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3-2
그렇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솔로몬은 알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심지어 신의 지혜를 가진 이였기에 죽음의 리듬을 감각하고 있었다.
라지엘의 말대로 자신이 유한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을 알기에 죽음이 가까워진 지금, 세상에 남겨야 할 이야기를 모두 기록해 놓아야 했는데 그게 안 되고 있다.
불이 꺼진 왕의 서재.
책들과 무기들과, 이름 없는 파편들이 섞여 있는 방 안에서 그가 말했다.
“내가 한쪽에만 치우쳐있어서 다른 한쪽을 보내주신거야, 신이.
균형을 위해.
신의 지혜는 조화와 균형이 핵심이거든.”
“저기 그니까..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한쪽에만 치우쳐 있었다니요?”
“나는 한때 우도의 현현만을 구했다.
선하다고 느껴지는 것만을 찾았고 그것을 얻으려 했다.
질서, 계율, 온전함, 배려, 신실함, 진정함, 특별하고 고귀한 것, 빛, 아름다움, 따뜻함, 만족, 용기, 맑음,
겸손함, 비전, 강함, 승리, 근면함, 자비로움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신이 주신 지혜의 그릇을 받은 자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말인데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말이 아니라 문장으로 때려 붓는 폭우 같았다.
“그런데— 시바의 여왕이 그걸 무너뜨렸다.”
“어떻게요?”
“그녀는 나의 지식과 지혜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도 보통 사람은 아닌게지.
그런 그녀가 내게 지식이 편향되어 있다고 하더군.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내 것보다 많다는 걸로 들렸어.
난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그걸 단박에 알아챘어.
그런 그녀가 내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내 안의 완벽한 도형이 미세하게 흔들렸지.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지금 알고 있는 것의 반대의 것도 취해 보라고 말했어.
그녀의 말은 그동안의 나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그것이 뭔지.”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늙은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글쎄요... 나라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솔로몬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절대 아니기에,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 예정이기에 영원히 앞으로도 시바의 여왕 같은 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나도 기본적으로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아마도 할 수만 있다면 알려고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종의 “금기”이지 않은가?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라면 분명히 나도 해보기는 했을 것 같다.
“그렇군.”
“네?”
“너의 생각을 알았다는 것이다.”
“네에.....”
그렇겠지 뭐. 생각을 읽으시겠지...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어쩌면 내가 가진 지혜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죽을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 시간에 얹혀져서 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내가 가진 것들을 뿌리며 살기로 마음 먹었다.
알고 있는 것들로 부를 얻고 명예를 얻고 그것으로 성전을 지었다.
사람들은 나를 칭송했지. 적절히 백성들을 위해 지혜나 지식을 쓰면 또 나를 찬양했다.
내가 가진 것의 손톱만큼의 것만 내놓아도 나는 받들어지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알릴 필요도 없었어.
신이 내게 주신 소명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였다.
마음에는 무너진 믿음과 새로이 생겨난 의심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단단한 돌 위에 비가 내리듯 조용한 절망이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라지엘을 보지 않은 것이었다.
라지엘은 내게 언제나 길을 안내해줬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라지엘이 안내하는 길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라지엘이 원하는 길인데 내가 그냥 끌려가고 있달까?
라지엘이 천사이기는 하나, 신의 수족이기도 하나, 내게는 그저 안내자이자 조언자일 뿐인데,
나 역시 그 즈음에는 라지엘 만큼의 지혜가 있는 것도 같은데,
그가 가자고 하는 길이 맘에 안 들어도 맘에 안든다 할 수 없는 것이 싫었다.
그가 내게 오지 않는 날은 내가 첫날밤을 보내는 날이었다.
그래서 계속 결혼을 한 것이고.”
뭐라고라? 주변국가나 민족과의 협력, 화해.. 이런거 아니고? 그냥 단순히 라지엘 안보려고?
“말이 돼요????? 완전 속았네!”
