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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율신경 실조증' 환자가 되었다

회복은 함께 만들어진다(서로를 붙든 시간)

by 미리나


2024년 3월 어느 날 진료실.


파○마 병원 순례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온 날, 주치의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어떤 게 가장 불편하고 힘드세요?”


"원장님, 지금 이건 불편이 아니에요. 너무 아파요ㅠㅠ"



대부분의 의사들이 "불편하세요?"라고 묻는다.

증상을 묻는 말이자 주관적인 고통을 객관화하기 위한 진료 언어이다. 특히 자율신경실조증이나 만성 통증처럼 정확한 위치나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병의 경우 너무 아프다는 말은 기록으로 남기기엔 모호할 테니까.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의 말을 최대한 임상적인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 같다.

10점 중 몇 점인지, 통증지수, 불편감, 압통, 작열감... 그렇게.


그런데 나는 그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불편”이라는 말은 평이하게 들렸다. 마치 내 고통을 거리 두기 된 채 요약되어 반올림해 버린 것만 같았다. 통증은 여전히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당신의 고통이 내 언어의 범주안에는 없다는 느낌이었다.


의사는 진심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고 불편이라는 표현은 그저 주관적인 “아픔”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의사의 진심과 정확한 진단을 위한 절차라는 것도.


극심한 통증 속에선 너무 아프면 어디가 아픈지 말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날의 고통은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너무 고통인데 불편이 아닌데 하고 말이다.


고통을 잘 말한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내가 주치의 선생님께 "미치겠어요, 죽겠어요, 죽고 싶어요." 표현했던 이유는 통증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고통이 진짜라는 것과 알아주고 믿어달라는 절규였다.


자율신경실조증이나 만성 통증 환자의 경우 의사 선생님들도 정확한 위치나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 것 같다. 환자가 '정말 아프다'라고 말해도 그 말을 의학적으로 언어로 번역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은 객관화된 표현을 찾아 적으려 애쓰고 첫 질문은 늘 같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내 주치의 선생님은 좀 특별하셔서 언제 어떻게 아픈지 세세히 물은 다음, 가장 불편한 곳을 손으로 짚어보라고 하신다.


어느 날은 점심 뭐 먹었냐고 묻더니 “햄버거요!”라는 말에 진짜로 수기 차트에 '햄버거'라고 적으셨다.ㅎㅎ
“그걸 진짜 적으세요?” 하고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삭제됐는지 지금은 없다.

사실 많은 환자들이 “아파서 미치겠어요”라고 말해도 치료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정은 남는다.
초기에는 나도 잘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율신경이 조절되기 시작하면서 나도 내 고통을 덜 절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 ‘이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받지 못했다’는 감정적 거리감을 느낀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그 간극은 서로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조금씩 설명하고 들어주는 것으로도 좁혀질 수 있다.


고통은 고통스럽게 꺼내놓을 필요는 없다.
고통이란 원래 그 자체로 충분히 무겁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말하는 건 포장이 아니라, 고통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나는 늘 다급하고 산만한 말투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더 잘 전달될 텐데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 때문인지, 통증이 강해서 인지, 내 기분 탓인지 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말'은 다리를 놓는 일이다. 그 다리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차분히 놓아야 한다.

고통을 잘 말한다는 건 그 고통을 잘 살펴봤다는 뜻이고 살펴본 고통은 조금은 덜 낯설어질 수 있다.


고통을 견디는 대신, 들여다보기


원장님은 내 말과 언어를 적재적소에 맞게 고쳐주곤 했다. 처음엔 당황했고 이내 그 말들을 오래 씹었다.

말보다 더 깊은 어떤 의미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걸.

감정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조금만 다정하게 바라보자 잎맥처럼 자신의 결을 드러냈다.


고통!! 나는 너무 아팠고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그 말속에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마도 늘 해오던, 익숙한 진료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상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조차 버겁고 숨과 의지, 체온이 나를 떠나는 느낌이었다.


