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고통을 겪어도 괜찮아
불났는데 소방관은 여기가 아니래요
나는 난소에 물혹이 잘 생기는 편이다. 배란기쯤이면 왼쪽 아랫배가 콕콕 찌르는데 병원에 가보면 어김없이 물혹이 있었다. 늘 다니던 여성의원 의사 선생님은 물혹이 특별한 병변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하셨고 그래서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3개월에 한 번씩 보자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소변이 새기 시작했고 절박뇨 증상까지 더해졌다. 옆구리와 아랫배는 뒤틀리듯 아파왔고 결국 참지 못하고 동네 병원에 갔다. 소변검사 결과 혈뇨가 나왔다.
의사는 말했다.
“비뇨기과나 내과 검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자리가 아닌데요. 거기서 불 안 나는데요.’
몸이 보내는 경고음을 잘못 해석한 내가 소화기를 들고 엉뚱한 방을 뛰어들어간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프고 불이 난 것도 같은데,
'여기가 아니래. 다른 데 가보래.'
내 귀에 이렇게 들렸다.
몸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절박하고, 참기 어렵고, 터질 것 같았고, 나는 겨우겨우 그 말을 들고 또 다른 문을 두드려야 했다.
분명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고 고통은 예고 없이 시작된 전쟁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과거 수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 자리를 초음파로 들여다보던 의사는 이내 말했다.
“자궁에 혹이 보이네요.”
"난소에도 혹이 있고 사실 이건 너무나 흔한 겁니다."
“자궁근종은 수술했는데 또 생긴 걸까요?”
“재발인 것 같아요."
위치는 나쁘지 않아서 당장 수술은 아니어도 됩니다.
신우신염 가능성도 있으니 항생제를 드릴게요.”
약을 먹지 않았다. 가능성이라는 것이 내 고통을 설명하기엔 너무 빈약하고 허약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무언가가 정통으로 부서졌던 날이었다. 야구공이 '퍽' 하고 날아와 겉은 멀쩡했던 몸의 오래된 금을 정확히 때렸다. 바스러지듯 깨진 날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은 또 아팠다
며칠 뒤,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혈뇨도 사라졌고,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생제를 먹지 않았는데도 몸은 나아져 있었다. 당황스럽고 어쩐지 억울했지만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적처럼 나아졌다는 사실조차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잠을 못 잤다. 번개처럼 짜릿한 목과 등 통증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상체는 굳어버렸고 자물쇠처럼 잠겨버린 듯했다.
통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고개를 돌릴 수도, 숙일 수도 없었으며, 작은 움직임조차 어려웠다.
연말인데 우울하기는 했지만, "액땜을 다 때운다"며 내년이 오기 전에 고통을 다 받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목이 고장 나버렸으니 예약한 병원은 뒤로하고 일어나자마자 집 앞 정형외과에 갔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밥을 먹는데 숟가락을 자꾸 놓쳤다. 엑스레이를 본 의사는,
“일자목이 꽤 심하네요. 디스크도 있고요.”
치료 방법도 설명해 줬던 것 같은데 그 말은 눈물로 와르르 지워졌다. 오후엔 원래 다니던 병원에 갔다. 거의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원장님, 고관절은 이제 하나도 안 아픈데 지금은 목이에요. 목이 갑자기 안 움직여요. 고장 났어요!”누가 리모컨으로 ‘움직임 금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정말 굳은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또. 또.
다짐한다고 해서 감정이 말처럼 따라주는 건 아니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해도 생각이 떠오르면 마음이 가라앉고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시작되는 건가요
원장님은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괜찮아요. 지난번처럼 또 좋아지실 거예요.”
"지난번처럼"이란 말이 그날따라 무겁게 들렸다.
그 말은 나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지난번도 진짜 힘들었는데 그걸 또 하라고요?
의사는 어젯밤 잠을 얼마나 잤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몸에 드는 배신감에 안절부절못했다. 애써 치료해 왔던 모든 날들이 무색해졌고 왜 또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두려움이 온몸을 덮었다. 고통이 되풀이되는 것에 대한 무력감은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웠다.
“얼굴이 빨개요. 성탄절 전날 이후로 또 열이 나는 건가요?”
“네, 목이 뻑뻑하더니 지금은 숙이는 것도 안 돼요.”
“젖히는 것도 안 되네요.”
덜컥 겁이 났지만 아예 망가졌다고 여겨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그냥 수술하겠다고 말했다.
