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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의사 김정훈 병원장님 출판회

진심을 저버릴 수 없던 마음

by 미리나


행복한 H 병원 김정훈 원장님을 만난 뒤, 나는 더 이상 정신과를 찾지 않았다. 약은 고작 일주일치. 몇 날은 그냥 통증을 잠시라도 안 느끼고 자고 싶어서 한두 번 수면유도제를 삼킨 적은 있지만 본격적인 약물치료는 시작되지 않았다.

가끔은 죄송했다.
그 바쁜 병원에서 내 모든 증상을 다 짊어지게 한 것 같아서. 나 혼자 병 전체를 맡긴 것처럼.



치료 과정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나도 약 끊어볼까?"

"나도 너처럼 치료받아보고 싶다"며

농담 섞인 진지한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나도 정신과적인 치료를

그 의사 선생님께 맡겨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지”라며 웃어넘겼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말들이 나의 회복이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져 벅차오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과의 소통이 유난히 잘 되고 주사 치료도 효과가 있고 몸이든 마음이든 어떤 치료든 마음 깊이 와닿았던 날이면 나는 그 감동을 SNS에 올렸다. 그러면 진료를 맡겨놓기라도 한 듯,“오늘은 어땠어?” “이번엔 뭐라고 하시던데?” 하고 물어왔다.


내 회복 여정을 지켜보는 사람들,

그들과 매번 치료 후기를

나누는 일은 참 귀중한 경험이었다.


특히 한 친구는 내가 겪은 과정을 통째로 궁금해했고 하루는 내가 농담처럼 “진료비 3천 얼마니까 반은 내놔”라고 했더니 진심 반쯤 섞인 장난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 정말로 2천 원을 송금해 왔다. ㅋㅋ 입금 내역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이후에 이어진 고맙다는 인사들이었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치료는 나 하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병원에 직접 가지 않는 순간에도 틈틈이 원격으로 치료와 조언을 이어가 주셨다. 나는 꼭 나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감사 이상의 감정이었다. 내가 낫지 않으면 이 모든 진심과 노력에 배신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의료비는 당연히 내 돈 내산이고, 그러나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관심과 지속적인 케어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소비자, 즉 환자가 아니라 진심을 주고받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그 마음에 응답하고 싶었다. 아픈 몸을 다스리는 일이 단지 생존의 문제가 아닌, 누군가의 진심에 보답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인해 살아난다.

치료는 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몸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나는 낫고 싶었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따뜻한 진심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었고 응답하고 싶었다.



원장님도 내 마음을 아셨을까. 조금씩 좋아질 때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이렇게 나아줘서 정말 고맙다, 고생 많았다고 늘 다독여주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환자가 치료를 받고 나아지는 걸,

이토록 만개한 웃음으로 기뻐해 주는 의사가 있다니.


어릴 적, 밥 잘 먹고 잘 잤다는 이유만으로 칭찬을 받던 내가, 이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성인이 되어, 그저 치료를 잘 따라왔다고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받는다니.


원장님뿐 아니라 병원 안 모든 분들, 간호 선생님들, 관리자분들까지 나를 향한 걱정과 관심은 진심이었다. 오고 가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건네주시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날엔,


“집까지 데려다줄까요?”

“밥이라도 먹고 가요”라며,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나는 분명 환자였는데 그들의 시선 속에서 환자가 아니었다. 한 사람으로, 한 존재로, 진심으로 걱정받고 존중받았다.


그 마음들이, 그 다정한 말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래서 지금, 이 회복의 길 위에서 문득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이 참 고맙고 눈물 나도록 따뜻하다.


아픔 안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고맙다는 말을 수 없이 말한다. 아프지 않은 하루를 선물해 준 이들, 나를 사람답게 아껴준 이들에게.


치료가 점점 빛을 발하던 어느 날, 나는 꾀가 나서 의사 선생님께 치료를 잠시 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잠깐 쉬어도 괜찮아요"라며 부드럽게 웃으셨다. "오래는 안 돼요"라는 단서를 덧붙이며.ㅎㅎ

나의 회복 속도를 인정해 주신 듯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서울에 머물던 중, 원장님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맨발 걷기에 관한 책을 출간하셨다며 출판기념회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학회에 이어 두 번째 외부 활동. 마침 서울에 있었고 행사는 강남에서 열린다 했다. 집에서 고작 20분 거리.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맨발 걷기부터 마음 돌보기, 그리고 연결의 회복까지.
이 모든 여정을 열어주신 분. 날 살려준 구세주.