통증의 언어는 그렇게 종종 어긋났다. 그러나 주치의 선생님은 처음부터 다르게 나를 대했다.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밥은 언제 먹었는지, 잠은 몇 시에 들고 일어났는지, 어제의 기분은 어땠는지, 불안은 없었는지.

최근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이었는지.


주말엔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으며 그때 기분은 어땠는지, 그리고 다음 주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대답하는 사이 조금씩 살아있는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의사에게서 그런 질문들은 낯설었지만 비로소 "살아 있는 나"를 조금씩 만지게 되었다. 고통뿐인 하루 속, 기억의 어느 구석에 남아 있던 온기 같은 것을.


치유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검색을 해보니 자율신경실조증은 스트레스, 호르몬, 체질, 환경 같은 수많은 요소가 얽힌 병이었다. 딱 떨어지는 원인도 없고, 증상은 복잡했다. 내 몸도 그랬다. 설명하기 힘든 통증이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었고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출렁였다.

면담을 하던 중 안타까운 표정으로 원장님이 문득 말씀하셨다. “아이쿠, 쯧쯧.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가 좀 더..." 뒤에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환자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는 분이 나의 주치의라서 자랑스럽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고통에 무뎌지지 않는 사람.

차트보다 나를 먼저 보는 사람.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놀라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사람.


세상이 바쁘고 병원이 쉴 틈 없어도 내 아픔 앞에 잠시 멈춰 마음을 내어준 사람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게 너무 깊었다.


몇 마디 말보다 몇 줄 짧은 한숨과 추임새 속에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나는 지금 다 기억할 순 없어도 그때 원장님이 뒤에 무슨 말을 하려다 삼켰는지 안다.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챘어야 했는데.”
“이렇게까지 힘들었는지 몰랐어요.”
그런 마음들이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원장님! 지금까지 이렇게 복잡한 증상을 가진 저를 받아주신 게 어디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얘기를 안 한 거죠.”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치료가 잘 될 거란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음과 함께 불안도 따라왔다. 나는 또다시 고통을 꺼내놓았고, 무섭다고, 너무 힘들다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원장님은 안경 너머로 잠시 눈을 비비시더니 두 눈에 힘을 담고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쳐주겠다고요. 만약 3주 이상 통증이 지속시 입원을 하던, 그건 그때가서...3주만 믿고 함께 치료해 봅시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닌, 선언 같았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섬유 근육통은 3개월 이상 지속된 통증이 있어야 하며 같은 부위가 3개월 넘게 아프다고 해서 섬유근육통으로 단정하진 않고 전신의 통증 양상, 수면의 질, 피로, 우울감 같은 증상들도 함께 봐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입원이 늪이면 입원을 왜 하느냐고 차분히 되물으셨다. 의사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건 마치 내가 아직 몸보다 마음에 갇혀 있다는 걸 간파한 얼굴이었다.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내 속마음을 그 표정이 먼저 읽어낸 것 같았다.


원장님과 2024년 4월, 본격적인 자율신경치료를 하게 되면서 치료는 의사와 환자의 협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 뒤, 불편한 증상을 수십 가지 더 잘 꺼내놓게 되었다.


암재활도 하시지만 자율신경 및 통증 보는 의사에게(^^;) 정신과 약이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하고, 두통이 있다고도 하고, 알레르기가 생겼다고도, 잠을 못 잔다고도 말했다. 절박뇨가 느껴진다고, 소화가 안 된다고, 그렇게 하나씩 말을 꺼낼수록 병보다 마음이 먼저 나아졌다.


이제 말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환자를 알고 싶어 하는 이분에게는 특히, 더 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이 늦어졌다고 해서 치료가 늦어졌다고 속상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치료를 통해 7년을 고생하던 목디스크 통증, 등줄기, 날개뼈 통증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게 아팠던 그 통증이 말도 안 되게 사라졌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아팠던 곳부터 먼저 낫게 해 줄게. 이제 조금은 살 수 있게 해 줄게.”


신은 나에게 가장 아팠던 것을 먼저 치료라도 하라는 듯 시간을 내어준 것 같았다.