“그땐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지.
시바의 여왕을 만나기 전에는 라지엘을 만나지 않을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 줄 알았지.”
“그녀를 만나고 나서 달라졌어요?”
“달라졌지.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 반대의 것, 좌도를 알게 됐어.
혼돈과 파괴, 어두움과 죽음, 무절제와 나태, 속임수와 교만, 공포와 텅 빈 차가움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안에는 그림자와 단절도 있었지.
그 전에는 열림의 문만 알았지 단절의 문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라지엘을 단절하는 주문을 걸었어. 네가 이 곳에 들어올 때 본 것처럼 말이야.”
하아...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구나.
“근데! 저는 이쯤에서 궁금한게요,
어떻게 신의 지혜를 가진 분이 혼돈과 파괴, 어두움, 죽음... 이런 걸 모를수 있어요?
그건 사람이라면 다 아는 거잖아요?”
“내 수준에서 [안다]는 것은 말이다,
그 관념적인 단어를 말로만,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결국 그것을 체현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면 정신병자가 되거나 몸을 심하게 다치거나 곧 죽는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익히지 않아.
너는 혼돈이나 파괴를 몸으로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느냐?”
“어휴~~ 아뇨!”
말이라고? 큰일날 소리를!
“물론 사람들도 느낀다. 그 모든 것들을.
하지만 나처럼 느끼지는 않지.
나는 우주 태초의 혼돈과 파괴와 어두움을 직면하고 느끼고 체현해야 하니까.
왜냐면 내가 느낀 우도의 면면들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반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만큼 나가야 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 때 시바의 여왕이 말하길
[그럼 이제 세상의 모든 악마들을 잡아 가두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 될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고통들이 그 악마들 소행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씩 다 만나다 보니 그들이 악마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니 그니까요. 그걸 벌써 몇 번째 말하시냐고요?
천사에게도 악이 있고 악마에게도 선이 있다.. 이걸 계속 말씀하시면서,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서 죄책감이 느껴져요? 도무지 저는 이해가...”
“그들을 봉인하면서, 그것을 기록하면서 끊임없이 자문하게 됐다.
과연 내가 온전히 선한 존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이 죄책감이 되었다.”
나는 그의 숨소리가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들었다.
마치 숨이 아니라 생각이 지나가는 소리 같았다.
“그 죄책감이.. 나를 무너뜨렸다.
나의 글들이 사라졌고, 나의 말이 바래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죄책감은 잘못된 것인가?
그것이 나를 파괴한 것이, 내 탓인가?”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그의 질문이 아니라 나의 질문이기도 했기에.
“음... 죄책감이 잘못된 게 아니라,
죄책감에 사로잡힌 게.. 그게 더 위험한 것 아닐까요?
악마도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람서요?
악마도 자신의 어떤 욕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악마가 된 것이겠죠.
당신이 지식에, 지혜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듯이 말입니다.”
그의 눈빛에서 뭔가 정리가 되는 듯한 움직임이, 아니 그런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믿음과 혐오, 절망과 사랑이 뒤섞여 하나가 되는 소리였다.
“그렇지! 너는 정말 사제구나!”
이건 칭찬이 맞겠지?
하고 우쭐대고 있는데
솔로몬이 거의 날아갈듯한 포즈를 취하며 온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슨 방언 터진 사람처럼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악마는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지.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일 뿐이었어.
선함조차, 욕망이 되면 악이 될 수 있고,
죄책감조차, 신성한 것으로 가장된 악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나의 죄책감은 무엇을 갉아먹고 있는 것일까?
내가 가진 이 죄책감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러다가 그가 멈춰서더니 가만히 밤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었다. 이제 이 공간에는 그의 숨소리만 들렸다.
쏟아지는 별빛을 숨결로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별빛을 받으며 서있던 솔로몬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네? 제가 뭘 했나요?”
“뭘 했지. 나의 죄책감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됐다.”