“무슨 수술이에요. 망하고 싶어요? 덜컥 수술했다가 망한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요?"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처음이었다. 나에게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신 건.
당장 아픈데 어떻게 참아야 할지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열은 37.9도. 그보다 힘들었던 건 두통과 목 통증이었다.
원장님이 또 물으셨다.
“혹시 열 때문에 내과 가신 적 있나요?”
나는 산부인과랑 정형외과에 다녀온 얘기를 조금 꺼냈다. 검사는 얘기하지 않았다.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문제는 그게 아니었고 당시에는 산부인과 이야기를 굳이 통증 보는 의사 선생님께 꺼내야 하나 잘 모르겠었다.
근데 자꾸 증명해야 했다. 고통을 알아달라는 듯 어떻게든 입증해야 하는 환자였다. 참 서글펐다.
기적처럼 사라졌고 거짓말처럼 돌아왔다
주사실에 들어갔다.
“천장 보고 누워보세요!”
어떻게 누워야 할지 이리저리 옮기다가 겨우 눕게 됐다.
원장님이 목을 5분 정도 교정해 주셨다.
거짓말처럼, 진짜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벼워졌다.
너무 신기해서 오늘은 주사 안 맞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지만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까지 받았다.
그리고 이번엔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완전히.
너무 황당해서 혼란스러웠다.
이게 대체 뭐지.
또 딜레마에 빠졌다.
정말 미친 건 이 통증인지 아니면 나 자신인지...
다음 날.
통증은 다시 돌아왔다.
안간힘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 말했다.
"원장님, 스테로이드요. 그거 빨리 낫는다면서요.
맞고 싶어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이었다.
"효과 빠르대, 바로 낫는다더라."
그 말에 기대를 걸어보았다.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또 죽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그 말이 나를 집어삼킬까 무서워서 말하고 나서 얼른 지워버렸다. 말을 꺼내고 지우고 또 꺼내고 삼키는 사이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의 일기
꼬리뼈, 목, 다 미친놈 같다. 신이 나에게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슬프다. 원장님이 이것저것 물으시는데 숙이는 게 안된다니 젖혀지지도 않는다고 지금은 열이 37.9인데 얼굴이 안 빨갛다고 의아해하셨다.
30분 후 빨개졌다. 진통제, 스테로이드 맞고 싶다고 말씀드림! 고통을 어케 증명하지. 여성병원은 문제없어 다행인가!
증상은 행보칸에 말 안 했다. 꼬리뼈 자지러지게 아프고 등은 괜찮았다. 고관절도 빠이! 엑스레이만으로는 젊은 사람들 디스크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고 2,3,4,5번 디스크가 좋진 않지만 통증이 등까지 내려가진 않는다고 MRI 찍으러 가볍게 다녀오라셨다.
그냥 확인하는 거라고, 주사를 맞는데 서럽고 힘들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 아팠다. 정말.
의사를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오늘은 감정 아니에요. 진짜예요.”
꼬리뼈는 수술하지 않아도 되지만, 계속 불편하면 CT를 찍어보라고 하셨다.
“지금 상태에선 수술은 절대 필요 없어요.
MRI를 찍는 건 혹시나 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겁니다.
가볍게 그냥 한번 다녀온다고 생각하세요.”
수술이 아니라 MRI 확인.
그렇게만 생각하라고 정말 가볍게 다녀오라고 하셨다.
올해 제발 치료 끝내자. 제발, 제발.
(감정에 휩쓸리는 게 여실히 드러나지만 그것도 나였다.)
2023년 12월 30일 토요일
꼬리뼈는 그간 치료 덕인지 아니면 목 통증이 더 강해서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CT는 찍지 않았다. 영상을 설명하던 의사는 화살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는 추간판 탈출증인데, 일자목이라고들 하죠. 좀 심하네요.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자세한 건 정형외과나 재활의학과에서 상담해 보세요.”
주사를 맞고 통증이 사라졌는데도 더 아픈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안도감과 체념까지 동시에 밀려왔다.
‘잘됐다.’
이제 반복하지 말자. 뿌리째 없애버리자. 그때 깨달은 건 나는 늘 의사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아프지 않아도, 의사가 이상이 있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아파지기 시작했다. 내 몸의 고통보다 그 말을 받아들인 내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영상의학과에서 사진 및 영상 촬영에 동의해 주었다.
화면 중앙과 척추뼈의 단면 주변 구조물들이 하트처럼 보여서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봤었다. 고통의 자리가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하트 모양이 마치 내 몸이 나를 위로하려는 흔적 같았다.
