 시험을 중단한 채 선생님의 도움으로 보건실에서 안정을 취했던 적이 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너무나 아팠던 나는 그때 나의 타이틀 '학부모'에서 '학'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딸에게 더 잘할 수 있고, 더 재미있는 것을 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위선이었다.
아이가 근성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부모의 잔소리가 없어도, 주말에 늦잠을 퍼질러 자도, 스스로 컨트롤하며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작은 아이 5학년 때는 녀석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지훈이 수학학원 좀 보내세요. 애가 수학 점수가 엉망입니다. 수학 부진 점수에 걸려서 부진아 수업에 넣으려다 보니 어머니도 학교 선생님인데 괜히 속상하실까 봐 먼저 전화드립니다.."
부진아 지도는 학부모의 동의하에 하는 것이라서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선생님께는 집에서 가르치겠다고 하고 아이가 반 평균을 깎아 먹은 주범이라 죄송하다고 했다. 사실인즉 그러했으나 그게 그리 죄송할 일은 아니었다. 높은 반 평균은 선생님의 자부심이겠지만 부진 기준이 80점이라는 건 어딘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에게 수학학원을 가겠느냐고 물으니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다니겠다며 자기는 논술 수업과 태권도만 다니고 싶다고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말했다.
"너 수학 부진이라는데?"
수학 학급 평균이 88점인데 이번에 그 높은 평균 점수보다 못 나왔다고 어찌 부진일 수 있냐며 억울해했다.
"그래, 그래. 엄마도 그리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도 동의 안 했다."
학부모에서 '학'이란 한 글자만 떼서 내 아이를 바라보면 그동안 안보이던 것도 보인다.
집에선 워낙 말이 없는 남매라 학교 가서도 그럴 줄 알았는데 딸아이는 학교 축제에서 혼자 춤으로 출전하여 대상을 타 와서 남편과 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딸의 별명이 '춤신'이란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중2 아들도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분위기 메이커라 너무 웃기다고 말씀해 주셔서 녀석이 나름 사회성이 잘 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안심하고 학부모가 아닌 부모의 마음으로 녀석의 모든 것을 신뢰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평판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건실한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한국사회는 이미 소화불량 상태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사람의 품질'을 구분하고, 금수저와 흙수저로 부모의 등급과 아이들의 계급을 정해버린 불량 사회 속에서,
미래 한국사회의 건강함 따위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개선의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정치권력과 부도덕한 대기업의 그늘에서 내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를 장담하긴 어렵다.
이 정글 같은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잠 덜 자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승리하라고 말해야겠지만 승리가 과연 끝이 있기나 한 것인가, 또한 절대적 가치가 맞는가.
'학'을 뗀 부모, '학생의 부모'가 아닌 내 아이의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건, (마침 수많은 경쟁자들을 만난 이 아침에 말이다,) 그저 할 수 있는데 까지 했으면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어젯밤 호텔에서 딸이 쓴 낙서(본인은 캘리그래피라고 하는)처럼,
너에게 솔직했고
네 감정에 충실했으니
모든 걸 시도했던 내 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