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나를 단련하는 중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그건 나의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내어 주는 것이다.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 사람 마음에 가까이 갈 때 상대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상담하다 보면 환자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며 묵묵히 듣고 대화 나누는 것 외에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줄 방도를 달리 찾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정신과에는 명의가 따로 없다. 굳이 꼽자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가능한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 주는 의사라면 모두가 명의일 테다.
-겸손한 공감 김병수-
주치의 선생님은 나라는 환자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셨다. 그분의 철학이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병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가진 '한 사람'을 먼저 이해하려 하셨다. 그래서 초진 시간도 기본 30분이다. 그런데도 대기 환자분들이 오래 기다린다고 불평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들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듯했다. 컴플레인이 없는 병원의 모습을 보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의사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대로 따라 하면 내 병도 더 빨리 나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던 끝에 이번에는 내가 먼저 출판회에 가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열린 걸 보고 대구에서도 하시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랐는데 정말로 그렇게 하시게 되었다.
고산골 카페에서 많은 분들과 맨발 걷기 후 담소를 나눴다. 원장님과 투샷!
작년 11월, 대구 야시골 공원.
원장님과 환자분들이 맨발 걷기 후, 근처 카페에서 잠시 몸을 녹였다. 겨울철 맨발 걷기는 내게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발끝은 시렸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수요일은 원장님의 휴진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시간을 내어 환자들과 직접 걸음을 나누시는 모습에 깊은 존경을 느꼈다. 환자들의 몸과 즐거움까지 돌보려는 태도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환자가 놀아주는 의사였을까,
의사가 놀아주는 환자였을까.
치료라는 이름 아래 만난 관계였지만
서로를 ‘치유하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치의 선생님께 이 질문을 드린다면
돌봄과 위로는 언제나 한쪽에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치유는
‘누가 누구를 돕는가’의 역할이 지워진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분을 통해 배웠다.
그날, 공원에서 맨발 걷기 하기 전 어르신들의 건강은 어떤지 물으며 진료를 보고 계셨는데 내가 이 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맨발 걷기는 원장님께서 직접 행사 소식을 알려주셨고 또 어떤 날은 내가 신청해 두었더니 봤어요! 하고 잘했다며 말해주시기도 했다.
초대받기도 했고, 스스로 참여하기도 했다.
나는 행보칸 환자이자 바쁜 환자였다. 몸은 아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름 활기차게 살아내고 있었다. 뽕을 뽑은 셈이다. ㅎㅎ
건강이 좋지 않으니 멀리 떠날 수 없었던 나는, 병원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들을 소중히 붙들었다. 아픔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일상의 반경 안에서 작게나마 생기를 찾고자 했다. 그런 내게, 병원은 치료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지구별 여행 중"이라고 적힌 티셔츠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사진을 찍었다. 그 문구처럼 우리 모두는 잠시 머무는 여행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보낸 지난 1년, 나는 그런 여행 중에도 뜻밖의 아다리가 맞아 5~6번 정도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
치료만 받는 데에 머물지 않고 병원 밖으로 나와 환자분들과 걷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맑은 하늘 아래, 말 한마디로 서로를 위로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안부를 건넸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아픈 사람이 아니었고 생의 한 장면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치유는 병원 침대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걷고, 웃고, 마음을 나누는 그 순간들에서 회복은 시작되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작은 웃음.
그것이 가장 깊은 치료였는지도 모른다.
치료의 문은 주사로 열렸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따뜻한 만남과 웃음이 머물렀다. 약물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진짜 치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이 머문 시간에 있었다.
최근 2025년 5월 6일부터 27일까지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늘 반복되는 치료와 검사, 병실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도 나는 가능한 한 ‘살아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어느 날, 원장님께 말씀드렸다.
나: “원장님, 제안&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주말마다 환자분들 컨디션이 좀 처지시는 것 같아서요.
상태 괜찮은 분들과 함께 맨발 걷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환자들의 컨디션이 걱정된다며 애써 말을 건넸지만
사실 가장 심심하고 힘에 부쳐 있던 건 나였다.)
원장님: “정말 멋진 제안이에요. 병원 건너 모명제도 괜찮죠. 거기서 걸으면 좋겠네요!”
이 바쁜 병원에서 괜히 나서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역시 맨발 의사께서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콜 해주셨다. 회진 때 환자분들께 일일이 여쭤보셨다는 말씀에 감동! 작은 바람 하나였는데 그 말에 이렇게 빠르게 응답해 주신 마음이 참 감사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늘 병원에 머무시는 원장님이 사실은 환자보다 더 밖으로 나가 걷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환자의 바람에 가장 먼저 기뻐해주신 분도 아마 그분이었을 것이다.
30분.
정식으로 허락된 외출 시간!
병원 환자복 그대로 나섰다.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병원 바로 앞에 ‘모명제’라는 작은 산길이 있었다.
그곳을 산책하며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산길임에도 발바닥은 아프지 않았다.
