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감정의 그늘에서 자란다
평온 속에서는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통은 살을 에지만 멈추게 한다. 그것이 성찰의 시작이 아닐까. 병, 상실, 실패 같은 고통의 경험은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내게 묻는다.
아파서, 외롭지 않으냐고.
외로울 때도 있었다. 가장 외로웠던 순간은 고통을 말로 옮길 수 없던 때였다.
몸이 아프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음이 문을 닫았다.
말을 꺼내려할 때마다 마음의 바람 한 줄기가 먼저 사라졌다. 그래서 아픔보다 그 아픔을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외로움은 함께의 부재가 아니라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 닿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고통은 상처가 아니라
전해지지 못한 마음의 이름이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가닿지 못한 마음이었다.
내게 그 시간은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삶을 다시 정의하는 귀한 기회였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평범한 날이 그렇게 달큼하고 귀중하게 느껴졌다.
인식이 바뀌자 태도가 바뀌었다. 고통은 공감 능력을 확장시켰다.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의 아픔이 남 일 같지 않았다.
흔히 고통은 어둠, 슬픔, 좌절과 연결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깊은 고통을 지나온 사람일수록 세상을 더 밝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놓인다. 말없이 있어도 위로가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느낌이 든다. 나는 언제나 밝은 사람은 아니어서 예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어둠 덕분에 나는 진짜 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 어둠을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주치의 선생님. 그분 앞에만 서면 왠지 무서울 게 없었다. 그래서 치료를 오래, 깊이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진짜로 안전하다고 느꼈다.
“구름을 보세요. 다 지나갑니다. 이 지구별은 안전하고 평온합니다.”
처음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말처럼 느껴졌지만, 그 말 뒤에는 깊은 연민과 단단한 신념이 있었다. 아마 누구보다도 깊은 고통을 지나왔기에, 자신에게 온 환자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너진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버텨낸 그 어둠을 당신은 혼자 걷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당신의 고통을 내가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결말만은 꼭 믿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원장님이 어떻게든 그 말을 전하려 애쓰던 심오한 표정이 문득 떠오른다. 왜 모든 것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걸까. 감정은 왜 이렇게 인지를 압도하는 걸까. 감정이 식은 뒤에야, 비로소 나에게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는 지금. 당시에는 ‘최악’이라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전환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환하다는 말을 이제 나는 믿게 되었다.
TO. 고통과 감정에게
내 몸이 아프기 시작한 건, 마음이 오래전부터 부서져 있었음을 간과했기 때문이었어. 말하지 못한 슬픔과 참아낸 분노, 숨죽여 삼킨 절망 같은 것들이 잊힌 편지처럼 몸속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희 둘은 통증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지. 처음엔 단순 근육통, 두통, 소화불량인 줄 알았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삶의 구석구석을 누르던 감정들이 물리적 형태로 바뀌어 몸의 언어로 울고 있었지. 늦게 알아차려서 미안해. 너희들은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 같았어.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고통은 끝없이 되돌아오더라. 억눌린 마음은 언제나 다른 얼굴을 하고 다시 찾아왔어.
그래서 치유란 단순히 몸의 일부를 고치는 일이 아니라, 몸을 만든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고 부드럽게 다시 짜는 일이더라. 솔직히 말하면, 너희는 정말 까다롭고 어려웠어. 오랜 시간 내가 고통 속에 있었던 건 내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말하던 순간들이 사실 내 몸에겐 “이건 너무 아파요”였던 거야.
그래서 고통 너라는 존재는 ‘나를 오래도록 이해받지 못한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아픔은 내가 잃은 무언가의 흔적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려 속삭이는 것 같았어.
치유는 그 시간들을 다시 쓰는 일이고, 그리하여 나의 감정이 더 이상 숨지 않고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인지도 몰라. 그렇게 우리 인간은 몸을 회복하며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나 보다. 너희가 내 몸 안으로 급하게 들어섰을 때 나는 낯선 그림자를 들여다보듯 숨을 죽였지.
너희는 알까? 모르면 지금이라도 좀 알아줘라. 피부를 통과해 어둠이 번져오는 걸 지켜보는 것처럼 나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어. 실체가 있다면 혼줄 내주고 싶었는데 그 일이 겨우 며칠 전 일인 것만 같아.
처음엔 믿을 수 없었어.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거칠고, 무엇보다 날카로웠거든.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몰랐어. 기억을 되짚어도 아무런 경고도 조짐도 없었으니까. 그냥 어느 날, 내 몸 어딘가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어.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확실히 떨렸지.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 심지어 나조차도...그건 감정이었고, 고통이었고, 말이 되기 전의 비명 같은 것이었어.
너희가 내 몸과 마음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흘리고, 숨 쉬는 것조차 어색했어. 내가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겠어? 그런데 있잖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너희는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데 처음엔 정말 저주했고, 떨쳐내려 애썼고, 없애버리고 싶어서 입술을 깨물고 울던 밤도 많았지.