"아프지? 그래도 여기 있어."
‘여기가 신경근이 다 나가는 곳인가?'
하트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아주 잠깐, 아프지 않았다.
나는 열일곱에 또래보다 비교적 늦게 초경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배란기와 생리 주기가 다가오면 내 몸은 아우성이었다. 배는 찢어질 듯 아팠고 아래가 빠질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통증은 밤을 지워버렸고 고통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2016년,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도저히 혼자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세상의 모든 색이 빛을 잃고 무의미하게 보이던 날들이 있었다. 의사의 한마디는 내 고통을 가볍게 훑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정신과적 진단 기준에 들어맞진 않네요.”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한다고 여기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내가 겪는 통증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설문지를 작성하고 질문을 받았지만 돌아오는 건 진단이 아니라,
“산부인과에 가서 진통제라던지 그쪽에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이 고통을 누구도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병원에서 그때 처음 느꼈다.
2024년 4월까지 나는 여전히 PMS, 월경전 증후군과 함께 살아야 했지만 이후, 자율신경실조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며 조금씩 회복되었다. 통증도 불안의 무게도 사라져 있었다. 평온과 고요를 처음 만나던 날이었다. 너무 오래 고통에만 잠겨 있었던 탓일까, 기쁜데 나만 아는 기적 같았다.
자율신경 치료는 난소 물혹(난소낭종)을 직접적으로 줄여주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호르몬 밸런스에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 뒤로 물혹이 생기지 않았고 배란통도 줄어들었다.
산부인과 선생님은 자율신경 치료에 대해 잘 모르셨고 주치의 선생님은 부인과 질환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자세히 여쭤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깜빡했다.
자율신경계는 호르몬 분비, 스트레스 반응, 생식기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유튭에서 봤다. 그래서 배란기 통증이나 생리 전후 불편감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는 듯했다.
내 몸이 그렇게 느꼈던 거지 더 자세한 건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다시 아파질까 봐서가 아닌, 그 조용한 평온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간직했던 그날, 지금도 떠올리면 그렇게 좋다.
때로는 바닥을 구를 만큼 아팠고 한밤중 응급실에 간 적도 꽤 되었다. 출산을 하면 괜찮아진다더라! 라는 주변의 말은 조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여자라면 다 그런 줄 알았다. 진통제로 겨우 버티고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만 병원에 갔다.
빈혈이 심하다며 의사는 임산부용 액상 철분제를 처방해 주었고 철분제는 왠지 모르게 나를 더 아픈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지레 거부감이 들어 빈혈에 좋다는 음식에 거의 매달리듯 의지하며 버텼고 하루 세끼를 약처럼 나름 잘 챙겨 먹었더니 빈혈 수치는 14까지 올랐다. 당시엔 어떤 약이든 입에 대는 일이 어딘가 내게 ‘패배’하는 것처럼 다가왔고 그래서 식탁을 약국처럼(?) 꾸려냈던 것 같다.
“여성분 치고는 아주 좋은 수치네요.” 의사의 말에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리통은 여전히 지독했다.
의사들은 위치가 안 좋다며 자궁 근종 수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세 곳의 병원에서 같은 진단이었다. 수술 이후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다.
고통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나는 내게 와준 고통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고통을 볼 때 그 깊이나 맥락보다 얼마나 '참담하거나 비참한가'에 더 주목한다는 것을...
고통은 숫자처럼 비교되고 비참함이 클수록 더 큰 관심을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진짜 치유는 비참함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존엄을 지켜주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통이 더 크거나 더 안타깝기 때문에 귀 기울어지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누구의 고통이든, 그 자체로 충분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고통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유가 된다.
누군가의 상처가 누군가의 기준에서 “견딜 만하다” 여겨질 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침묵을 강요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고통을 줄 세우지 않기로 했다.
고통을 소비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법,
말보다는 눈빛으로,
조언보다는 온기로,
함께 견디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그게 어쩌면 사랑이고, 존중이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만든 허상, 고통을 받아들이는 연습
생각은 교묘하다. 감정에 물든 순간, 현실을 비틀고 진실을 흐린다. 특히 불안, 고정관념, 트라우마가 뒤섞인 생각은 그럴듯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나타나 나를 믿게 한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속인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내 머릿속에서만 사기극이 벌어진다.