함께 간 암환우분은 맨발 걷기가 처음인, 이른바 맨린이셨다. 연신 좋다시며 꾸준히 걸으셨다.
어쩌면 그날,
우리 모두는 마음까지 맨발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분들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 시간이 오래 기억될 만큼 충분히 따뜻했으니까.
산딸기 오랜만이다. 먹으려다 참았다. ^^
안내소에서 친절한 설명을 들은 뒤, 조용히 산책을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풀 내음을 깊이 들이마시고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귀에는 뻐꾸기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이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자연은 그날따라 너무도 경이로웠다.
너무 완벽해서 혹시 어디선가 스피커로 소리를 틀어놓은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뻐꾸기 소리는 옛날 장식용 시계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고 너무 선명해서 자연이 얼마나 정교하게 세공된 세계인지 실감했다. 그 짧은 시간이 주는 감동은 예상을 훌쩍 넘어섰다.
그렇게 다녀왔더니 통증이 사라진 듯 몸이 가벼워졌다.
병원에서 먹은 점심도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의원에서 병원으로 확장하셔서 세 배는 더 바쁘실 텐데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환자들과 함께 걸어주시는 원장님을 보며 이분은 정말 현실 의사가 맞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치유자’ 같으니 말이다.
그래선지 이 병원 암 환우분들은 참 밝으시다.
함께 병실 쓰던 룸메 분들! 족욕 중 찰칵!
항암 끝난 환우분들을 위해 축하송을 불러주시는 의느님! 늘 환자가 나아지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신다. 나 역시 재발과 회복을 반복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응원과 축하를 받았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돌봐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건강이란, 통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나와 내 감정, 몸이 잘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
때로는 멈추고 쉬는 것이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병이 내 인생을 빼앗은 게 아니라 오히려 내 인생을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사실.
아팠던 과거가 부끄럽지 않다.
고통은 스쳐갔고 내가 살아냈다는 증거들이 남아있으니...
남은 것은 상처가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한 내 몸과 마음의 잔열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밝으니 환자분들도 밝을 수밖에.
치료사 선생님들은 초상권이 없다고 하셨지만 내가 못 나와서 가림ㅎㅎ
5월 24일 토요일, 병원에서 양정숙 작가님의 강연이 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을 톡 건드리는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강연이 끝난 뒤, 작가님께서 내게 다가와 살며시 물으셨다.
“왜 그렇게 많이 울었어요?”
마음이 쓰였다고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셨다.
눈물이 다시 흘렀다.
이번엔 웃음이 조금 섞인 눈물이었다.
고통은 고통을 알아보나 보다.
말보다 먼저, 마음이 반응한다.
고통 앞에서 사람은 숙연해진다.
안아줄 줄 아는 사람은 그 침묵의 깊이를 지나온 사람일 것이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고 눈물은 눈물이 날 자리까지도 기억한다. 기억은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
아프면서도 살아가고 불편하지만 웃기도 하고
어느 날은 무너지지만 또 어느 날은 일어서는 우리들.
그 모든 날들이 충분히 괜찮은 날들이었다.
이렇게 오늘 하루 행복했다면.
의사 선생님은 과연 알고 계실까.
내가 왜 ‘행보칸 환자’인지.
당신이 스스로를 ‘행복한 의사’라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는 걸.
병원 안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
아프면서도 하루를 기꺼이 걸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병이 낫기 전까진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늘 이렇게 다짐했다.
반드시 나아서 행복하게 해 드리겠다고.
그리고 이제, 다음 지구별 여행에서는 내가 주치의가 되고 싶다고 다짐한다.
진짜 약이 아니라, 말 한마디로, 걷는 걸음 하나로, 그분이 많은 환자분들께 그랬듯이.
행복한 환자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얼굴로, 체험하게 해드리고 싶다.
누군가는 나를, 병원을 그렇게까지 행복하게 다니는 미친 환자쯤으로 볼지도 모른다.
괜찮다. 나는 그 말마저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병원 생활이 반드시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누군가에겐 말해주고 싶다.
고통 속에서도 웃는 법을 아는 사람은 이미 절반쯤 치유된 사람일 테니...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힘들 때마다 웃을 것이다.
어차피 아파야 한다면 차라리 행복하게 아픈 편이 낫다.
어디까지 아플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디까지 웃을 수 있는지도 안다.
그렇기에 나는 더 알고 싶다.
내가 얼마나 아플 수 있는지, 그리고 그만큼 얼마나 웃을 수 있는지를.
아픔과 웃음 사이에 흐르는 가느다란 선 위에서 진짜 내가 서 있는지 알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회복을 ‘완치’라고 믿는다.
다 나았고 예전으로 돌아간 상태라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고통은 종결이 아니라 "다시 쓰는 이야기"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나는 갑자기 무너졌지만 지금의 나도 갑자기 잘 살아가고 있다.
회복이 아니라, 공존이다.
통증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웠고 무너져도 다시 중심을 잡는 법을 익혔다. 견디는 기술, 관계를 맺는 기술, 그리고 나를 설득하는 기술까지.