팬심이 농담 같아 보여도 진심이다.
그렇다고 앞에 대놓고는 못 한다.

아무리 감정이 들끓어도 나도 분위기 읽을 줄 알고 선도 지킬 줄 안다. (^∧^)



때마침 맨발 걷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터라, 몸도 마음도 제법 가벼워진 상태였다. 출판기념회라는 자리에 발을 들이는 일은,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자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쉽게 넘어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고관절은 제멋대로였고 힘은 자주 빠졌다.


걷다가 휘청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치료 기간이 아니라 그런 내 몸 상태를 원장님이 알고 계실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마 알고 계실 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그게 마음을 놓이게 만들었다.


내가 의사였다면, 혹시라도 지인만 초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깊은 배려는 나에게 늘 새로운 감정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직은 조금 두려웠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고, 말이라는 것을 건넨다는 행위가.



그날, 출판회라는 낯선 공간에 나를 초대한 건 의외로 그 두려움을 조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오랜 시간과 마음이 담긴 책, 그 자랑스러움의 순간에 내가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울컥했다.

나 같은 사람이,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된다고 여겼다.


몸이 휘청거리고, 말수가 줄어들고, 생각이 자주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그래서 스스로를 ‘민폐’라 부르며 자꾸만 작은 구석으로 숨어들곤 했다. 하지만 그날, 조명 아래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강연을 들으며 조금 다른 내가 되어갔다. 그 순간의 공기, 말없이 건네는 눈빛, 따뜻한 손길 하나가 나를 묶고 있던 불안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잊고 있던 희망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 같았다.


꼭 쥐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오래 닫아 두었던 창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드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살아 있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늘 영상과 글로 접하던 원장님의 이야기를 직접 강연으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책으로만 익히던 목소리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자, 오랜 독자가 작가를 만난 듯한 깊은 벅참이 느껴졌다.


원장님은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사모님의 권유로 뒤늦게 의사의 길을 걸으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삶이 감사했다.

삶의 방향은 스스로 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작은 믿음, 작은 권유 하나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내게로 와준 이 만남도,
어쩌면 아주 오래전,
누군가의 다정한 마음에서 출발했을지 모른다.

이름도 모르는

그분의 신념과 사랑이 이토록 멀리까지 닿았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은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감사의 마음은
때로 많은 계절을 돌아서라도
결국 가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이력이라 생각했는데 이어서 인상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모든 걸 갖춘 듯 보였던 직장 상무님은 “다시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원장님이 물으셨단다. 행복하시냐고.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던졌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사람은 삶의 껍데기가 아니라 속살을 살아야 하는 거구나.


모든 것을 가졌을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성공이란 바깥에서 주어지는 칭호가 아니라 안에서 피어나는 울림인지도 모른다.


진짜 삶은 늦게 도착해도 좋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느끼며 걷는가가 아닐까.


가진 건 많지 않았지만 너무도 평안해 보이는 선배를 떠올렸고 그 삶과 표정, 태도를 이야기하며 행복은 가짐으로 좌우되는 것 아니라며 자신의 지난 시간을 풀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을 움직이는 건 외형이 아니라 삶의 표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병원 직원분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때 원장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님도 식구잖아요.

이제는 우리 식구니까 사진 찍어요.”
긴 시간 낯선 통증과 혼자인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그 한마디는 누군가의 품 같았다.

그 말을 들은 직원분들까지 덩달아

“식구니까 밥도 먹고 가요!” 하며,

내 팔을 끌었고 나는 그 손에 이끌려 강남 어귀의 음식점에서 따뜻한 밥을 먹었다.

함께 웃으며 그렇게 밥 한 끼를 나눴다.


생각해 보면 그날 통증이 없다거나 기분이 좋다거나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눴고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가벼웠다.

손 하트 ❤️

직원분들 사이에서 그 순간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다들 블랙.
나만 화이트 코트.
눈에 너무 튀어서 살짝 민망했다.
누가 보면 내 출간회인 줄.



사람은 그런 순간들로 조금씩 살아진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따뜻한 밥 한 끼. 치료란 언제나 약으로만 되지 않는다. 때로는 “밥 한 번 먹어요”라는 말이 가장 깊은 상처를 치료해 준다. 내 주치의 선생님은 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서울에 가기 전, 진통제나 근이완제를 부탁드렸을 때도 고개를 천천히 저으셨다.

결국 고작 3일 치만 내주셨다.

그것도 그냥 주신 게 아니었다.


왜 먹어야 하냐고 물으셨고, 어디가 가장 아파서 먹고 싶은지, 약을 먹고 나서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떻게 할 계획인지, 내가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 낼 생각인지... 그 모든 질문을 던지셨다.

