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이유
2024년 3월 20일 수요일.
먼저 2차 병원에서 ‘섬유근육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류마티스 내과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진통제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절망과 허무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무리 버텨도, 아무리 참아도 해답이 없는 고통이라니.
그나마 의사 선생님은 위로인지, 현실의 처방인지
EBS 명의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찾아보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절규하듯 매달리자, 전국에 섬유근육통으로 입원이 가능한 병원이 단 두 곳 있다며 적어 주셨다.
하지만 대구에서 그 병원들까지 가기엔 현실이라는 벽이 너무 높았다. 가족들도, 주변 사람들도 “지나가는 병이겠지!!” “너무 멀다!!” 하며 말렸다.
그날 이후, 마음에 막막함이 그득히 자리 잡았다.
내 고통을 믿어주는 이도, 해결해 주는 이도 없다는 사실이 없다는 게 사무치게 외로웠다.
말라가는 식물처럼 빛을 원망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실제 의사가 적어준 메모.
당시 인스타에도 올렸기에 사진이 남아있다.
치료를 받아야 할 기간이었건만 정작 다니던 병원에 갈 수조차 없을 만큼 몸이 무너져 있었다.
입맛도, 기운도 바닥을 쳐 밥 한 숟갈 넘기지 못한 채 웅크린 자세로 누워 과자 몇 조각으로 겨우 생명을 붙잡던 날들. 배가 고픈 건지, 고통이 허기를 덮은 건지조차 이젠 잘 모르겠는 서글픈 며칠이었다.
무기력해서 아픈 건지, 아파서 무기력한 건지 그 경계는 늘 흐릿했다.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설마 이보다 더 아플 수 있을까” 싶지만 늘 그 예상을 비웃듯 더 깊고 더 날카로워지는 고통!! 아픔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매번 새 얼굴로 나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그렇게 버티다 겨우 조금 숨이 트이는 날이었다.
“이제는 꼭 병원에 가야겠다” 마음먹었고 하필 또 그날이 주치의 선생님이 휴진일이었다. 서둘러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거기서는 류마티스 내과로 가보라며 다시 다른 병원을 안내받았고 나는 그날 하루,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꺼이꺼이 울며 도시 한복판을 뺑뺑이 돌았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치료를 받기 위한 여정마저 이토록 험난할 줄은.
2403 그날의 기록
입원은 회복이 아니라 늪일 수 있어요
파**병원 류마티스 선생님은 주치의 선생님처럼 요즘 같은 시대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진심 어린 태도를 지닌 분이었다. 진료 대기만 2시간이 넘었다. 기다림에 지쳐 병원 구석 뒷자리에 반쯤 몸을 누인 채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을 때 간호사님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과장님, 상담이 좀 길어요. 기다리기 힘드시죠?”
그 말속엔 미안함은 물론, 의사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담겨 있었다. 그 신뢰는 곧 내 몫이 되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는 내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요즘 얼마나 힘드셨냐고, 지금 말고 과거는 또 어땠냐고.
“다 이야기해 보세요.”
나는 감정이 북받쳐 차분하게 풀어내지 못했다. 현재 다니는 병원이 있음을 말하면서도, 정말 너무 아파
죽기 직전 같은 날들을 견디고 있다고 거칠게 쏟아냈다. 그럼에도 의사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상담을 계속하겠다는 태도로 차분히 내 이야기를 기다려주셨다.
그날, 내가 마지막 환자였던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바쁘실 텐데 상담은 괜찮다고,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당장 입원을 원한다고 말했을 때도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입원이 필요해 보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진통제뿐 마땅한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입원은 자칫하면 늪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입원이 회복이 아니라 ‘늪’이라니.
내가 원한 건 숨을 고를 수 있는 잠시의 쉼이었는데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낯설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우선은 마음을 돌보는 게 중요합니다.”
발끈할 뻔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아님을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데...
하지만 이내, 나는 이미 수개월 동안 주치의 선생님과 꾸준히 ‘마음의 치료’를 병행해 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무너진 건지, 마음이 아파서 몸이 무너진 건지, 혼란스러웠던 시간 속에서도, 그분의 흔들림 없는 태도는 내게 분명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힘들 때마다 나는 문득문득 그 따뜻한 말투와 눈빛을 떠올렸다. 그 기억 하나로 가장 밑바닥에서 겨우 숨을 붙잡을 수 있었던 날도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통증도 고통이었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건 무기력함이었다. 대개 통증은 하루 종일 이어지지 않지만 그때는 일주일 내내 하루 20시간 가까이 아팠다. 통증은 형태도, 색도 제각각이었다.
날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물어뜯었다. 지치고, 또 지쳤다.
‘포기’라는 단어가 이따금 입안에서 맴돌았다.