생각은 진실을 가장한 허상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거짓말은 남이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기꾼은 내 안에 있었다. 감정과 기억을 노리는 정서 피싱처럼 가해자도, 피해자도 결국 나.
혼자 만들고, 혼자 속고, 혼자 무너진다. 생각은 나를 믿게 하고, 믿음은 착각이 되어 나를 또 속였다. 몇 번이나 속았는지 이제는 셀 필요도 없다. 가장 치명적인 거짓은 늘 내 머릿속에 있었다.
처음엔 늘 묻고 또 물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 고통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이 고통을 겪어도 돼. 괜찮아."
라고 말하는 나를 보았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미리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다. 막상 그 일이 닥치면 감당하기 어렵지만 그전엔 어쩌면 담담했던 것 같다. 모든 일을 일생일대의 문제처럼 받아들이는 순간들이 있지만,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목소리는 대개 내 안의 또 다른 ‘상사’였다. 재밌는 건 누군가 시키는 일은 싫어하면 서도 정작 나에게는 훨씬 더 가혹했다는 것이다. 직장 상사보다 더 무서운 상사는 내 안에 있었다.
때로는 그 상사에게도 말해야 한다.
"그만하자, 나가!"
그래야 진짜 '나'로 살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늘 한계를 시험받았지만 내면의 힘을 발견하기도 했다.
반대로 삶이 최고라고 느껴지는 순간엔 오히려 덤덤했다. 그동안의 고난과 도전이 결실을 맺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살짝 차분해졌고 그런 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최악과 최고는 전혀 다르지만 중요한 경험을 준다는 건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악조건을 겪어봐야 최고의 순간도 제대로 알 수 있다. 이제는 '최악'이나 '최고'라는 말에 의미를 많이 두지 않게 되었다.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나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더 소중하다.
재발, 반복을 경험하며 나는 그렇게 배웠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도, 가장 좋았던 순간도, 결국은 같은 선상에서 나를 길러낸 경험이었다는 것을...
고통은 지나가고 나는 남는다
스스로에게 “이 고통을 겪어도 괜찮아”라고 허락하고 나니 고통은 이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고통 앞에서도 조금은 덜 흔들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 해도 예전처럼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다. 정말 그럴지는 겪어봐야 알겠지만 이제는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고통은 여전히 나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내가 선택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다. 고통을 밀어내기보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천천히 숨을 쉰다. 물론 감정이 의지만으로 나아진 건 아니다. 치료 과정에서 자율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 주사 치료를 받았다.
자율신경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심장박동, 호흡, 소화, 체온 조절 같은 생명 유지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망이다. 특히,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정 상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나는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치료를 받았고 그 치료가 내 정서에도 작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24년 4월부터 제대로 치료받은 거라 차후 풀어볼 예정이다.)
치유는 감정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즉, 주사 한 방에 삶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치료와 감정이 콜라보처럼 함께 움직이며 간극을 메웠고 덕분에 나는 조금씩 나아졌다. 마음가짐이 바뀌자 삶의 풍경도 서서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고통은 나를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디까지 나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저항은 늘 두려움을 키웠고 수용은 평온을 길러냈다. 내가 느꼈던 불안과 공포는 대부분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이 고통을 겪어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순간 고통은 더 이상 나를 삼키는 괴물이 아니게 되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이건 끝이야.”
그렇게 생각할수록 마음은 조여 오고 몸도 더 아팠다.
하지만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통증은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가 절박하게 도와달라고 보내온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이제 와서야, 글을 쓰며 그런 생각이 든다. 치유는 싸움이 아니라 동행을 허락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고통과도, 나 자신과도 함께 걷는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여전히 자유로워지고 있다.
예전엔 나에게 상처를 줬다고 믿었던 그 사람을 지금은 ‘은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는 원망하고 힘들어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고통이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
살면서 어떤 좋은 사람이나 스승을 만났을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 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그 동네로 이사 가지 않았다면?’
‘친구가 소개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따지고 보면 모든 만남과 선택의 끝에는 감사가 있었다.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디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까? 어디서 이렇게 깊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응원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 사람으로 인해 너무나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양자역학이라는 공부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고 감정도, 책도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본 귀중한 기회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삶에 대한 불만이 없으니 과거를 돌이키고 싶은 마음도 1도 없다.
아팠지만 나는 나를 다시 만났고 모든 것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나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누군가에게 의지를 안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내 선택에 일말의 후회나 미련도 없었고 힘든 시절이 많았지만 나는, 자존감이나 내면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통을 겪고 나서 자연스럽게 그런 책들이 눈에 들어왔고 읽다 보니 짜릿했다.