고통은 멈추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아직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행보칸 환자놀이.
누군가는 “다시 무너지는 중”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나'로 최신 버전으로 재조립되고 있는 중이다.
고통을 겪으며 망가진다는 표현은 정확할지 모르지만 그게 진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더 세심하게 몸을 듣는 귀, 말없이 견디는 마음, 삶의 온도를 섬세히 재는 손끝이 깨어나고 있다.
망가지는 건 기계일 뿐,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망가지지 않고, 변한다.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표면은 닳고, 속은 드러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리는 용기이자 선물이다.
주치의 선생님과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또 나를 드러낸다.
아무도 표현할 수 없는 언어로 나는 지금도 나만의 언어로 살아내고 있다고.
고통은 처음엔 외부에서 오는 줄 알았다.
예고도 없이 누군가의 부주의한 손길처럼 내 삶을 뒤흔들었으니까.
그게 누구 탓인지 묻느라 몇 계절을 다 썼다.
바람을 원망했고, 유전자를 탓했으며, 내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신에게 편지를 썼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신 몸이 대답했다.
어느 날, 통증이 너무 심하던 날, 두통과 함께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어두운 밤, 무너진 달 하나가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눈물방울이 맺혔다.
서로 연결되었으나 흘러내리고, 머물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 물방울...
사람들은 “그래도 고통이 널 강하게 만들었겠네”라고 말했지만 나는 부인했다.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얼마나 자주 무너지고 부서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부서진 것들을 다시 주워 담는 일이 얼마나 창조적인 행위인지를 알려주었다.
고통은 완전히 끝나지 않고 형태를 바꿀 뿐이다.
어떤 날은 '내가 아니다'라는 목소리로 나타났고
또 어떤 날은 거울 속 내 표정 하나에도 드러났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나는 고통을 통해 삶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꽃이 피는 순간만이
생명의 증거가 아니라는 걸,
떨어지는 꽃잎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걸,
그리하여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잉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서툴지만 걷는다.
부서진 척추처럼 휘어진 하루 위를.
그곳엔 검은 실금들이 그어져 있고 나는 그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그 실금은 예전의 나, 과거의 절망, 지나간 계절의 지문이다.
그 틈을 밟으며 나를 증명한다.
고통은 내 발밑에서 계속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는 비극이 아니라 생존의 리듬이다.
고통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는 사람에게는 말이 생긴다.
내 말은 아직 튼튼하지 않다. 그러나 숨은 있다.
나는 그 숨으로 오늘도 기록한다.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것에게 나를 살아 있게 했다고 적는다.
고통이 올 때마다 억울함을 느꼈다.
왜 이리 아픈지, 이유조차 모른 채 그저 견뎌야 하는 시간이 서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고강도 운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 억울함이 조금 줄어드는 게 아닌가.
운동 후의 근육통은 아프지만 납득 가능하다. 내 몸을 단련하기 위해 겪는 통증이라 생각하면 그 고통은 뿌듯함이 된다. 똑같이 아픈데 해석 하나로 감정이 이렇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겪는 다른 통증들도
혹시, 내가 더 튼튼해지기 위해 거치는 과정은 아닐까?
통증은 운동과 똑 닮았다. 한계까지 밀어붙여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고통을 통과한 후에야 보이는 나의 힘, 회복력, 살아 있다는 실감.
물론 극한으로 아플 때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치료가 잘 돼서 통증이 옅어지고 다시 잘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절실히 알게 된다.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아플 때는 모든 게 멈춘 듯하지만 몸 안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회복되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것을 버텨낸 나도 함께 달라졌다는 것도.
통증은 나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아플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볼 것이다.
"나는 지금 나를 단련하는 중이다.
억울해하지 않고 그 시간을 나와 함께 지나갈 것이다."
한동안은 생각했다.
"앞으로 내게 평온한 세상은 없겠구나."
천둥과 번개, 끊이지 않는 기계음으로 가득한 머릿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을 때,
눈부시고 아득한 생의 봉우리를 나는 기억한다.
하늘은 맑고 우리는 때로 아프지만 그 둘은 모순이 아니다.
세상이 괜찮다고 해서 나도 괜찮아야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아프다고 해서 세상까지 무너질 필요도 없다.
TO. 전국의 수많은 의사 선생님들께
안녕하세요.
늘 무거운 책임과 무수한 고단함 속에서도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애쓰시는 선생님들께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주사를 여러 번 맞으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몸이 긴장하고 근육이 굳어 있을 때는 주삿바늘이 마음까지 파고드는 듯한 날카로운 기억이 된다는 것입니다.
친절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진료실에서 환자가 숨죽이고 마음이 움츠러드는 말은 없었으면 합니다.
치료는 약이나 주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마음이 편안해질 때 몸도 조금씩 그 문을 엽니다.
작은 배려 하나가 환자에게는 큰 치유가 됩니다.
선생님들의 손길과 말 한마디가 고통에 짓눌린 누군가의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