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울어도 된다
‼️첨부한 진단서 사진은 지난달 2025년 5월 27일 병원에서 퇴원 시 발급받은 것으로 과거 "불명열"을 겪었음을 알리기 위해 참고 자료로 포함하였습니다.
글에서 서술하고 있는 2024년 당시의 이야기와는 진단서 사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4월의 벚꽃처럼 피었다 지는 내 자율신경의 기억
2024년 봄날, 나는 자율신경 실조증의 미로에 이어 곧바로 원인 모를 열, 불명열이라는 정체 없는 불빛아래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자율신경은 흔들리는 가지처럼 나를 휘청이게 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열은 내 몸을 뜨겁게 덮쳤다.
몸은 해명을 거부했고 나는 '해석 없는 고통'과 '해답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치유라는 단어가 닿지 않는 그런 봄이었다.
고통 곁에서 숨 쉬려면 이기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 한다
트라우마를 잊는다는 건 억누른다는 뜻이 아니다.
그걸 억누를 만큼의 힘은 애초부터 없었다.
나는 그냥 애쓰지 않았고, 잊으려고도, 마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는다고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다행히 조금 일찍 깨달았다. 생존이 더 급했다. 숨 쉬고, 하루를 버티고, 먹고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 고작에 모든 걸 썼다.
내가 그것을 이긴 게 아니라 조금 비켜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이 너무 가까우면 차라리 손도 댈 수 없다. 몸이 멀쩡하다고 마음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이 어디에 맺힌 건지 모를 것이다.
아프다고는 느끼는데 그게 척추인지, 장기인지, 마음 한편인지 손끝처럼 멀고도 가슴팍처럼 가까웠다.
고통은 언제나 내 곁을 맴돌다, 결국 나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치료가 '잘'되면서 나는 더 이상 크게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 채로 온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승리도, 이겨냄도 아니었다.
단지, 살아냈을 뿐이다.
그게 승리라면 너무 값이 세고, 정복이라면 참 허무한 말이다.
나는 강하지 않다. 그런데 꼭 강해야만 의미가 있는 걸까. 어쩔 때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트라우마는 3개월 만에 표면적인 망각에 가려졌다.
생존을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그것을 지워야만 했다.
스스로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지우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내느라 기억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능동적인 ‘잊음’이 아니었다.
생존에 밀려 뇌가 감당하지 못해 뒤로 미뤄둔 비기억이었음을.
잊은 게 아니었다. 기억하지 못했고 잠시 미뤄둔 것뿐이었다. 기억은 때로 고의로 눌러둔 책갈피 같아서 더는 떠올리지 않았고 마음속 깊이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나의 회복 8할은 주치의 선생님이다.
그런데 100%라고 하면, 뭔가 억울해서 내 내면이 급발진할지도 모른다.
나 대신 아파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중 이분의 여덟 할, 그리고 내 나머지 두 할 쯤은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 (웃음)
고통은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생존에 온 신경을 쏟는 동안 몸은 차곡차곡 고통을 쌓아갔다. 나는 정신과 약 없이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내 삶으로 증명해보고 싶었다.
이건 내 선택일 뿐 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길이 있고 나는 나에게 맞는 길을 걷는 중이다.
매일같이 정해진 순서처럼, 코스요리가 나오는 것처럼 몸 어딘가가 터졌다. 오늘은 명치, 어제는 등줄기, 내일은 발열 예약! 거울 앞에 서서 벌어진 이상 징후들을 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세를 짐작하고 온몸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그렇게 감식반처럼 내 몸을 조사하며 흘러갔다.
살아내느라 온 신경을 쏟다 보니 뇌의 저장공간을 초과했고 어떤 기억은 나도 모르게 폐기됐다. 아니, 내쫓았다.
내가 겪은 건 고통이 아니라 덜 소화된 감정들이 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였을까?