"사정하다시피"
말 그대로 간절히 애원하다시피 간청해서 겨우 얻었다.


약을 아끼는 게 아니라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약으로 고통을 억누르기보다는, 내가 내 고통을 이해하고, 직면하고, 돌볼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 그래서 나는 비록, 빈 봉지 같은 약봉투를 약국에서 들고 나왔지만 더 큰 위로를 안고 병원을 나섰다. 이건 2021년도의 이야기다.

그때는 좀 너무하신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웃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더 많이 헤아릴 수 있었다.


치료는 때때로 약보다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약보다도 의사의 태도에서 더 많이 치유되었다.


원장님과 사진 찍을 기회를 보고 있는데 원장님과 직원분들이 얼른 오라며 손짓하셨다.

약간 증명사진 같기도 하고 가족사진 같기도 하고

앞에 많은 카메라 의식을 하느라 살짝 긴장했다.

넘어지면 어떡하지? 걱정과 함께.

? ^^

"예수님과 부처님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소중하게 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동안 소외되었던 발을 소중하게 대한다면 우리의 몸도, 우리의 사회도 더욱 평화롭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당시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품고 귀하게 여긴 일은 자비의 실천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시 묻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찮아 보였지만 실은 중심이 되어야 할 것들. 그 가치를 비로소 되짚게 된 시간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심히 지나쳐온 ‘발’을 존중한다는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했던 몸의 일부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이다. 소외된 것들의 회복이자, 나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발은 하루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말이 없다.

늘 땅에 닿아 있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런데 그 발을 소중히 대하면 몸 전체의 균형이 바로잡히고 삶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진다.


우리가 작고 소외된 것을 경청하고 돌보기 시작할 때 그것이 사람이어도, 신체의 한 부분이어도, 혹은 사회의 한 계층이어도 더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과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교훈을 주었다. 진정한 치유회복언제나 무심코 지나쳤던 곳에서 시작되나 보다.


눈에 띄지 않는 것들, 말이 없는 것들, 끝에 서 있는 것들이 실은 우리를 지탱해 왔다.
삶을 다시 세우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곳은 늘 가장 낮고 조용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소유가 부족한 게 아니라 연결이 부족한 겁니다."

"맨발 걷기는 단지 신체의 건강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 정서적인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도
맨발 걷기는 큰 힘이 된다고 하셨다. 현대인이 겪는 불행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과 마음의 소외에서 비롯된다고.

우울감, 지속적인 피로, 깊은 불면은 소비나 소유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따뜻한 소통자연과의 교감, ‘연결’이라고 강조하셨다.


맨발 걷기를 들었을 때 고개가 쉽게 끄덕여지지 않았다. 남자친구도 오래전 이분께 한참 치료를 받았었는데 같은 권유를 받았다고 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나 하는 거라며 선입견이 앞섰다. 그런 내가 지금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있다.


“정말 좋아요. 수면에도 도움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요. 수면제가 필요 없을지도 몰라요.”

조심스럽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말로 말이다.


삶은 끝없이 펼쳐지는 수수께끼 같다.


처음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진료실에서 원장님이 권할 때마다 반신반의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맨발로 땅을 밟는다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재미를 붙이고 있는 나.


걷는 동안 마음의 긴장이 조금씩 녹아드는 건 분명 느껴진다. 아직 맨린이라 통증에 정말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꿀잠 자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계속할 이유가 된다.


애써 피하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내편이 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도 한 걸음,

예상하지 못한 회복의 길을 걸어본다.



땅을 맨발로 밟는다는 건

마음을 다시 땅에 붙이는 일이다.


단절된 감각을 하나씩 되살리듯, 아스팔트보다 풀을 찾게 되었고 무심히 흘려보내던 주변의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내 숨결과 감정의 결을 천천히 따라가며 지금 이곳에 나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하며 깨닫게 되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외롭고 단절된 채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누군가와, 무언가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강연 중간중간 우리가 스스로를 다시 돌보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사유의 도구들을 나눠주셨다.


한 시간 넘게 이 강의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햇빛 쬐기, 사람들과의 따뜻한 교류 같은, 삶의 회복을 향한 방향을 짚어주는 길잡이, 혹은 회복의 설계자 같다. 병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환자가 몸과 마음을 회복해 가는 여정에 함께 발을 맞추는 일상의 동행자, 회복의 공간을 함께 짓는 건축가로 느껴진다.


