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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냥 수술하겠습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의 선물

by 미리나


원장님, 저 수술하겠습니다.




나는 의사를 믿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우산을 챙기는 사람처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마음의 소나기를 막기 위해 수술을 선택했다.



그 결정은 신뢰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그늘을 미리 대비하려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대비의 본능이었다.


나에게는 용기이자 동시에 마음속 깊은 두려움을 다독이려는 애틋한 노력이었다.



수술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기 싫고 두려운 마음이 교차했지만 고통을 설명하며 원장님을 설득했던 건, 절대적인 필요보다도 아주 적은 가능성에 기대어 무너지는 나를 붙잡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경험이 될 거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써 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른 나뭇가지를 태우듯 가차 없이 나를 갉아먹었다.


통증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프다는 생각보다 그저 ‘이런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말라가는 꽃처럼, 고개를 떨구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 돌아봐도 그 시절의 나는 위태로웠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기대조차 흐릿해졌고 애써 견디던 마음은 무뎌졌다.






포기라는 감정은 매일 조금씩 색을 바꾸며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건 단번에 닥치는 절망이 아니라 단풍잎처럼 물들어가는 체념이었다.


불안하지만 버텨보려 했고 아프지만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 했다.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체념은 돌고 돌아 나를 감쌌다.




그리고 원장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알아주셨던 것 같다.


내가 아픔을 털어놓고 두려움 속에서도 선택을 고민하는 모습을 의사는 아마 여러 겹의 마음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단순하게 ‘치료받고 싶은 환자’ 보다는 두려움과 체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나의 말이 논리보다는 감정에 기반해 있음을 아셨을 거고 그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다.




굳이 설득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주던 이해와 공감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의사는 늘 "고쳐주겠다"는 희망을 주려 하지만 현실의 한계도 잘 알 텐데 특히!! 나처럼 이미 많은 것을 겪고 마음이 지친 환자 앞에서는 어설픈 위로나 확신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말조차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수술이라는 결정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의사는 그것을 막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함께 걸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곁에 있어주었다.




사실 나는 단순히 치료받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선택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이었다.




나를 '환자'라는 이름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한 사람의 고통과 삶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많은 교감이 오갔다.











'배움이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그분의 말에 나는 말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 말속에 담긴 진심과 겸허함이 나를 작아지게 했다.


그리고 한없이 죄송했다.


내가 내민 고통이 너무 크고 무거웠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먹먹해졌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분 역시, 환자의 고통을 완전히 덜어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지막 기대를 함부로 꺾지 않으려는 책임감으로 조심스럽고 그리고 성실한 태도로 나를 마주해 주셨다.


나는 그분을 통해 ‘의사’라는 존재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지를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이해하게 되었다.




몇몇 의사들은 시술이나 수술을 쉽게 권유했고 나는 그들의 눈에 ‘한 사람’이 아닌 ‘하나의 증상’으로만 비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저 아프다고 말했을 뿐인데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 건네지는 진단과 권유에 마음이 깊이 다쳤다.


그럴수록, 이분을 통해 받았던 태도와 시선이 더 깊이 다가왔다.



환자의 고통을 쉽게 단정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삶의 무게를 함께 바라봐 준 의사.



그 따뜻한 시선 하나가 얼마나 큰 위로와 신뢰로 다가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감정의 본질은 선택일까, 본능일까?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당해야 할 감정...

그 모든 게 사실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줬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화가 나야 하고, 슬퍼야 하고, 상처받아야 한다(?)




그건 정말로 맞거나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아니면 그렇게 반응해야 한다고 배워온 습관일까.


감정은 본능이면서도 선택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됐다.


그 말에 무너질지, 흘려보낼지, 되묻고 바라볼지는 내 몫이었다.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까 ‘나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나쁘다고 규정한 내 해석이 있을 뿐이구나! 하고 느끼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무시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그 상처에 휘둘리느냐, 그 상처를 돌보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감정은 내 것일까, 배운 것일까.




가끔은 내 감정이 내 것 같으면서도 남이 쥐고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타인의 말보다 그 말을 내 안에서 해석하고 반응한 나의 태도가 훨씬 더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이 휘몰아칠 때마다 “이건 진짜 내 감정인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느껴야만 한다고 배워온 것인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묻다 보면 감정의 늪에서 천천히 건져 올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성숙"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이 아닐까...


회복을 하면서는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렇게 감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치료라는 것도 결국 '이해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처음엔 치료란 망가진 나를 수리하는 일인 줄 알았다.

문제투성이인 나, 어딘가 결핍된 나, 흐트러진 나를 다시 ‘정상’에 돌려놓는 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되었다.

치료는 나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토록 반응했고 왜 그렇게 아팠는지를 이해하는 여정이라는 걸.