그때는 그게 삶의 전부처럼 아팠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게 매운 국밥 한 그릇이었다. 어딘가 좀스러운데 또 지독했다. 비위가 약해져서 이제는 통증에도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고통들은 내가 더 큰 고통을 기억하지 않도록 앞에 줄지어 서 있었던 건지도. 순서대로 나 대신 맞아준 것처럼 때론 아픔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아 더 헷갈렸다.
때론, 고통은 더 큰 고통을 가리기 위해 먼저 온다.
트라우마가 잊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일이 나를 망치고 있다는 서사를 꼭 붙들 필요는 없었다. 고통의 무게는 크기보다도 지금 나를 어디에 데려가는지가 더 중요했다.
2024년 4월, 주사 치료실.
보통 10분, 길어야 20분인데 그날, 환자분들 면담이 길어졌는지 주사치료실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
원장님이 주사실로 들어오시다가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멈추시고는 깜짝 놀라셨다.
멈칫!!
변화무쌍한 다발성 증상들에 급변하다 보니 치료 초반엔 의사 선생님도 놀라실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내가 교감신경을 끌어올린 건 아닐까.^^ 늦었지만 이제 와 사과와 위로를 그 따뜻한 진료실에 보낸다.
오른쪽 사진은 회복기에 접어들 무렵 찍은 것이다. 고통은 잠시 한 걸음 물러섰고 내 얼굴엔 미세한 여유가 감돌던 시절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던 날, 원장님 얼굴색과 비교해 보자며 찍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어!? 오늘도 얼굴이... 빨갛네요. 어젯밤은 좀 어떠셨어요? 컨디션이 많이 떨어져 보이네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에구 쯧쯧”
그뿐이랴. 어제만이 아니라 그저께, 사흘 전 열까지 어땠냐고도 물으신다. 몇 도였는지, 몇 시에 오르고 몇 시에 가라앉았는지도.
시간의 선을 정밀하게 짚어가며 과거의 열까지 하나하나 되짚으신다.
나는 얼떨결에 아침 체온만 떠올리고 있었는데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환자들을 만나셨을 텐데 매 순간 이렇게 정성껏 살펴주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저릿했고 숙연해졌지만 동시에 나는 그 감정에 완전히 젖을 수는 없었다.
너무 힘들었다. 대답을 하려는 입술은 자꾸 마르고 뇌는 피로했고 그 짧은 문답이 마치 시험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끌어올리다가 감정이 불쑥 밀려왔다.
그런데 주치의 선생님은 그 모든 걸 알고 계신 듯, 나의 흔들림을 전부 품어내셨다. 그 꼼꼼함은 추궁이 아닌, 돌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돌봄 앞에서 버티는 법을 다시 배웠다.
“원장님!! 저 너무 힘들어요. 우엥 옹냥...블라블라
하아...으... 숨이... 어후...또 열..."
"두통은 요?"
네, 심장이 뛰고 몸이... 휴~힘들어요.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이 머리도 관자놀이부터 아프고, 명치도 답답하고 휴우~오늘 너무 힘들어요. 살려주세요ㅠㅠ"
"저런, 식사도 못 하고 잠도 못 주무셨겠네요."
"네, 두 시간밖에 못 잤어요."
말이 목 끝에서 자꾸 멎었고 끝없는 피로는 안개처럼 내 몸을 감쌌다. 무게는 살이 아닌 영혼에 얹힌 듯했다.
2024년 2월 22일.
설날 연휴가 지나고 대구로 향해 목과 등줄기, 견갑골(날개뼈)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초, 그동안 말만 오가며 미뤄졌던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도 노래하듯 말씀하시던 자율신경 집중 치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치료는 4월 30일까지 이어졌고 나는 끝내 다시 치료를 중단하고 싶다며 일도 볼 겸, 가족들과 지인들이 보고 싶어 서울로 올라왔다. 통증이 줄어서 정말 살 것 같았다.
살 만해지면, 나는 꼭 툭 던지듯 말했다.
"원장님, 치료 잠시 쉬고 싶은데요, 저 3일 있다가 서울 갈게요." 혹은, "일주일 뒤엔 서울 가야 할 것 같아요."