“내가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어디서 왔는데요, 그 죄책감?”
솔로몬은 두루마리가 마구 펼쳐져있는 그 탁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등에 불을 붙였다.
방안이 환해졌다.
“내가 선하다는 자부심, 내가 온전하다는 자만. 거기서 죄책감이 온 것이다.
내가 신의 지혜를 선물로 받았으나 나는 인간이다.
그것을 간과했다. 신의 지혜를 받았다고 내가 신이 되지는 못하는 것인데...
나는 저 악마들만큼 악할 수 있고 시바 여왕의 속삭임에 행동할 만큼 온전하지 않은 자다.”
솔로몬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붓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솔로몬은 붓을 들고만 있을 뿐인데 두루마리의 글씨는 마구 마구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마치 시간과 공간 너머에서 내려오는 말을 그대로 옮겨적는 것 같은, 그렇게 일필휘지로 쫙쫙 써지는 모양이었다. 았다. 붓은 정확하고도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나는 그들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자만과 교만으로, 또 죄책감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았기에, 그들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지.”
한 자 한 자, 종이 위에 새겨지는 글자들은 72위의 이름과, 그들의 진실과, 그가 오해했던 것들에 대한 속죄처럼 보였다.
와중에 나는 글쓰는 속도가 너무 경이로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거요, 나도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
그냥 이렇게... 막 떠오르듯이 쓰는 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는 붓을 멈추지 않은 채,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좋다.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아는 모든 마법을 기록으로 남겨놓겠다. 너를 위해서.”
“진짜요?”
“하지만—
이걸 하려면, 너도 나처럼 이 고통과 고독과, 아픔과 괴로움을 다 겪어야만 한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아우~~ 됐어요. 그냥 며칠 밤새우는 게 낫겠어요. 잠 덜 자고, 커피 좀 마시고…”
그는 그제야 붓을 내려놓고 말했다.
“잘 생각했다. 아마도, 어쩌면, 그렇게 며칠 밤새고 그러다가,
엉겁결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그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엔 묘하게 두려운 예언 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두루마리들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72위의 악마들은 늘 인간에게 다가온다.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이걸 너에게 줄게, 그럼 넌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속삭이지.
그리고 인간이 그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존재는 악마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이, 그들을 악마로 만들고, 때로는 천사로 만들기도 하는거야.”
나는 숨을 삼켰다.
내가 평소에 흥미롭다고 느끼던 이야기들과는 달랐지만 이건 철학이었고, 선언이었고, 유언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인간이 그 능력을 욕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봉인했다고 해서 저들이 끝까지 봉인돼 있지 않을 것이다. 너도 알지 않느냐?”
“네. 전승에 의하면 누군가 그 봉인을 풀었다고 했어요.”
“그래. 누가 하게 될지도 난 알지.
하지만 지금 나는 저들을 봉인한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나 자신이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저들은, 구속 받았지만 또한 일시적인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빛이 그의 입을 통해 뱉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빛의 문장이 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너무나 경이롭고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의 형상에서 뿜어내는 빛과 공간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공기가 나를 압도했다.
어쩌면 이것이 선과 악의 공존,
그러니까 너무나도 멋지고 아름답기 때문에 느껴지는 두려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암튼 싫지 않은데 싫고 좋은건 알겠는데 그래도 무서운 뭐 그런 느낌이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그 느낌에 압사당할 것 같다? 그게 맞겠다.
말을 하고 싶었다.
떠나고 싶다고.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제 가야지? 미리암 사제로서 할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그가 현실적으로 말을 꺼내주는 바람에 나도 말이 튀어나왔다.
“네, 가야죠. 근데...그 전에... 제 딸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는 미소 지었다.
“자네 속으로 낳은 딸도 아닌데 참으로 애틋하구나!?”
“앞으로도 평생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은 없을테지만 키운 정 무시 못하죠.
