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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Dec 16. 2020

쉰이 되어보니

나의 짧은 히스토리 18

도봉구 한 초등학교 앞에 학원을 차렸다.

무려 4명의 동업으로.

모두  한 가정의 가장들인데 다들 돈이 없으니 소액으로 동일하게 출자금을 내어 학원을 시작한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다 IMF로 퇴직하고 학습지 교사하던 분.

중앙대  졸업 후 취직 자리가 없어 학습지 교사로 취직했던 분.

교회 전도사를 하다 사역을 내려놓고 생업 전선에  뛰어드신 분.

그리고 나의 남편.


학원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 커버하는 전천후 학원이었지만 누구 하나 특출나게 잘 가르치는 교사는 없었다.

그저 너는 이과를 졸업했으니 수학을 가르치고,

너는 문과를 졸업했으니 영어를 가르치고... 뭐 이런 식이었다.

나의 남편은 문과 졸업생이었어서 자연스레 영어과목을 맡게 되었다.


첫 월급이 얼마였더라?

학원 수입중 필요경비 빼고 나머지 돈을 똑같이 나눠 월급으로 받았다.

당연히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저 학원이 어서어서 성장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즈음 나는 친정 고모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파트타임 사무보조원으로 일하며 한달에 50만원 쯤 벌고 있었다.

그걸 보탠들 새발의 피.

언발에 오줌 누기.


다행히 학원은 조금씩 성장했고,

처음의 커다란 공간을 책꽂이로 나눠 영어, 수학을 가르치던 원룸같은 공간에서 벗어나 교실이 칸칸이 몇개로 나눠져있는 조금 큰 학원으로 이전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월급이 막 막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봐야 동네 조그만 보습학원일 뿐이었다.


그 사이 나는 큰딸과 5년 터울로 둘째 딸을 낳고,

얼른 나와 어린이집 사무 좀 봐달라는 고모의  청을 거절 못하고 채 두달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려다 사무실 한켠에 뉘어 놓고 일을 했다.

둘째가 돌이 지날 무렵에는 그즈음 막 붐이 일어나던 사이버 대학 아동보육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보육교사 자격증도 땄다.

드디어 보조로서 알바생처럼 받던 월급에서 제대로 호봉을 쳐서 월급을 받을수 있는 자격이 된것이다.

그 때 내 나이 서른 여섯 쯤.

남편은 서른 일곱.


그렇게 학원은 더디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나는 정교사로 자리잡고...

그렇게 그렇게 소박해도 약간은 안정적이게

그렇게 살아가면 될거라고 생각했던건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야심찬 소망도,

하다못해 남편을  다그쳐 더 큰 꿈을 꿔보라고 바가지 긁을 베짱조차 없이

그저 하루하루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던

내 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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