치료란, 내 안의 오래된 상처를 들여다보고 누군가에게조차 꺼내지 못했던 감정을 스스로 껴안아주는 일이다.


억눌렀던 기억들이 몸의 증상으로 나타났고 그 증상들은 “나 여기 있어”라며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책망하는 일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에게 "충분히 잘 버텼다"라고 말해주는 일이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거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마음에 작은 숨통이 트였다.





몸과 마음의 치유>> 3개월 동안의 변화


2023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3개월은 나에게 신체적, 정서적으로 완전히 다른 시기였다.


무엇보다 그 통증이 마음을 감추고 그 마음이 다시 내 몸을 억제하는 악순환 속에 나는 죽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나름의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버티고 애썼다.

감정을 억누르고 내면을 치유하기 위한 여정은 천천히 시작되었다.


고관절 및, 목, 등통증 여러 만성통증도 아프고 고되었지만 내가 실천한 것은 유혹은 몇 차례 있었으나 약물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신과 약을 단 1주일만 복용한 뒤 나는 약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물론, 약이 꼭 필요하고 약에 의지해야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그 트라우마를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이것이 나의 치유의 방식이며 하나의 예시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전문가의 지지>>치료의 진정한 의미


원장님은 내게는 전문가 이상이었다.

그분은 내게 치유의 진짜 의미를 알려주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치료를 '결함을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망가진 나를 '정상'의 위치로 되돌려놓는 작업이라고 믿었다.


무언가가 고쳐져야 내가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치료의 중간 즈음, 아니 사실은 어느 날 문득...
“나는 왜 이렇게까지 아플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다가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응답에 도달했을 때 정상이라는 말은 그렇게 무력해졌다.

'정상'은 실체가 없었다.



그건 결국, 사회가 정한 평균값이거나 어딘가에선 필요했을 의료 시스템의 편의적 명칭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정의 안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아파졌다.





어딘가 망가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너무 쉽게 ‘고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이 마음이라는 것은 기계나 물건이 아니기에 고장 났다고 해서 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배운 치료는 “왜 이렇게까지 힘들었는지를 스스로에게 설명해 주는 일”에서 시작됐다.


진단보다 먼저 필요한 건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무엇에 다쳤는지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이었다.”

이 말을 내게 스스로 해주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놀랍도록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 느리고도 조심스러운 여정이 나를 치료로 이끈 셈이다.



원장님은 내 트라우마를 ‘잊어야 할 과거’로 묻지 않으셨다.


‘스트레스’의 ㅅ자도, ‘트라우마’의 ㅌ자도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대신, 내 안에 고약하게 자리 잡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억누르기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셨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치유란 고통을 억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품는 일이라는 것을.





약물, 전문가의 지지, 그 모든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치료는 그 너머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 결심.”


그 작은 다짐 하나가 내 몸과 마음을 회복으로 이끄는 진짜 첫걸음이었다.


지금까지 내 몸에서 나타났던 만성 통증은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몸의 언어로 드러난 결과였다.





마음의 상처는 내 몸을 괴롭히듯 말을 걸었고 나는 그 일로부터 억누르며 살아왔다.


이제는 정말 감히 안다.


상처와 통증을 미워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삶에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이해해야지만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고통을 먼저 맞는 사람."


나는 고통을 겪어도 괜찮다.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뱉었을 때 이상하게도 고통은 한 발짝 물러서는 듯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 안에 있던 두려움을 넘어서는 더 깊고 단단한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은 에너지든, 부정적인 에너지든 결국은 몸을 지나간다. 나는 그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겪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오래 머물면 몸이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어깨는 무거워졌고, 속은 더부룩해졌으며, 숨조차 자꾸만 가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항하는 데 쓰는 이 에너지를 그냥 아프기로 써보면 어떨까?’ 그날부터 나는 도망치지 않고 고통과 마주 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연습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장, 인스타그램의 짧은 글들, 그리고 지금의 이 긴 고백까지.

처음엔 고통을 견디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글을 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글이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내면의 구조물(?)이 되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고통이 내 중심이 아니었다.


나는 고통보다 더 큰 어떤 것을 표현하고 살아내려는 힘에 집중하고 있었다.





“행복하고 싶으면 고통을 저항하지 말고 먼저 맞으세요.”


이 문장이 거칠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심이다.


고통을 밀어내려는 데 쓰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컸다.
그 에너지를 계속 쓰다 보면 진짜 내가 감당할 거대한 고통이 왔을 때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쓸모없는 방어에 힘을 다 써버린 장수가 중요한 전투에서 무너지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고통이 왔을 때 되도록 피하지 않는다. 먼저 맞는 걸 선택한다.





그래야 그 이후의 시간을 조금 더 가볍게 살아낼 수 있으니까. 이 방법은 1년 가까이... 꽤 오래 걸렸다.


