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숙이와 소도시 여행 2탄- 유후인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와의 만남은 언제나 기분 좋다.
혜숙이와 나는 분당과 김해라는 '롱디 관계'이지만 따지고 보면 제일 자주 만나는 친구이다.
무튼 8월이 끝나는 마지막 금요일 저녁에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카타 역 앞 '도큐 한즈'에서 7시 30분쯤에..
김해공항에서 금요일 저녁 5시 50분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니 6시 30분이다.
비행기 앞 좌석이라 빨리 내려서 종종걸음으로 입국 수속까지 하고 나오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메트로 타고 하카타 역에 도착하니 7시다.
아, 아직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배도 살짝 고프지만 혜숙이와 만나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면 이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혜숙이는 인천에서 3시 30분 비행기라 숙소에 가방을 놔두고 혼자 시내 구경이나 하며 나를 기다릴 거라고 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고 카톡을 보냈다.
"나 지금 도큐 한즈 앞이야~"
어라? 이 친구가 카톡을 확인하지 않는다.
스을 불안하다..
보이스톡을 시도했다.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단다.
벌써 도착해서 혼자 시내 구경하고 있어야 할 그녀의 폰이 꺼져 있다니..
" 고객님 폰이 꺼져 있습니다. 고객님의 폰이 꺼져 있습니다.."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폰 속의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 아는데.. 전기 충격 같은 걸로 내 친구에게 신호 좀 주면 안되겠늬이?..
도큐 한즈를 몇 바퀴나 돌아보고, 하카타 역 앞 그 복잡한 곳을 지나는 사람들 중 혜숙이가 있는지 매의 눈으로 스캔하면서 고객님 폰이 꺼져 있든 말든 보이스 톡을 계속 시도했다.
그렇게 지쳐갈 무렵, 고객님의.. 이혜숙 고객님의 보이스 톡이 온 거시다.
그녀 특유의 가늘게 떨리는 고음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어, 미리애~ 나 지금 스타벅스 근처야. 너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야아아.."
(가스나.. 콱.. 마..)
숙소에 먼저 가서 체크인 하겠노라던 그녀가 20인치 캐리어를 질질 끌며 얼굴이 홀쭉 해져서 걸어오고 있다.
"야! 니!"
경상도 말, 야! 니! 엔 엄청난 메타포가, 내가 하고 싶은 장황한 말들이 다 들어 있다.
"아니이, 미리애, 말도 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음은 그녀의 고생담이다.
' 하카타 역에서 숙소까지 도보로 1.7 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아서 걸어갔다? 그런데 배터리가 별로 안 남은 거야. 구글맵 켜고 가는데 10% 밖에 안 남은 거 있지? 간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숙소까지 몇 백 미터도 안 남았는데 결국 폰 배터리가 나가 버리는 거야아~
지나가는 경찰한테 숙소 주소 보여주며 물어봤는데 걔네들도 모르는 거야 아~
결국 포기하고 다시 걸어서 오는데 배는 고프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너무 아파서 스타벅스 들어갔다? 에고, 폰 충전하려고 보니 110 볼트 충전기네~ 그거 사러 또 갔다가 겨우 앉아서 충전하고 있는데 너 벌써 왔다고 해서 나왔다야..
아휴, 죽을 뻔했네~~
아, 근데 넌 왜 이렇게 빨리 도착했냐?'
우리는 늘 이렇다.
그래도 늘 재밌다.
하카타 역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내리면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우리의 숙소가 있다.
레지던스 호텔인데 여태껏 후쿠오카에서 지냈던 숙소 중 단연 가성비 갑인 곳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대신 나카스 야타이에서 이것저것 먹기로 했다.
숙소에서 구글맵으로 길 찾기를 하니 나카스까지 1.4킬로미터이다. 숙소 직원에게 나카스까지 어떻게 가면 좋은지 물으니 버스를 타면 10분, 걸으면 15분이 걸린다고 한다.
걷기도 애매하고 버스 타기도 애매한 거리가 바로 1킬로~2킬로 사이인 것 같다.