너희가 내 몸속을 헤집을 때마다 나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로 외쳤어. 제발 좀 꺼지라고, 왜 하필 나냐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등이 젖도록 아팠고, 그 아픔이 감정으로 바뀌는 걸 느끼며 나는 점점 무너졌지만, 가끔씩 중얼거리기도 했어. 미안 미안.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 고통에게 미안하다니. 하지만 진심이야. 너희가 오고 나서야 나는 내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알았거든. 생존은 곧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숨 쉬고, 밥 먹고, 하루를 보냈지만, 내 시간은 고여 있었고 모든 감각은 마비된 듯했어. 고통 너는 그것을 흔들어 깨웠지. 살아 있는 몸에 스며든 너로 인해 잊고 있던 내 형상이 드러났어. 아픔이 있었고, 아픔보다 먼저 멈춤이 있었어. 나는 멈췄고, 그제야 ‘나’를 보게 되었단다.
게으르다고 부르기엔 너무 억울했어. 무의식 깊은 곳에 나를 봉인하며 살아온 결과였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나를 게을리한 게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줘. 딱딱하게 굳은 껍질 속에 꼭 감춰두고 있었던 거야. 안 보려 했고, 느끼지 않으려 했고, 그렇게 나를 방치하면서도 살아 있다고 믿었어. 고통이 그러더라.
“너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고민했고 살아 있는 듯 느꼈어. 맑은 날의 시작이었지.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겼던 나. 삶의 속도에 쫓기느라 내 목소리를 외면했던 나. 그 모든 것을 고통이 가르쳐줬어. 좀 더 빠르고 쉽게 가르쳐주면 좋았을 텐데! 쳇! 그래도 괜찮아. 다 괜찮아. 너희는 나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니까.
나를 일깨우러 온 것임을 이제야 알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 나는 아프면서야 비로소 삶을 느꼈고, 죽음과 닮은 통증 속에서 진짜 살아 있음을 자각했어. 그러니 너희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 셈이야. “이대로 살아도 괜찮겠어?” 그 질문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어. 아팠지만, 진심으로 고마워. 내가 다시 나로 살아가게 해 줘서.
고통은 감정의 다른 얼굴이고, 감정은 고통이 말하고 싶어 했던 오래된 이야기였어. 몸이 먼저 알아채고, 마음은 나중에야 그 뜻을 해석했으니. 그 오래된 언어를 듣기까지 자주 아프고, 그만큼 천천히 이해했어. 이제는 너희에 대해 조금 더 알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려 했던 거지? 맞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내가 너무 오래 무시한 결과,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니라 고막을 뚫을 듯 소리치며 “이제 그만 보라, 이제 좀 들어보라” 하고 있던 거야. 너를 피하려던 시간이 내 생의 가장 외로운 시간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 ‘너를 없애야만 존재할 수 있는 나’였고 그래서 늘 불안했지.
너는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너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함께 있다는 말, 동행이라는 말이 너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이제 이해해. 너희는 가끔 아프게 하지만 이제는 그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너희 이름을 부르며 한참 가만히 있기도 해. 너희 울음을 내 울음처럼 느끼기도 해.
언젠가는 너희 모두 잠잠해져서 다시는 나를 흔들지 않기를 바랐던 시절도 있었지. 이제는 그런 바람마저 내려놓았어.
너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고 해.
아주 천천히, 오래 보고 싶어. 너희들도 나만큼 특별하잖아.
고통아. 감정아. 이제는 알아. 너희는 내게서 뺏으려는 존재가 아니라 내게서 잊힌 것들을 되돌려주러 온 것이었다는 걸. 너를 안고 나는 나를 안아. 이 편지는 아마 평생 끝나지 않겠지.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한 줄 접을래. 너와 나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마음이 먼저 나았다고 인지한 날, 감정의 뿌리까지 닿는 어떤 울림이 지나간 뒤였다. 무언가가 무너지고, 또 다른 무언가가 천천히 피어났다.
고통은 생명이자
순환이고, 흐름이다.
그래서 뚝 끊기거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자리를 옮기고, 형태를 바꾼다. 이파리처럼, 물가처럼 그렇게 푸르게 물러난다. 언뜻 강하게 치고 들어왔던 통증도 그렇게 스며들 듯 사그라든다. 그때부터 주사 한 방, 재활의 작은 움직임이 기적처럼 내 몸에 닿았다. 말이 통했고, 몸이 반응했다. 되돌아온 삶이었다. 그 시간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몸은 마음을 따라 자란다는 것을 알았다.
아물지 못한 감정은 살을 뚫고 피어나는 통증이 된다는 것을.
회복은 언제나 마음의 문 하나가 열리는 일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2024년 2월, 회복의 문이 처음 열리던 겨울의 끝자락에서.
2024년 2월, 주치의 선생님께서 '맨발 걷기, 뭐가 맞는 거죠?'라는 책을 출간하시며 출판기념회에 나를 초대해 주셨다. 진료실 밖, 또 다른 모습으로 마주한 원장님은 여전히 몸과 삶을 함께 바라보는 분이었다. 자신의 주사 치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많은 환자들이 즐거운 외부 활동을 더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의사라면...
낫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몸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데 집중하시는 원장님은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늘 말씀하신다.
몸을 위한 주사가 있다면 마음을 위한 처방은 바로 ‘활동’이 아닐까. 심리적 자율성과 긍정적 움직임!
삶의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든 부드러운 빛줄기. 어둠을 뚫고 살며시 피어오르는 새벽의 여린 숨결.
고난은 새로운 날의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