지금 돌아보면 고통이 이토록 다채로웠듯 행복도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다채로운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고통을 세밀하게 느끼면서도 행복이라는 감정은 하나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분이 나를 '한 사람'으로 바라봐준
단 한 번의 시선이 큰 위안이 되었는지를 떠올리면 그 또한 행복이었다.
견딘다는 건 멈춘 게 아니야
나는 내 몸 안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병원에 다녀온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퍼져버렸다. 몸은 녹아내리듯 무거웠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컨디션은 1.5배쯤 더 안 좋아졌다. 겉보기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 모든 검사 결과는 멀쩡했지만 몸은 텅 빈 전등처럼 꺼져 있었고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가만히 숨 쉬는 일조차 힘겨웠다. 무기력은 통증보다 더 깊었다. 몸이 아니라 의지가 망가진 것 같았다.
다시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도, 발걸음도 오래된 문짝처럼 삐걱이며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고통은 전조였을 뿐이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예감이 살결을 타고 기어 다니는 냉기처럼 온몸을 감쌌다.
"정말 이 개고생은 끝나는 걸까."
이 말이 목울대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끝내 손을 뻗지 않았다. 불안은 이유 없이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그건...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미 자라고 있던 감정에 내가 너무 늦게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날들이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나는 응고된 물처럼 아프게 고여 있었다.
그 자리에 붙박인 시간들.
평온하지 않았던 나날들.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달랐다는 걸 지금에서야, 너무 늦은 깨달음처럼 알게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던 그 시간들도 무언가는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삶은 묵묵히, 스스로를 다시 조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야 그 사실을 안다는 게 다행인지, 쓸쓸한 위로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는 여전히 여기 있고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단숨에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견디는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자란다.
그것이 내가 그 시간에서 배웠던 단 하나의 진실이다.
고통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통증을 겪으면서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도 무심해지지 않게 되었다. 예전엔 크게 알지 못했다. 아픈 사람이 하루하루를 어떤 결심과 버티는 힘으로 이어가는지를. 오랜 시간 아픈 가족들이 곁에 있었지만 그 무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이따금씩 내 가슴을 후벼 파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그 누구의 아픔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육체는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버티고 싶어도, 일어나고 싶어도 어떤 날은 그냥 그대로 무너진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이 몸 안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지만 그 인정 이후에야 비로소 나의 진짜 삶이 시작되었다.
희망도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극심한 고통을 겪은 이에게 ‘희망’은 더 이상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통증이 덜한 하루, 숨이 조금 더 편히 쉬어지는 순간들.
그 작고 여린 찰나들이 내겐 진짜 희망이었다.
비록 찬란하지 않아도, 작은 희망.
“몸이 아픈데 무슨 희망이냐”라고 묻는다면 오늘도 이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나 자신 그 자체가 바로 희망이다.
2024년 3월 25일 월요일 / 드디어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병원 복도를 걷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 곳이 있다. 그 코너엔, 늘 그 자리에 있는 기린 인형 하나가 서 있다. 처음엔 그냥 아이들을 위한 장식인 줄 알았다. 병원 특유의 무거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의도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인형을 쓰다듬었다.
길게 뻗은 목.
무언가를 애써 바라보는 듯한 자세.
묵묵히 서 있는 몸.
말은 없지만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얼굴.
그 모습이 꼭 나를 닮아 있었다.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목을 길게 빼고, 눈을 부릅뜨고,
더 멀리 보려고 애쓰며.
조금이라도 더 잘 버티려고 애쓰며.
사실은 너무 고파서.
내가 누구인지, 정말 알고 싶어서.
그렇게 발버둥 치듯 바라봤다.
하지만 그건 알아차리기 어려운 몸짓이었다. 나는 그냥 서 있었고 기린처럼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처럼만 보였을 뿐이었다.
왜 나는 늘 그렇게 뻗어 있어야 했을까. 왜 이토록 간절히 보고 싶어 했을까.
내 가슴을 그저 안아주는 용도로 써도 되었을 텐데.
나는 왜 자꾸만 그 가슴을 찢고, 터뜨리는 데만 써왔을까.
내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하고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머리를 왜 나는 나를 찌르는 말들로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말.
“이따위로 쓴 내가 너무 부끄럽다.”
그때 조용히 말이 들렸다.
“그럼 이제부터는 잘 쓰면 되잖아.”
그래! 이제는 내 머리를, 내 가슴을 다시 안아주자. 다시 바라보자. 이제는 나를 살리는 데 쓰자.
기린은 말이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말을 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말보다는 존재로 위로가 되는 사람.
멀리 보되, 지금 여기를 잊지 않는 사람.
부끄러움 속에서도 다시 나를 알아보려는 사람.
기린 인형처럼.
나는 지금, 나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조금 더 따뜻한 쪽으로.
조금 더 나를 살리는 방향으로.
원장님은 먼저 묻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여셨다.