나카스로 향했다. 망할, 걷기엔 멀었다.
시커먼 하천이 보여야 하는데 도랑만 보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구글맵이 영 아둔하게 작동을 한다.
왠지 쎄한 느낌에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 물어 가긴 했다.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내며 야타이를 찾아 들어가긴 했지만, 좁디좁은 포장마차에 앉아 옆 사람 팔꿈치 쳐가며 먹은 라멘, 꼬치, 볶음면 등.. 은 무지하게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로였다. 10년 전쯤 친구 두 명과 왔을 땐 나카스의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 많은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렇게 따닥따닥 좁지는 않았다. 포장마차에 앉히는 손님의 숫자가 이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 '오갹사마' 이긴 한가 싶다.
예전의 야타이는 시원한 맥주와 덴뿌라와 오뎅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넘치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관광객이 급격히 늘어나서 그런지 예전의 정취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흡사 변해버린 옛 친구를 보는 느낌이랄까.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제대로 한 번에 딱 찾아 딱 가면 구글맵이 알려 준대로 딱 1.4킬로미터를 걸었겠지만, 우리에겐 이 "딱!" 이란 것이 늘 모자란다. 해서 그 밤에 왕복 딱 5킬로쯤 걸었나 보다.
여자들의 여행은 사실 잠자리 들기 직전이 백미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 카톡으로 충분치 않은 안부와 일상의 고민거리들을 짐 보따리 풀어내듯 푸는 식이 거행된다.
이야기를 어지간히 했다 싶으면 '이제 불 끈다~'며 불 끄고 눈 감는데 '야, 그런데 말이야, 너 이건 어떻게 생각하니?'로 또 몇십 분 더 이야기가 이어진다.
희한하게 우리의 대화 주제는 범 우주적이다.
서로 하품을 해가며 진짜 자자.. 고 결의에 찬 굿나잇 인사를 하자마자 혜숙이는 콧바람을 쌔쌔 거리며 잠에 빠졌다.
이 지지배, 오늘 고생이 많긴 많았네..
숙면을 해서인지 일어나니 몸이 개운하다.
우리는 오늘 10시 버스를 타고 유후인에 간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유후인에서 온천하며 푹 쉬는 것인데, 여행에서 푹 쉰다는 건 내 경험으로 보건대, 몸을 극도로 고달프게 해서 복잡한 영혼을 여행 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 여행하는 시간만이라도 이 생각 저 생각 안 나게 말이다.
유후인행 고속버스는 하카타 역 근처 니시테츠 버스 터미널에서 타면 된다.
혜숙이가 유후인 버스 예약을 미리 해 왔다.
우리는 어젯밤 숙소 옆에 있는 세븐 일레븐에서 산 간단한 아침을 먹고 늦지 않게 터미널로 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시간에 버스 타고 유후인에 잘 도착했다.
혜숙이가 일본어를 잘하니 망정이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 시간에 유후인 못 갔다..'에 우리의 사연을 숨겨 놓겠다. 흐흐.
내게 유후인은 세 번째 여행이지만, 혜숙이는 이 곳 여행이 처음이다.
작은 온천 마을 유후인은 도보로 다니기 참 좋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을이다.
세 번이나 왔어도 처음 온 사람과 별 다를 것이 없다.
기억력이 모자라서 그런지 다 새롭다.
그러다 아는 길을 만나면 소스라치게 반갑고 그렇다.
유후인 숙소는 혜숙이가 예약한 료칸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일본의 연휴가 끝난 시점이어서 그런지 료칸 가격치곤 무척 저렴하다.
료칸의 시스템도 마음에 쏙 든다.
본동의 로비에선 간단한 음료가 밤늦게까지 제공되고 어메니티도 호텔 못지않게 다 구비되어 있다.
독립 객실에 마당도 훌륭하다.
혜숙이와 나는 호들갑을 떨며 료칸에 한껏 만족해하다 마을 탐방에 나선다.
아아악.. 더브라!