어느 날은 급발진해서 "내일 갈게요!"하고 원장님 얼굴을 보면 살짝 눈썹을 올리시고 “흠~그래요”
당황이 비치는 표정.
말끝은 흐려지고 잠시 공기가 멈췄다. 진지하게 말했는데도 자꾸 웃음 필터가 꼈다. 내 말의 온도와 내 표정, 리듬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의도한 게 아닌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이 자율신경이라는 건 말과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자꾸 어긋나게 만들었다. 마음이 하는 말을 입까지 데려오지 못하게 한다. 전달되기 전 어딘가에서 방향을 비튼다. 기억은 진지했는데 말은 웃고 있고 감정은 무거운데 몸짓은 가볍다.
그러니까 내가 웃으며 말한 건 웃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내 안의 신경회로가 진심의 골짜기를 돌아가지 못한 채 가장 짧고 편한 길로만 흘러버린 거다.
말과 마음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처럼.
손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중간에서 누군가 내용을 바꿔버린 것처럼.
그렇게 전달된 마음은 늘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자율신경은 그렇게 마음과 말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벌려놓는 보이지 않는 바람 같았다.
가까이 있는 말일수록 더 멀게 들리게 만드는.
말끝에 붙는 짧은 침묵.
그 침묵 뒤에, 눈빛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지는 시선에
잘못한 사람처럼 나 혼자 괜히 미안해졌다.
“2주 후에는 오실 수 있는 거죠?”
날짜만 다르고 그 질문은 매번 같았다.
대답도 매번 같았다.
“네.”
대답은 일단 네!! 하고 항상 조금 늦었다.
100% 확신은 없었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원장님 눈빛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체념 같기도 했고 조금만 '더 치료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안에는 걱정, 연민, 다짐, 인내까지 겹쳐져 마음이 좀 찡했다. 그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견디고 다시 도망치듯 돌아가려는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듯했다.
치료 경과에 따라 날짜를 꼭 정해주신 걸 보면.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늦으면 늦는다고 말씀드리게 됐다. 약속을 지킨 날도 있었지만 말이 2주지, 2주라고 해놓고 3주, 한 달쯤 지나 간 적도 있었다.
원장님은 나를 믿어주셨다. 돌아올 거라고, 다시 회복의 발걸음을 내디딜 거라고.
늦더라도 치료를 잊은 건 아닐 거라는 믿음.
그 믿음에 말을 아끼셨고 나는 그 아낌을 자꾸 떠올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즉 치료 과정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필요하신 분들만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치료했다는 점을 보여드리고자 아래와 같이 해당 내용을 공유드립니다.
2024년 4월 6일 토요일
2024년 4월 6일~16일까지 자율신경치료 7회 차
많은 사람들은 고통이 올 때마다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한다. 가슴이 무너질 것 같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미치겠다고, 죽고 싶다고. 하지만 정작 무너지지 않고 그 말만 오랫동안 무너져 있었다.
나도 그랬다. 그런 말들을 했다. 그런 말들 속에 나를 눌러 담았고 그렇게라도 표현해야 겨우 숨을 쉬었다.
하지만 내 가슴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질 것 같다고 말했을 뿐, 그 가슴은 여전히 여기에 있었다.
누군가를 안아주고, 안기며, 때론 나 자신을 끌어안으며 살아 있었다.
그리고 머리.
나는 그 머리로 정말 별짓을 다 했다.
상상, 왜곡, 공포.
그 세 가지는 내 머리 안에서 줄넘기를 하고 하루 종일 뛰고 구르고 달렸다.
사실 나는 그걸 다른 방향으로도 쓸 수 있었던 거였다. 좋은 쪽으로, 따뜻한 쪽으로, 나를 살리는 쪽으로.
나를 상처 덩어리로만 보았다.
머리를 괴물처럼 굴렸다.
가슴은 폐허라고 불렀다.
내 몸 전체를 상처의 전시장처럼 다뤘다.
그때는 진짜 그렇게밖에 못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예 안 보였다.
지금은 좀 보인다.
그래서 나한테 물어본다.