“그동안 왜 오지 못했는지 말해보세요.”
"얼굴이 안 좋네요. 많이 힘드셨어요?"
나는 말이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으로 구구절절 설명드렸다. 밥을 못 먹고 과자로 겨우 끼니를 때웠던 날들, 움직일 수 없었던 통증의 날들, 다른 병원에서 뺑뺑이 돌았던 이야기들. 원장님은 내가 말하는 내내 아무 말이 없으셨다.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듣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무 말 없이도 이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의사는 이젠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다는 듯한, 약간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따뜻해서 아팠고 단호해서 고마웠다.
“이제부터는 자율신경실조증 치료를 시작합시다.”
떨어진 기력은 수액으로라도 채워보자고 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겨우 마음의 가장자리를 붙든 채 고통과 희망을 안쪽에서 버무리고 있었다.
섞이지는 않더라도 흘러내리지 않게.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그리고 내 마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차트를 넘겨보던 손이 멈췄다.
“2018년에 한 번 하신 적이 있네요.
오히려 그때보다 수치가 조금 더 나아졌어요.”
“네? 그때는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는데요.”
나는 얼떨결에 되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화면을 가리키며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보이시죠? 지금은 수치가 하한선보다도 더 떨어져 있고 무엇보다 잠재력, 그러니까 체력이 고갈돼 있어요. 이게 교감신경이에요."
“어떤 거요? 빨간 선이요?”
“네."
"반대로 부교감신경은 올라가 있으면 소화도 잘 되고 잠도 잘 자고 몸이 편안해요.
그런데 그게 지나치게 높으면 또 무기력해지기도 하죠."
내가 숨을 삼키자, 조금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건 스트레스 검사예요.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자율신경계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는 거죠. 완전히 균형 잡힌 상태는 아니지만 그때보다는 그나마 조금 나아요.”
그리고는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덧붙였다.
“중요한 건 잠재력이에요. 스트레스를 이겨낼 힘이 지금 ***님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느냐.
같은 상황이라도 그걸 감당할 여력이 있는 사람과 고갈된 상태의 사람은 다르게 느껴요.
지금 훨씬 더 힘든 건 ***님의 잠재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뜻이에요.”
찍어둔 동영상을 다시 보며 이토록 쉽게 설명해 주셨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그 순간, 의사들의 고충이 느껴졌다. 자신이 배운 것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그 시절, 유독 목이 아팠다. 날개뼈 사이가 욱신거렸고 등줄기를 따라 통증이 기어 다녔다. 말하지 못하는 아픔을 글로라도 남기고 싶어서 일기장처럼 블로그에 글을 쓰곤 했다. 이웃도 열 명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문자 수가 200명을 넘겼다. 끄적인 고통의 기록에 낯선 누군가가 조용히 다녀갔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덜 외롭게 했다. 등줄기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서글펐다.
도수치료를 받던 중, 통증이 너무 심해 결국 치료를 중단하고 울음을 터뜨렸던 날이 있었다. 며칠 뒤, 치료사 선생님이 내 차트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 안에 적힌 한 줄에 빵 터지고 말았다. ㅋㅋ
"등 부위 통증이 심함. 치료 도중 울었음"
실망이 준 선물, 더 나은 치료자를 만나다
고관절이 말끔히 회복된 뒤, 걷는 일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끔 주저앉고, 휘청이고, 시큰거림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이제 이쯤이면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통증이었다.
그런데 꼭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다른 증상들이 사방에서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불쑥 오른 열이었다. 내과 진료실로 향하며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고 기대했다.
한 발자국 다가간 줄 알았는데 두 발자국 밀려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의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진료’라는 이름 아래 기대의 붕괴였다. 그리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은근하고도 깊은 박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병원을 찾는 사람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기회와 시간, 최소한의 상호작용을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그 기대를 채 다 펴보기도 전에 꺾였다. 문턱을 넘자마자 들어오는 것도 실수인 양 제지당했고 의자에 앉을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물리적인 ‘앉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환영받지 못했다는 느낌!!
그것이 더 큰 상처였다.
진료비는 삼천 얼마였던 걸로 기억한다. 액수로는 소소했지만 대가 없이 소멸된 비용이라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아깝게 느껴졌다. 어떤 설명도, 최소한의 소통도 없이 치러진 비용은 일종의 정신적 손실이었다. ‘삼천 얼마’는 그날의 실망을 상징하는 숫자로 남았고 한동안 내 마음속에 불합리함의 기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 않은 것이 행운이었다. 내 병을 불편해했던 그분이라면 어떤 설명도, 어떤 판단도 성의 있게 이뤄졌을 리 없다. 그날의 퇴짜는 나를 보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의료 서비스는 단순한 시술이 아니라 관계 기반의 신뢰 행위다. 그렇다면 진료비를 받았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증명이지 않을까. 환자가 앉지도,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면 제공된 진료라 보기 어려워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날의 경험은 내가 금전적 손해를 봤다기보다는, 잘못된 관계에서 빠르게 나올 수 있었던 기회였다. 억울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의외의 형태로 전환된다.