아픔은 제 이름을 찾을 때 사라지기 시작하고 치유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때부터 원장님은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갔고 나도 원장님을 더 파헤쳐 보기 시작했다. 병원 유튜브도 거의 다 보았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다. 이 분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표정으로 환자들을 대하는지. 진료실 밖에서는 통증을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이 의사의 진심이 나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건네는 태도였기에 틈날 때마다 의학지식들도 감사히 보았다.


영상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병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언어,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 그리고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깊은지.


치료를 맡긴 사람을 더욱 믿고 싶었다.

의사가 환자만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환자도 이 의사가 어떤 마음으로 진료하는 사람인지 어떤 눈으로 아픔을 바라보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마음을 알게 되자 치료는 더는 두렵지 않았고 함께 걸어가는 동행이 되었다.


내가 스스로를 꺼내놓을 때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회복의 길.


내가 아팠던 건 단순한 신경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하지 못했던 오랜 시간, 믿지 못했던 관계들, 듣지 못한 위로들 속에서 조금씩 굳어져 있었다.


치유는 몸을 고치는 것 이상이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때,
그 사람 앞에서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낄 때,
아픔은 비로소 제 이름을 찾는다.


이름을 가진 고통은 조금씩 사라질 준비를 한다.


그날 진료실을 나오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이제야 내가 나를 온전히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프지 않은 날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침묵했던 감정들이 말이 되어 나올 때마다 나는 다시 살아지고 있었다.


치유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나는 “괜찮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그 길 위에 나는 지금도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걷는 사람의 눈빛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처음엔 통증이 없었다. 기분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흐릿한 감정들이 물아래 돌처럼 눌려서 말로 표현되지 못하고 의식 위로 떠오르지 못한 감정들이 무겁게 쌓여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것들, 울지 않은 시간들이 몸속으로 걸어 들어와 신체화로 나타나 신경을 누르고 살을 밀었다.

나는 오래도록 나를 돌보지 않았다. 지켜보지 않았고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통증은 아무리 밀어내고 저항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흔적이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남는 것이기 때문에.


주사보다 깊게 박힌 말 한마디


이 날 치료가 잘 될 거라는 확신이 99.9%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0.1%조차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절실한 믿음과 불안한 사이의 팽팽한 줄타기는 그 시절 내 주특기였으니까.


물리적으로도, 마음으로도 숨조차 어려웠던 그날.
의사의 눈빛에서 무언가가 번쩍 스쳤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아닌, 확신이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반드시 나아집니다."

나는 그 눈빛에 붙잡혔다. 기댈 수 있겠다는 느낌!!

마지막 힘 하나가 꼴깍! 삼켜지듯 모여들었다.

나도 눈을 들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내 마음을 걸며 그분과 내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만큼은 통증도 불안도 사라진 듯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있던 내 몸은 그 순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대신, 집중 치료를 해야 합니다.”


아픈 부위에 주사가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 짧은 틈을 타듯 의사는 말을 이었다.


“서울엔 언제 가세요?”


나는 '통증'에 몰두해 있었고 의사는 '계획'에 몰두해 있었다. 아픔은 중요하지 않은 듯 다음 단계를 말하고 있었다. 그날, 의사는 몸을 뚫고 말까지 주입했다. 주사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건 그분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이제 치료를 중단하면 안 되고 집중치료 하셔야 되는데."


한 번이 아니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목디스크 치료할 때는

이 정도까지 말씀 안 하셨는데... 이상했다.



힘든 치료의 슬럼프를 지나며 지금 포기할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1년이 지난 지금에야 드는 생각은 치료의 골든타임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자율신경계는 회복에 시간과 일관된 자극이 필요한 시스템이다. 재발하긴 했지만 몇 번 치료로 어느 정도 회복 기반이 잡혔었고 이제 더 깊고 안정적인 회복을 위한 결정적인 시기였다.