이건 ‘강해지기 위한 수련’이 아니다.


내 삶을 버티기 위한 작고 지속적인 태도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오지 않는다고 이제부터 믿는다.


믿음이라는 건 근거가 없을 때 더 강력해지는 법이니까...



오늘도 그렇게 말해본다.


나는 고통을 겪어도 괜찮다.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문은 나에게는 생각보다 잘 듣는다.






2024년 1월,

과거의 치료 여정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더 깊고 더 예리한 감정의 파동들에 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은 몸에 각인된 통증이었지만 이제부터 나를 시험할 것은 통증이 불러일으킬 감정의 기복과 그로 인한 또 다른 흔들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감정들과 마주하고 또 한 번 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정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 길이 고통스럽고 때때로 나를 다시 무너뜨릴지라도 나는 다시 한번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무너져도, 자신이 없어도 나는 늘 내게 이렇게 주문을 걸어왔다.


“괜찮아, 치유는 끝이 없으니까.”


이제 나는 몸과 마음이 보내는 모든 것들에 더 깊이 귀 기울이며 또 다른 차원의 치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바꾸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새로운 힘이다.






못하는 '나'가 요즘 참 좋다.

요즘 문득 자주 생각하게 된다.


‘못하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는 걸.


예전엔 무언가를 못하면 혼날까 봐,
실망스러운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잘해야만 가치가 있다’는 굳은 믿음 아래 늘 완벽함을 강요하며 살았다.


그런데 막상 못해보니 그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성장’이라는 것.





못하니까 칭찬을 듣게 되고 응원을 받게 되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모든 시작은 아래에서부터였다.


공부도, 치료도, 운동도, 일도, 처음이라는 건 언제나 어색하고 서툴렀다.


모르는 것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조금씩 나를 알아가는 과정.


움직이기 힘들던 몸을 하루에 몇 번씩 일으켜 세우는 일, 회복되지 않은 마음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






몸이 나아졌다 싶으면 다시 아프고 끝난 줄 알았던 고통은 ‘재발’이란 이름으로 다시 찾아왔다.


치유와 반복의 굴레 속에서 나는 수없이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섰다.



이젠 안다.

못하는 나를 탓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용기’라는 걸.


같은 바닥을 딛고 있어도 시기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처음엔 막막함이 나를 지배했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나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익숙해지면 조바심이 고개를 든다.


‘왜 아직 이만큼밖에 안 됐지?’ 하는 초조함.

하지만 또 어느 날 문득 확신 없던 마음속에 작은 자신감이 피어난다.


“아, 이게 그 느낌이구나.”
“이만큼 와보니 이런 감정이 드는구나.”


그렇게 경험을 통해 쌓인 감정들은 남이 몰라줘도 나만은 아는 성장이 된다.
그 막막함도, 조바심도, 작지만 분명한 행복도 겪어냈기에 진짜 내 것이 된다.


“나는 고통을 경험해도 괜찮아.”
그 마음 하나만 있어도 세상이 훨씬 덜 무섭다.
시작도, 멈춤도 두렵지 않다.


그 모든 과정이 내 삶의 의미이자 가치니까!!




매일 통증에 시달리며 울기만 하던 날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마주 보는 게 너무도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의 나는 그 ‘못하는 나’ 덕분에 참 많은 걸 배웠다.


실패조차 내 편처럼 느껴질 정도로.


못했기에 넘어졌고, 못했기에 멈출 수 있었고, 못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못하는 내가 참 좋다.





‘못함’은 결코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멈춤과 일어섬,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물이다.


못했기에 삶의 아픔을 진짜로 체험했고 그 아픔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선물해 주었다.


못했기에 무리하지 않고 나를 돌볼 수 있었고 멈췄기에 치유가 시작될 수 있었다.


또,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넘어진 그 자리에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못하는 나’는 허용하고, 배우고, 회복하며 사랑받을 수 있는 나이다.


완벽함이 아니라 진짜 삶의 모습을 살아가는 나이기도 하다.




오늘 내가 느끼는 이 감정도, 지금 이 순간의 나도 마음에 든다.


이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나는 살아 있고 언제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누군가가 나를 믿고, 바라봐주고, 기대하고 있다는 건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다는 뜻이다.


그 기대가 부담이 아닌, 신뢰의 무게로 다가올 때 나는 스스로도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고통은 때로 선물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고통은 나를 더 깨어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 오늘의 햇살, 바람의 결까지
모든 감각이 더 또렷하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내가 살아 있다'는 그 말 없는 목소리를 나는 세포 사이사이로 느낄 수 있었다.


고통은 단지 지나가는 불청객이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깨어나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오늘도 말하고 싶다.


지금 아파도 괜찮다고.


지금 흔들려도, 무너져도, 여전히 살아 있는 너는 충분하다고.


그 말 하나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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