꿈에서 키웠어도 제가 10년을 키웠는데요.”
솔로몬은 주먹 쥔 손을 허공을 뻗더니 동그라미를 그렸다.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솔로몬의의 손가락에는 솔로몬 인장이 새겨진 반지가 있었는데 어쩌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솔로몬을 따라한 것임에 틀림없을거다. 솔로몬이 하던 마법을 닥터 스트레인지가 하는 거라면 현실에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있는걸까? 와 – 진짜, 엄청 신기...하...다! 하는 찰나,
손끝에서 빛으로 된 창 하나가 열렸다.
동그란 창.
둥근 눈.
그 속에 그녀가 있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나를 닮았다.
하지만 내게는 없는 무언가—
더 깊고, 더 단단하고, 더 신성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아이는 네가 사라진 후, 너의 이름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살게 되었다.
마리아. 사람들은 그녀를 ‘솔로몬의 마리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앞으로 쉬쉬하며 전해지는 이름이 될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사제, 솔로몬의 마리아로.”
그는 눈을 감고 덧붙였다.
“솔로몬의 마리아는 사독의 후손 제사장을 도와 토라의 구조를 세우게 될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몇 없을테지만 이제 너는 안다. 솔로몬의 마리아를.”
나는 말없이 내 딸이 보이는 창을 보았다.
그녀는 불꽃처럼 보였고 바람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창이 닫혔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몰랐다.
나는 솔로몬을 향해 몸을 돌려 물었다.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들어올 때는 라지엘을 따라 들어왔는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 발 내디뎌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이제 이곳에서는 사라져야지.
그러나 자네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살아있음을 잊지 말라.
자, 그럼...!
나의 크로노스에서 사라져 그대의 시간으로 가라.”
순간, 눈을 떴다.
햇살.
미역국 냄새다.
엄마는 벌써 장을 다녀오셨다.
프라이팬에는 어릴 때부터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잘 안사줘서 못먹었던 분홍소시지가 계란옷을 입고 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엄마, 잘 잤어?”
나 혼자 몇 천년 전을 다녀온, 거기서 10년이나 있다오니 엄마는 어떻게 지냈는지, 그게 궁금했다.
느낌에 앞으로도 나는 이런 꿈을 자주 꿀 것 같은데 그때마다 엄마가 옆에서 자고 있지는 않겠지?
“그래, 잘 잤다.”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엄마는 잘 잔 것 같지 않았다.
“엄마, 거의 못잤지?”
“아니다. 니가 하도 잘 자길래, 내도 니 잘자는거 보니까 잠이 잘 오드라.”
이건 거짓말 같지 않네?
다행이다. 엄마가 몇 시간은 잘 주무신 것 같아서.
엄마는 내 식탁에 미역국과 하얀 쌀밥, 분홍 소시지와 김치를 차려주셨다. 반찬도 적고 단촐한 밥상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만 있는 밥상이다.
“니 미역국 좋아하잖아? 한솥 끓였다. 질릴때까지 무라.”
“엄마도 미역국 좋아하잖아? 같이 먹자.”
“내하고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뭐? 니 먹는거 보고 갈기다.”
“일단 앉으셔서 식사 하시지요~”
엄마와 마주 보고 앉은 게 언제일까?
엄마와 마주 앉으니 엄마와 단둘이 앉아 뭔가를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나는, 오늘 새롭게 태어났을 수도 있다.
다시 살겠다 결심하고, 다시 엄마와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는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처럼, 내가 다시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는다.
한 술, 두 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미역국만 뜨며 눈물인지 미역국인지 모를 액체를 입으로 넣었다.
그리고 국그릇이 다 비워졌을 때 앉아있는 엄마의 뒤로 가서 엄마를 안고 울었다.
“엄마. 고마워. 나를 낳아줘서...”
어떤 비밀이 내 안에서 꺼내어진 듯한,
그런 아침이었다.
==다음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