주치의선생님과 공부했던 문장들이 읽히자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나왔고 속에서 기분 좋은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괜찮아야 한다”는 말로 덮어버렸던 분노.
“이만하면 됐지”라는 위안 뒤에 숨겨진 슬픔.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과 외로움들이 내 안에 쌓이고 응어리져 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감정치료를 받으며 내 몸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 통증이 전하는 말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감정은 치료해야 할 병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나누는 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2024년 1월
목이 좀 움직이기 시작했고 통증도 조금 가라앉았다.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나는 또다시 지옥열차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괜찮았던 몸이 이번엔 내 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또다시 거세게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엔 또 ‘수술’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나아졌기 때문에 할 마음은 없었다.
붙잡았다기보다 내가 거의 끌려가듯이 그 단어를 다시 맞이하게 됐다. 결심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기력했고 포기라고 하기엔 또 너무 억울했다.
그럼 이건 뭐지.
두려움? 지침? 체념? 아니면 그 모든 걸 덮고 있는 ‘받아들임’?
한참을 생각해 봤다.
그런데 어떤 감정도 명확하지 않았다.
정말 통증에 시달리다 보니 속이 다 텅 빈 것 같았다.
생각도, 판단도, 감정도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데가 없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였다.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그 벼랑 끝에서 내린 아주 마지막 판단이었다.
"안 좋아지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치료해 왔는데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내 몸은 왜 자꾸 나를 벼랑 끝으로 데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께
“이제 정말 수술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말을 꺼내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몸이 아픈 게 왜 자꾸 죄처럼 느껴지는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안되면 어떡하지?”
이 생각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어차피 같은 걱정이라면
“나 잘되면 어떡하지?"하고 바꿔보는 게 낫다.
한 끗 차이지만 생각의 방향이 바뀌면 마음의 흐름도 달라진다.
살다 보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자주 떠오르는 말은 이것이었다.
“아, 다행이다.”
생각보다 더 자주 다행 속에 살아왔다.
크고 작은 위기보다 그 위기를 넘어선 안도의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니 걱정보다 다행을 기억하며 살기로.
습관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처럼 어렵다.
처음 일주일은 정말 괴롭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에 배고 어느새 자연스러워진다.
강해 보이는 사람도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함을 안고 산다.
생각도 습관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머무는 것도 좋은 감정을 떠올리는 것도 반복의 결과다.
어떤 생각을 자주 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이 달라진다.
좋은 쪽으로 습관을 쌓자! 익숙해진다는 건 곧 나를 만드는 길이니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살리기 위해 공들여준 이들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 나를 돌봐준 의료진의 손길을 기억하며 그 힘으로 다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나는 통증과도, 고통과도, 나 자신과도 함께 걷고 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고통아, 고통아, 네가 아무리 덤벼봐라 내가 쓰러지나.
완치는 없지만 평온은 있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가 나에게 " 완치는 없다"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깊은 뜻을 잘 몰랐지만 마음만은 시원했다. 지금은 100% 동의한다.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이제는 명확히 안다.
대게 그렇겠지만 ‘이일만 끝나면 잘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껏 모든 고난을 버텨왔다.
통증도, 특히 만성 통증은 그런 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겪어본 고통은 그랬다. 통증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는 다만 ‘고통스럽지 않을 정도’로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 이후는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운동을 하든, 식단을 하든, 일상을 조율하든, 나머지는 결국 내 몫이다.
"고통은 끝내는 게 아니라 다루는 것"
"체념이 아니라 선택"
"완치 없다"는 말을 고통 앞에 있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꺼낼 수 있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그건 신뢰가 기반이 된 관계에서만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뢰 안에서 그 말을 들었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 본 의사가 그런 말을 했다면 아마 나는 상처받거나 거부당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를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었고, 이해하고 나서야 그 말의 무게와 배려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몸이 아픈 건 당연했고 마음이 아프니 더 아팠음을 고백한다.
"건강한 사람도 피로나 수면 부족 등으로 일시적인 통증을 느낀다. 하물며 만성통이 있는 사람이 영원히 무통이기를 바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통증은 삶의 일부이고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좋아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단순히 체념이 아니라 삶을 더 주도적으로 살기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 지금도 무통인 날도 있지만 컨디션 난조인 날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통과시키려고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원장님의 뜻을 전부 이해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