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옛날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나이 쉰 쯤 되고 보니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서였다.
그 얘길 하려면 대략적인 나의 히스토리 소개가 필요한 듯하여 시작한건데... 만연체로 길어져버렸네..^^
앞 이야기에서 시작했듯이
남편은 소위 명문대 경제학 석사까지,
나는 좋은 대학은 아니어도 어쨌든 4년제 영어전공.
배울만큼 배운 우리의 인생이 마냥 평탄하게 이어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 원인은
기회를 못 잡아서 일수도 있고
우리가 그만큼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다만 거기까지가 우리의 받을 분량이었을 수도 있고...
환경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사회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나 내 남편이 좀 게으르고 열정이 부족하고 활력도 좀 부족한 성향이라는 핑계를 대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아무튼...
두 백수가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의 기거 내지 눈칫밥 먹기가 시작됐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됐냐고?
나는 마냥 놀 수가 없어 당시에도 너무나 문이 활짝 열려있던 학습지 교사로 취직을 한다.
남편은 한국은행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토익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하고.
그렇게 두 부부가 고생 고생하더니 남편은 결국 꿈의 직장 한국은행에 취직하고
부인은 소원대로 전업주부로 알콩달콩 예쁜 가정을 꾸려갔다..
.
.
.
뭐 이렇게 결론이 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공부를 해도 토익 성적은 생각만큼 오르지 않았고
한국은행에서는 신입직원을 뽑을지 안 뽑을지 기약도 없었다.
뽑는다고 한들 그 어려운 직장에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고.
하여
남편은 공부하는 틈틈이 대학원 교수님이 알음알음 소개해주는 직장에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결과는 늘 꽝. 최종까지 올라갔다가도 꽝.
내가 초보 학습지 교사로 벌어오는 몇 푼 안 되는 돈은 시어머니께 두 사람분 생활비로 내놓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시어머니는 속이 시끄러울 때마다 우리 두 사람을 불러 앉혀놓고 잔소리를 하셨다.
왜 아니었을까?
그 당시는 기다려주지 않는,
닦달만 하는 시어머니가 야속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였다면 낙심하지 않게 격려하며 기다려줬을 거다...라고 당해보지 않은 일을 상상만 해 본다^^)
어머니도 을매나 속이 터졌을까?
지금에야 느끼는 바지만 1주 혹은 2주 만에,
참다 참다 ㅡ친척들의 "아니 걔네는 아직 둘 다 취직도 안 하고 그러고 있대요?"라는 식의 속 긁는 소리를 들으신 후 ㅡ
"너희들 이리 와 봐라!!!" 하며 부르신 것도 어머니 딴엔 많이 인내하신 후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멀쩡히 대학원까지 졸업시켜 놓은 아들이 백수로 시간 보내고 있는 것도 속 터지는데
며느리라고 데려온 애는 사돈집이 잘 살기를 하나 ㅡ대학원 다닐 때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알부자 집 딸을 친척 어른이 소개해 준 적이 있는데 한번 만나고 오더니 삘이 안 온대나 어쩐대나 하며 퇴짜를 놓으신 이가 나의 남편님 되시겠다. 그의 소망인 박사까지 공부도 시켜줄 수 있다고 했었는데...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삘(feel)이 도대체 뭐였을까? ...하하하;;;;) 성격이 싹싹하니 애교가 있길 하나 돈 잘 버는 번듯한 직장이 있길 하나..,
내가 막 능력도 좋고 영업력도 좋아서 회원들 쭉쭉 늘려가고 월급도 빠방 하게 벌어왔으면 어머니가 덜 재촉하셨을까.
그런데 나는 그런 능력이 없는데..
성격도 너무나 내성적이라 영업도 잘 못하는데..
휴회가 나도 설득은커녕 네.. 그러시죠.. 밖에 못하는데..
우리 두 사람은 그 와중에도 너무 행복하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는데
그 외 환경들(집, 직장 모두)은 나를 찌르는 송곳, 내지는 오도 가도 못하는 감옥.. 그런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
9월이 되고, 1998년 그 해 하반기에는 더구나 취업시장의 문이 꽁꽁 닫히는 것으로 예상이 되자 초조함을 느낀 남편이 내가 하고 있는 학습지 교사를 자기도 해볼까 한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했다.
한번 시작하면 맡은 아이들 어느 정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하는데 중간에 다른 일자리가 나면 그땐 어떡하냐고.
금세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라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도 있다고.
무엇보다 딱 은행원이나 연구원 같은 직업에 어울리게 생긴 샤프한 울 신랑이 무거운 교재 가방 들고 이집저집 다니는 거 상상만 해도 싫었다.
내 말에 남편은 이리저리 궁리해보더니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한다.
결혼까지 한 나름 가장인데 5개월 가까이 공부한답시고 집에만 붙어있는 게 영 민망하고 불안했었나 보다.
시부모님께 상의를 하니
당연히
석사까지 한 애가 무슨 학습지 교사냐고 말리실 줄 알았는데 두분도 엔간히 속이 타고 있으셨는지 그거라도 해보라고 하시는 거다.
꽉 막힌 취업문에 더 냅뒀다가는 1년, 2년 백수로 있을까 봐 걱정이 되셨었겠지.
그리하여... 나와 같은 학습지 교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난 그땐 몰랐지..
내 남편이 그렇게 한우물만 파는 성격인지..
그때 더 뜯어말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은 좀 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