만약 모든 의사가 처방자를 넘어 회복의 환경을 함께 설계하는 것으로 확장된다면 세상의 아픈 사람들 모두가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환자분들과 나에게 권한 단 10분이라도, 땅에 맨발로 닿기만 해도 맨발 걷기는 열 알의 약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분이 건넨 한마디의 믿음은 그 어떤 진통제보다 오래도록 마음을 붙드는 힘이 되었다.


마음 안에 잠들어 있던 자연 치유의 리듬을 다시 작동시켜 주는 촉진자 같았다.
몸이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게 도우면서도 그 회복의 과정을 전적으로 ‘나’라는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사람,

약보다 삶의 회복을 믿는 사람,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살게’ 만드는 사람.


“제가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의사는 아닐지 몰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환자에게만큼은 유일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분은 내게 지금도 유일한 의사다.



실력을 넘어선 진심, 치유를 넘어선 존재의 자리.

그분은 단지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픔 너머에 있는 나라는 사람 전체를 바라보고,

늘 몸보다 먼저 마음의 안부를 물었다.


“어디가 아프세요?” 대신,

“요즘 마음은 어때요?

잘 주무시나요?”라는 질문이 먼저였고

“밥은 잘 먹나요?

오늘은 무엇을 드셨나요?”

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멈춰 서면 서둘러 끌지 않고 조용히 머물며 함께 숨을 고르게 해 주었다. 그래서 단지 치료자가 아니라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해준 사람이었다.

약 몇 알보다 신뢰, 처방전보다 따뜻한 눈빛이 나를 다시 일어나게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더욱이 선명해졌다.


어떤 의사는 병을 고치고, 어떤 의사는 삶을 바꾼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에 남는다.

언제 떠올려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힘들 때일수록 더 또렷하게 떠오르는 그런 사람.

실력을 넘어선 진심으로, 치유를 넘어선 온기로 나를 ‘살게 해 준’ 단 한 사람.

그게 나에게는, 그분이었다.


몸을 살리는 것은 지식이지만 마음을 살리는 건 관계다.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의 유일한 의사가 된다는 건,

이 세상에서 정말 드물고,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다.

나는 그 기적을 안다.

그 한가운데를 지나왔고, 그 안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누군가는 오직 정상을 향해, 속도를 높이며 달려간다.
그러나 정상이 반드시 '행복'이나 '의미'를 보장해 주는 자리는 아닐 수 있다.

인생을 되돌아보며

“다시 산다면 이렇게는 살지 않을 것 같다”는

지위나 명예로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결핍이 비쳤다.

그 결핍의 정체는 자기 삶에 대한 실감이 아닐까. 주어진 틀과 역할에 충실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으로 살아보는 시간은 없었던 것.

그래서 생각했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용기,
그리고 가끔은 멈춰 서서 지금 이 길이 나에게 의미 있는 길인지 들여다볼 여백이 필요하다고.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
속도보다 방향, 성과보다 실감.
그리고 남이 아닌, 내가 옳다고 느끼는 삶을 향해...


삶을 건네주는 의사

많은 환자분들과 나에게 맨발 걷기를 권하며 언뜻 보면 치료 외의 무언가로 방향을 바꾸는 듯했지만 사실은 그 어떤 의사보다도 깊이 환자들의 몸과 삶을 걱정한 걸지도 모른다. 그건 내게서 등을 돌린 말이 아니라 내가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담은 축복 같았다.


자신의 책 출판이라는,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에 고칠 것이 많은 환자인 나를 초대해 준 일.

그건 그냥 친절이 아니었다.


‘당신은 이제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어요’라는 초대장이었고,

‘당신은 나의 자랑이에요’라는

무언의 인사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늘 나를 ‘아픈 사람’이 아닌,

‘회복할 수 있는 나’로 보았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으로 바라봐주었다.

그 온기를 기억한다.


그분이 내게 보여준 믿음과 존중, 그건 말보다 더 깊은 언어였고 치료보다 더 강한 위로였다. 삶의 끝에서 만난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 빛이 있었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한 발씩 나아갈 수 있었다.


<인스타에 올린 후기>


이런 일상이 이젠 가장 좋은 치료처럼 느껴진다.

충분히 치유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사 안 맞아도 되지 않을까.ㅎㅎ


목 디스크 통증으로 MRI를 찍게 한 대구의 모 신경외과 의사는 모니터를 보며 책을 읽듯 말했다.
“통증의 역치가 낮아졌네요.” 하고 말을 끝냈다.

그 말은 곧, 내 감각이나 반응이 예민해졌다는 뜻이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내가 더 빨리 반응하고 있다는 것.


