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P 인간으로 살아남기 7

일상으로 떠오르기

by Sheisthelady

간호사의 귀띔이 있기는 했으나, 주치의와 상담하면서 눈으로 확인한 결과는 매우 절망적이었다. 지난 수개월 동안의 성실한 노력이 비눗방울처럼 하늘로 날아가버린 느낌이랄까.. 결과와 관계 없이 주치의는 희망의 싹이 보인다고 했다. 얼굴은 웃으면서 마음 속으로는 따져 묻고 싶었다. 왜 부질 없는 희망을 주입 했었냐고.. 돌아오는 길의 석양은 황금 동굴에서 적절히 쏟아져 나오는 빛들이 구름과 하모니를 이루며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정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God RA와 한참 마음 속으로 대화를 나누다 고개를 돌리니 낙엽들이 거의 스러져 벌거벗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태풍상사 강태풍의 아버지 말씀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고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드라마에서도 배울점이 있다.


(11월말에 쓰다가 12월말에 다시 이어 씀)


실로 오랫만에 지팡이 없이 샛강 산책을 했다. 올 봄엔 옥스포드의 푸른 메도우 같던 샛강 정경이 영화 트레인 드림스의 한 장면처럼 산불에 타고 남아 하얀 잿가루를 뒤집어 쓴 마냥 우울한 그레이다. 그저 한순간인 것 같은데 쉬는 동안 세가지의 계절이 지나고 있는게다. 이제 10여일 뒤면 일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나의 뇌는 아직 준비가 덜 된 듯 싶어 HSP 인간은 여전히 망설인다. 그냥 사표를 쓰고 연금 생활자가 될 것인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벌목하러 가야 하나.. 지난 월요일 MRI/MRA 촬영한 결과를 들으면서 나의 해마는 참지 못하고 그만 멈추어선 것 같다. 정서적으로는 우주청에서 발표한 우주지도 안에서 부유하는 것 같고, 감각은 무뎌지고 기억은 얽힌 실타래처럼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다.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겪어라.

아름다움도, 공포도.
다만 계속 걸어가라.
어떤 감정도 마지막 판결은 아니다.


릴케의 싯구처럼, 그리고 트레인 드림스의 그레이니어처럼 .. 겪어야 하는 일들은 담담히 받아 들이고 묵묵히 벌목장으로 가는 것이 옳겠지(아니 옳아야 한다. 잠시나마 연금 생활자가 되었던 선배의 충고다). 문득 경비행기가 타고 싶어진다. 옥스포드 공항에서 친구들이 타자고 할 땐 무서워서 뒤로 주춤거리곤 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에이런의 표현대로 수십가지 아니 수백 수천가지 종류의 구름들 안에서 내가 살아온 세상을 조망하고 싶다. 숲과 나무와 동물들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지구를 멀찌감치서 지켜보다보면, 문득 누워 있던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일상으로 떠오르기


몇 달 동안
나는 기다렸다

수치들이 좋아지고
그래프가 꺾이고
의사의 얼굴에
안심한 미소가 떠오르기를

그러나 종이 위의 숫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어느 날 나는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알았다

더는 기적을 협상할 수 없다는 것
이 몸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때서야 바닥이 보였다

끝이 아니라 바닥

떨어질 곳이 더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숨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서 나는
병원 문을 나와
장을 보고
설거지를 하고
내일 할 일을 메모한다

낫지 못한 몸으로도
계속되는 하루를 조용히 허락하는 일

그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또 다른 삶의 형식임을
아주 천천히 받아들이면서..


#HSP #일상 #해마 #릴케 #트레인드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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