당시 의사 선생님이 해주신 말을 되짚어보면 치료를 이 시점에서 멈추면 지금까지 쌓은 효과가 휘발될 수 있어서 이전보다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하셨다. 초기엔 반응이 미약하거나 들쑥날쑥해서 "재발이 왜 이렇게 잦을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본격적으로 회복의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사실 치료가 지쳐서 원장님과 상의 후 중단하기도 했는데 당시 내 느낌은,

'반응의 문'이 열린 시점에 치료를 끊어서 문을 열어두고 다시 닫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자율신경은 ‘반복학습’으로 회복한다. 의식적으로 조절이 어려운 시스템이기 때문에 꾸준하고 반복적인 자극으로 회복을 학습시켜야 한다. 중단하면 이 학습이 리셋되거나 퇴행할 수 있다. 치료를 끊고 증상이 다시 올라오면 몸과 마음 모두 더 큰 타격을 받는다.


한 번 안정기에 들어서면 그 후는 비교적 수월해서 집중해서 확실히 기반을 다져야 하는 치료이다.


장시간 어떤 치료든 슬럼프로 힘든 당신들에게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라 밀어붙여야 할 때라고 감히 말해주고 싶다. 그래야 지금까지 해온 치료의 효과를 안정적인 회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대부분의 치료는 생활습관이 기본이지만 시간 노력, 일관된 자극이 필요하다.


14개월 종합치료를 받은 후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치료의 대한 생각, 방법과 시기는 개인마다 다르므로 누구에게나 같은 처방이 정답일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 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고 치료는 누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회복이 더뎌 답답했고 어느 날은 아무 일도 아닌 듯 괜찮아져서 혼란스러웠지만 그 모든 흐름이 결국 나를 회복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은 외면할수록 커졌고 들여다볼수록 얌전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막막한 터널일 수 있지만 빛은 늘 그 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몸과 마음의 회복 리듬, 자율신경의 특성, 그리고 환자의 주체적인 치료 참여에 대한 이해를 나누고 싶다.


부디 당신에게는 이 글이 '이해'로만 머무르기를.
이 고통을 직접 겪지 않기를.

병원 문턱조차 넘지 않기를.


또한 몸은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걸어온 모든 회복을...


이 기록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당신에게 닿는 일이 고통의 시작이 아니라 회복을 더 멀리 미뤄두는 "예방"이 되기를 바란다.



글만 보면 내가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의사의 말을 빠짐없이 따르는 환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실은, 살 만하다 싶으면 치료를 멈추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의사는 서울 언제 가냐고 노래를 불렀다.

통증이 조금 가라앉으면 "이쯤이면 괜찮지 않나"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의사의 치밀한 계획을 정확하게 헝클어뜨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회복의 흐름에 물결을 일으키는 전문 환자였다.ㅎㅎ 고의는 아니지만 본능처럼 그랬다.

"집중치료 하셔야 되는데." 지금도 메아리 친다.


더 잘해보겠습니다. ㅠㅠ



의사 선생님의 대략난감의 표정이 자꾸만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조금 죄송하기도 하고.


흑화의 끝에서 나를 끌어올려준 의사의 그 말이 왜 그렇게 깊게 박혔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의사는 나를 진심으로 살려내려는 중이라는 걸."



체외 충격파라는 치료와 도수치료를 받을 때는 통증이 있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를 들면 근각이라고 생각하니 근육이 깨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되어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되었다.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자극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관점.


마치, 오랜 잠에서 근육이 눈을 뜰 때와 같이 기지개를 켜며 보내는 경고음처럼 받아들이면 지금 느끼는 불편함은 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통은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종종 괴로운 느낌을 이건 나쁜 거야!!라고 자동으로 규정하지만 깨어남, 회복, 적응 같은 생명력의 언어가 숨어 있었다.



한 사람의 응원은 그렇게 된다.

세상이 나를 몰라줄 때,

내가 나조차 나를 확신하지 못할 때,

그 말이 나를 대신 믿어주었다.


그것은 응원은 예언이 되고, 씨앗이 되고, 현실이 되었다.