왜 내 몸의 소중한 기능들을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냐고.
왜 나는 나를 그렇게 소개했냐고.
왜 자꾸 고통에만 줄을 맞췄냐고.
그걸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그땐 정말로 그 말밖에 할 수 없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고 아프다.
나 자신에게. 내 가슴에게. 내 머리에게.
그렇게 무너졌다고만, 망가졌다고만, 병들었다고만 여겼던 나에게.
나는 그 말들로 나를 묶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건 내가 그렇게 만든 말들이었다.
이건 자책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슬픔이다.
이제야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떨리고 있다.
이제는 지금 이 떨림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말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발열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찾아왔고 몸은 뜨거웠고 마음은 지쳐 그 시간들은 지독했다. 무기력과 통증 사이에서 하루를 버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일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팔다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았다.
열이 확 올라와 주사를 맞으면 마법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믿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물리치료를 끝내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또 열이 났다. 앱 껐다가 다시 켰더니 캐시가 아직 안 지워진 상태처럼 몸은 주사치료로 새로고침됐는데 아직도 열 올라간 상황에 남아 있었다. 옷 갈아입으려니 다시 로딩됐고 백그라운드에 숨어 있던 열의 찌꺼기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어느 날은 비행기가 분명 착륙했는데 엔진은 아직 도는 느낌이었다. 치료는 끝났지만 몸은 도착했는데 시스템 내부는 아직 서서히 굴러가는 중이었다.
열이 한 번 더 나고 나서야 그제야 진짜 착륙 완료한 것 같았다.
그런데 회복이란 참 묘한 이름을 가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열이 나도 그저 견딜 수 있게 되었고 견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 시절, 나는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조금은 버틸 수 있었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수도 있었다.
한때 나는 내 삶이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말을 거둬들이고 싶다.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회복은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진 인내와 작은 변화들의 연속이었다.
치료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기 전
내 고통이 부정당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해지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자율신경실조증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숨 쉬고, 체온을 유지하고, 소화를 시키고, 심장을 뛰게 하는 그 모든 생명 유지의 리듬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질환이다.
마음이 괜찮다 생각했는데 몸이 자꾸만 아니라고 말하고 잠을 자도 피곤하고 아무 일 없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소리에 예민해지고 밤에는 통증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도 통증으로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그저 ‘조금 피곤한 것 같아’라며 넘겼던 수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몸이 내게 보내고 있던 날 도우려는 구조신호였다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차리게 됐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서 설명하기 어렵고 검사에서는 큰 이상이 없다고 나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고통이 결코 가볍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신경계의 리듬이 무너졌다는 그 한 줄의 진단이 어쩌면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읽어준 말일지도 모른다.
불명열(不明熱)
말 그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열을 뜻하는 의학 용어. 병원 검사로도 뚜렷한 이유가 나오지 않는데 몸에서는 계속 열이 나는 상태.
특별한 이유 없이 오르는 발열.
혈액검사도, 소변검사도, 엑스레이도 모두 정상.
해열제를 먹어도 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 이불을 덮으면 식은땀이 흘렀고 벗으면 금세 오한이 밀려왔다.
몸은 분명히 힘들다고 하는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어느 장기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어 더 답답한 열.
누가 알아주지 않아 더 아픈 열.
살고 있는 몸이 내게 보내는 목소리였다.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라고.
아프다는 건 내가 아직 느끼고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이제 울어도 된다.
살아 있음은 바람에 실려 온 유배자의 씨앗.
아픔은 그 씨앗 안에 숨겨진 망명자.
그 망명자가 없이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결코 싹을 틔울 수 없는,
가장 은밀한 고요의 비명이다.
아픔은 무성한 정적 사이를 유영하며
보이지 않는 진동으로 나를 서서히 들어 올린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살아 있다는 건 이 불가사의한 망명자를 부드러운 바람처럼 감싸 안는 일임을.
그 불꽃은 가끔 너무 뜨겁고 가끔은 꺼질 듯 약하지만 그 불꽃 없이는 내가 나일 수 없다.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것 같아 지난 글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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