그 브라가 아니니 오해들 마시길 바란다.
규슈 지역은 부산보다 훨씬 더 덥다.
다행인 것은 긴린코 호수까지 걸어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와 카페들이 즐비해서 쉬엄쉬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쁜 가게들이 많아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구경도 하고, 원피스도 사며 여행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다. 우리는 기분 좋게 바이올렛색, 초록색의 새 원피스를 입고 돌아다녔다.
친구와의 여행은 이래서 재미있다.
순간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에 공감하고, 같이 감탄하는 감정의 짝짜꿍은 송사마와의 여행에선 없는 것이니 말이다.
유후인은 닭요리가 특히 맛있다.
닭들이 살아생전 별 스트레스가 없었나 보다.
생존 기간 동안의 존엄은 동물에게도 중요하다.
물론 사람의 먹잇감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지만, 죽는 순간까지는 스트레스 없이 닭으로 파닭 거리며 살다 치킨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해서 인지 우리가 들어간 유후인 가정식 레스토랑에서 먹은 가라아게 정식은 정말 맛있었다.
닭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에도, 미식가인 혜숙이에게도 괜찮은 맛이었다.
걷다 보니 금상 고로케 본점과 플로럴 빌리지, 긴린코 호수로 가는 길과 골목들이 다 생각났다.
금상 고로케 본점으로 먼저 갔지만 너무 더워 고로케 대신 망고 주스를 사 먹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플로럴 빌리지가 나온다.
플로럴 빌리지는 아기자기 예쁜 곳이지만, 혜숙이는 일본스러운 인위적인 느낌이 약간 거슬린다고 한다.
대개의 일본적인 것들은 좀 인위적인 느낌이 들긴 한다. 일단 만들어 놓은 다음 스토리텔링이 덧입혀진 느낌이라고 할까.
흰모래 자작하게 깔아 놓은 곳에 나선형 곡선을 그리고 거기에 돌 하나 얹어 놓곤 곡선은 파도요, 돌멩이는 섬이다..라는 일명 젠(zen) 스타일 정원은 인위적인 동시에 관념적인 작업물이다.
억지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이런 관념적이며 인위적인 것이 그저 일본스러운 것이려니 한다.
무튼 플로럴 빌리지는 어린 자녀가 있다면 사진 찍기는 좋은 곳이다.
우리는 긴린코 호수까지 둘러보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머무는 료칸의 이름은 람푸노야도(Lamp no Yado)이다.
1박에 약 12만 원 정도인데 독채 객실과 아름다운 정원, 온천이 있는 현대식 료칸이다.
이 정도 컨디션에 이만한 가격은 정말 가성비 최고의 숙소라고 할 수 있다.
온천은 정원에 두 개, 본채에 하나가 있는데 개별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 중인지 아닌지 팻말을 잘 보고 들어가야 한다.
여자 두 명이 사용하기에 맞춤 사이즈의 온천이다.
완전한 노천은 아니지만,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과 창문 크기만큼의 하늘을 맞이할 수 있다.
혜숙이는 너무 좋다며 연신 감탄 중이다.
회사의 대표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 늘 고민하고 도전하며 성장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나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을 이 친구는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짧은 여행에서나마 그녀의 무거운 짐들이 내려놓아 지길 바랄 뿐이다.
유후인이 온천 마을로 유명한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여기 온천물이 매우 좋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고 나오니 얼굴에서 광채가 반짝인다.
삼 대 구 년 만에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새겨 두어야 하기에 우리는 셀카와 동영상을 마구 찍어 두었다.
그렇게 웃고 또 웃으면서 유후인 온천의 밤을 만끽했다.
달은 또 어찌나 밝던지, 별들은 또 어찌나 많던지..
침대에 누워 각자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사각거리는 시트 속에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혜숙이는 새벽 온천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우리의 다음 여행지도 역시나 작은 온천 마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까지 각자의 길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 나카스의 야타이
-유후인 풍경
-료칸 람푸노야도(Lamp no Yado)
-아침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