말 한마디가 운명을 바꾼다니.

그렇게도 가볍고 그렇게도 무거운 것이.


고통은 깨부순다고 깨지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나는 그 안에 앉아 있었다.


끝판왕을 이기면 모든 것이 환호와 해방으로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끝에도 고통은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점 더 정교해지는 난이도, 익숙해지는 나의 조작법.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법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겨냈다기보다 함께 살아내는 법을 배운 것.


고통이라는 게임에서 나를 키우는 것은 스테이지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수없이 죽고 살아난 나였다.




의사는 내가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지 않았다. 구름처럼 그저 지나가는 것이라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고 몸이 찢어질 듯 아픈데 왜 이걸 고통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가 회복되었을 때 고통이라 인정해 주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게 심각하다고 표현하거나 고통이라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고통이라 이름 붙이면 그것은 나를 짓누르는 실체가 되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지만 과정이라 하면 지나가는 것이 되고 끝이 있는 것이 된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그 터널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그 끝을 볼 수 있게 고통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말했다.


"이제 당신은 그 고통을 지나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 진료실은 잠시 울음으로 물들었다. 의사는 나의 회복을 확인했고 나는 그 눈빛에 담긴 안도와 진심을 읽었다. 우리는 말 대신 눈물로 응답했다.
치유의 끝자락에서 의사도 울고, 나도 울었다.


확인시켜주는 주치의에게서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끝이었고 시작이었다.




원장님은 내게 낫게 해 주겠다는 말을 수없이 하셨다.


나는 그 정성에 꼭 행복하게 보답드리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나는 이제야 주치의 선생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다.
'확신'이 있어서 했다기보다 '책임'과 '진심'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환자의 고통을 증상으로 보지 않고 삶 전체로 느끼셨던 분이니까.


그렇기에 “꼭 낫게 해 주겠다” 말은

예측이 아니라 약속이었고,


“행복하게 보답드리겠다”

나의 말은 신뢰였다.


치료라는 건 늘 불확실한 길이지만 어떤 말이 사람을 살리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닐까.

그래서 확신이 없어도 확신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현실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용기였고 그 용기가 서로를 붙들어준 것 같다.

글을 쓰며 과거의 대화를 보면 서로를 얼마나 잡아주었는지 느껴진다.

진심 어린 약속과 신뢰는 긴 여정의 등불이 되어주었고 몸보다 마음을 먼저 회복시키는 힘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치료자였지만 때로는 확신이 없었을 텐데 확신처럼 말씀해 주셨다.

그분의 믿음, 견딤, 그 정성에 버티며 걸을 수 있었다.


치료자와 환자, 서로를 붙들며 걸어온 길은

함께 만들어 낸 회복의 증거였다.



2024년 4월 9일 화요일

자율신경실조증 치료 3회 차, 회복의 길에 접어들자 원장님은 다른 환자분들께 자랑하고 싶으셨는지(?)

ㅋㅋ내게 영상 촬영 동의를 구하셨다. 나는 그 영상 속 나의 모습, 구름 같은 나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끔은 의사 선생님의 잔소리가 그립다.


그 잔소리가 나를 붙들어 주어서.


작년 4월은 고통과 행복이 범벅이어서 정신을 못 차렸던 시기였다.


의사에게는 오진할 권리도, 오해할 자유도 있다. 의사도 사람이라 완벽하지 않으며 때로는 진단을 잘못할 수 있고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의사도 실수를 할 수 있다. 오진이 절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런 가능성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혼자’서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증명할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환자와 의사는 서로 소통하는 동반자다. 오진이라는 낯선 단어 앞에서 혼자 끙끙 앓는 대신, 자신의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솔직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의사에게 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단은 더 정확해지고 치료는 온전해진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함께 길을 찾아가는 동행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은 길이 되고 믿음은 버팀목이 된다.



아래는 주치의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https://brunch.co.kr/@nothing8/176


글이 자꾸만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피로도가 상당하실 텐데...(-.-) Zzz

그럼에도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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