작은 자극에도 통증으로 되받아치는 몸,
그리고 그 몸을 지켜보는 마음이,
점점 더 날이 서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말만 들었을 땐, 마치 ‘그게 당신 문제예요’라는 의미처럼 들렸다.
해결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고통을 내가 감당하지 못해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역치’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 신경외과 의사의 말투가 떠올랐다.

환자에게 역치라는 말을 쓰는 의사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제 역치가 높은가요?”라고 물었을 때 “낮다”라고 답한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수술 이야기가 오갈 즈음, 나는 불안한 마음에 주치의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했다.
'신경외과에서는 제 통증이 역치가 낮아져서 더 아프다고 했어요.'

내 몸이 더 예민해져서 앞으로 견디기 힘들다는 의미 같아 불안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마음이 컸다.


주치의 선생님이 물으셨다.
'그럼 그 병원에서는 역치를 높여준다고 했나요?'


그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내가 듣고 느낀 불안과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말이 치료의 방향이나 해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짚어주는 날카롭고 따뜻한 질문이었다.
역치가 낮다는 진단이 무력감을 불러일으킬 뿐,
‘어떻게’ 도와줄지에 대한 답은 담겨 있지 않다는 걸 환기시켜주었다.


그럼 통증만 없애주면 되겠네요!

역치를 높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 말에는 진단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 질문 덕분에 나는 치료가 통증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대신, 해결의 중심에 함께 서겠다는 태도.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해 낼 수 있도록, 고통에 대한 내 저항력이 다시 단단해질 수 있도록.

그것이 바로 나의 주치의가 지금까지

나를 ‘치료해 온 방식’이었다.


진단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함께 책임지고, 함께 길을 찾는 사람. 그래서 "주치의"라는 말은 내게 더는 의학적 호칭이 아니다. 그건 내가 믿고 기대어도 되는 고통 속에서도 나를 ‘사람답게’ 돌봐준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몸이 아프면, 평소엔 흘려들었던 말들이 마음에 남는다.
그날도 그랬다. 평소였다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다 내 얘기 같았는지.


세상이 갑자기 내 속도를 따라와 주는 느낌이었다.
집중이라기보단 절실함에 가까웠다. 뒷목은 뻣뻣하게 당기고 오래 앉아 있으니 등줄기도 저릿했다.
통증은 확실하게 몸을 조이고 있었다.

나는 목 때문에 영화관에서도 거의 맨 뒷좌석에만 앉는데 그날은 달랐다. 주치의 선생님의 이야기에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단어 하나라도 더 놓치지 않으려 앞자리에 앉았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오래전부터 갇혀 있던 무언가를 대신 꺼내주는 것 같았다.

아파서 운 게 아니었다.
그 말들이 너무 따뜻하고,

너무 정직하고, 너무 나 같아서 울었다.

나만 운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무사하지 않았다.


그날 알았다.

고통은 사람을 쓰리게도, 강하게도 만들지만
얼마나 사람을 투명하게 비추게 하는지를.



감정은 숨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한겨울 유리창처럼 서늘하고 정직하게
감춰둘 수 없이 차오르는 마음은 빗물처럼 서서히 맺혀

누군가의 온기 한 점으로 소리 없이 터졌다.


감정은 이렇게 쉽게 감춰지지 않고

작은 따뜻함 하나에도 티 나게 흘러나온다.


눈빛, 침묵 한 겹,

그리고 울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던 그 시절의 나는

말을 아꼈지만 마음은 다 말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투명했다.


모든 것이 스며들었고
모든 것이 번져 나왔다.

언젠가부터 그 마음이 부끄럽지 않았다.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던 시간.

그 시절의 내가 그립다.
더 많이 아팠고
더 자주 울었지만
그래서 더 살아 있었다.

고통은 귀를 연다.
소음 속에 묻혀 있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가장 은밀하고도 진실한 이야기들에.


치유는 말이 아니라 그 침묵을 끝까지 들어주는 귀에서 시작된다.

오래, 곁에 머무는 일로부터.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https://youtu.be/vRKTXPZUfCE?si=mOfLbmr9nSBGrVJO


마음(감정)치료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글이 길어지는 것도 그만큼의 시간이 실제로 흘렀기 때문이겠지요.
줄이고 싶지만 아직은 제 글솜씨가 부족해서
매번 길어지고 맙니다.

양치기 소년 같지만 이제, 정말 줄여보려 합니다.

시간을 내어, 꾸준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_(^)
여러분의 귀한 시선 덕에, 저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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