불친절한 진료실은 나를 돌려세웠고 덕분에 나는 더 나은 치료자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기대가 부서진 자리에 눈부신 안도가 찾아왔다.
섬근통이 아닌, 자율 신경 실조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고관절이 회복되며 신나게 돌아다녔던 그 시절.
주치의 선생님은 슈퍼맨입니다
2018년도의 일화다. 병원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옷을 분실한 적이 있다. 누가 정말 훔쳐간 건지, 실수로 치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청소 여사님까지 세탁실 구석구석까지 나서서 찾아주셨지만 옷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병원 안은 작은 소동으로 뒤숭숭했다.
할 수 없이 환자복을 입은 채 병원 엘리베이터에 서 있었다. 마침 퇴근하시려던 원장님과 마주쳤다. 환자복을 어떻게 입고 가시냐며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진료실로 가시더니 아무렇지 않게 본인의 옷을 내어주셨다. 하얀 바탕에 빨간색 선이 선명하게 그려진 아디** 트레이닝복이었다. 떡볶이 국물을 지우느라 애 좀 먹었지만ㅎㅎ 잘 입었다는 말과 함께 돌려드렸다.
그 옷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건 신기하게도 나 역시 똑같은 옷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진료 시 당시 함께 있었던 관리자분이 나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옷은 얼마짜리냐고 물으셨다.ㅎㅎ 노스*이스 신상 운동복 티셔츠였는데 싸구려라고 했다. 그랬더니 스타*스 커피 3만 원짜리 쿠폰을 주셔서 신나게 사 먹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로나로 병원이 멈췄던 어느 날엔 끝까지 마무리 치료를 못 해준 게 마음에 걸린다며 미안하다고 직접 전화를 주셨다.
“다음에 다시 오시게 되면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릴게요.”
그때 나는 서울의 한 한의원에 있었다. 점심시간을 쪼개 잠깐 진료를 받던 중이었다. 괜히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속도 없이 치료 인증샷까지 찍어 보내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분의 마음이 내 통증보다 더 따뜻하게 다가왔기에.
대구는 평소 비가 잘 오지 않던 곳으로 기억되지만 그 시절만큼은 왜 그렇게 비가 잦았는지. 내 마음을 따라오는 것처럼 유난히 자주 비가 내렸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던 날은 우산을 건네주셨다.
환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먼저 손을 내미는 마음은 어떤 매뉴얼에도 없는 일이다.
그건 ‘진심’이고 ‘사람’이다.
작은 배려가 누군가의 인생에 오래도록 남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마음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된다.
늘 해프닝이 있을 때마다 어쩌다 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계셨다. 원장님은 내게 슈퍼맨 같았다.
진짜 슈퍼맨은 모든 걸 다 해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걸 감당하려 애쓰는 존재라서 특별하다. 삶에서 버겁고 힘든 순간을 이겨내려 할 때 우리 모두는 ‘슈퍼맨 같은 사람’ 일 수 있다. 슈퍼맨은 뭐든 다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든 걸 감당하려고 애쓰는 사람에 더 가깝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그래서 더 공감이 된다.
다시 그분의 인스타를 보았다.
그때 나는 병과 싸운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었고 이길 수도 없었다.
함께 견디는 일이었다.
지금 나는 거기서 벗어나 있다.
붙잡히지 않는다.
그분의 바람처럼.
나는 어느새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자율신경치료 5회 차 치료 후 결과 영상(1.5배속)
자율신경 실조증?? 그게 뭐죠?
입 안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게 대체 뭘까. 생전 처음 듣는 낯선 병명.
이제는 정말 내 몸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시간이 다가왔나 보다.
아래는 2024년 12월, 치료가 끝난 뒤, 주치의 선생님께서 자신의 브런치에 직접 적어주신 이야기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 회복의 기록을 누군가와 나누기로 결심한 것도 모두 그분 덕분이다.
아팠던 나에게 위로가 필요했듯,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조금은 촉촉한 위로로 닿기를 바란다.
다 나아진 건 아니지만 나는 지금, 예전보다 조금 더 나를 잘 안다. 조금 더 나를 아낀다.
그것이면 이 회복은 분명 의미가 있다.
행복한 H 병원 김정훈 병원장님 브런치
https://brunch.co.kr/@nothing8/238
자율신경실조증은 몸의 자율신경계가 균형을 잃어 다양한 신체 증상을 일으키는 상태.
심장 두근거림, 어지럼증, 소화불량, 불면 등 여러 증상이 나타나지만 뚜렷한 원인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스트레스, 과로, 감정 억압, 심리적/신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