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잊을 수 없는 행복
원장님, 저 너무 행복해요
너무 감사해요.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자율신경 치료 5회 차
"안녕하세요!!"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원장님과 간호 선생님의 얼굴이 눈앞에 들어오자 무언가가 ‘퐁!’ 하고 안에서 터졌다. 안도 같기도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발열 때문에 걷는 것조차 버거워 실내화를 벗어던지고 진료실 문 옆에 놓인 세 개의 의자 중 하나에 거의 쓰러지듯 앉았다.
탈진한 사람처럼 맥이 풀린 채로.
발열과는 달리 몸이 가볍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마음까지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데?
“원장님!! 저 정말 행복해요. 너무 감사드려요. 몸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워요. 이런 기분, 살아오며 처음 느껴봐요.”
“치료받은 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아요. 이 눈물, 감정 폭발이 아니라 치유의 눈물이에요.”
말을 잇고 있었지만 눈물도, 입가에 맺힌 웃음도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흥분 없이 잔잔하게 말할 수 있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 이렇게 경이로운 것임을.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자각이 동반된 치유의 감정이었다. 치유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날 나는 고통이라는 딱딱한 껍질을 벗었다.
하지만 진짜 치유는 껍질을 벗는 데 있지 않았다.
그 껍질 속에 고통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일이자, 살아있었던 나를 비로소 사랑하게 된 일에 있었다.
조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웃었고, 울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정신이 또렷했고 살아 있었다.
장시간 치료해 온 것이 보람 있게 느껴졌다.
통증이 가라앉으니 주사 맞는 건 식은 죽처럼 쉽게 넘겨졌다.
원장님은 의자에서 일어나셨다가 다시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셨다.
뭔가를 해주고 싶으면서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몸짓이었다.
두 손을 내저으시며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동안 미안함에 막혀 삼켰던 말들이 있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말들과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참았던 시간만큼 밀려든 안도와 고마움은 주체할 수 없었고, 삶이 180도 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건 ‘살아있음’이었다.
"***님! 가장 중요한 건 통증이 고통으로 넘어가지 않는 거예요. 아프면 아파해야죠. 그리고 내가 괜찮다는 마음이에요." ***님이니까 이겨낸 거예요. 정말 너무 힘든 건데 이렇게 잘 이겨내고 회복해 주셔서 너무나 다행이에요. 제가 정말 감사해요."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하셨다.
통증이 마음의 고통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는 의사 선생님의 태도는 육신을 넘어 마음까지 살피는 진심 어린 예우였다. 나는 말없이 그분의 삶 앞에 찬탄을 바쳤다.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원장님이 왜 감사해요. 제가 너무 감사해요."
나가야 할 타이밍을 알면서도 진료실에 눌러앉아 있었다.
고양된 마음, 그 따뜻한 온기를 단 1초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체면도, 거리감도 잊었다.
진료실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방금 느낀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말문은 막힌 듯하면서도 어딘가 다급한 내 마음이 또 말을 쏟아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도 사라졌고요. 이렇게 편안하게 사는 게 원래 사람들한테는 당연한 걸까요?”
“아이고... 불안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줄은 몰랐어요...”
모르실 만했다.
나는 불안을 꼭꼭 감춰두기 바빴으니까.
“저 너무 불안했어요. 혹시 누가 봤을 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말끝을 흐리며 마음을 꺼냈다.
그토록 혼란스럽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안정을 말할 수 있게 된 내가 자랑스러웠고 그 회복을 함께한 의사 선생님 앞이라면 더없이 자랑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들이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지금, 정말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비록 온전하진 않아도 이렇게 내 자신을 이해해 주려는 누군가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뺨을 타고 흘러 결국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원장님은 내 눈물보다 더 다급한 손길로 휴지를 건네고 다시 또 건네셨다.
그날, 진료실은 나의 세계였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내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울 수밖에 없었다.
열도 나고 아팠지만 그 순간만큼은 병을 얻기 전보다도 더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숨을 쉰 적이 과연 있었던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설고도 선명한 또 다른 행복이었다.
10분이 1분처럼 스쳐간 그날, 마음은 가볍게 떠올랐고 그날의 공기와 시간이 지금도 내 마음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
회복은 조급함으로 앞당겨지지 않았다.
수면 아래의 미세한 온도처럼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쌓이고 스미어들 듯, 어느 날 문득 햇빛처럼 나를 찾아왔다.
예고 없이 눈물을 쏟으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환자.
그 갑작스러운 감정 앞에 당황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분은 놀라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고 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픈 사람이 회복되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축복인지 몰라요. 더 이야기하셔도 돼요. 오늘은 다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왜 그토록 고맙다고 하셨는지 사실 나는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속엔 분명 나를 향한 존중이 배어있었다.
내게 건넨 고맙다는 말은 내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진심으로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내게 가장 인간적인 감사였고 위로였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질문이 있었다. 왜 그 말을, 그 공감을 그때 해주지 않았을까. 나의 치료라는 길이 이렇게 험난하다는 걸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환자가 그 시간을 스스로 견뎌내고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를 바랐던 걸까.
‘힘들 거예요’라는 말이 때로는 예언처럼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그래서 모든 감정과 고통이 구름처럼 흘러간다고 동화책 속 한 장면처럼 나지막이 들려주곤 했던 걸까.
그 말속에서 그간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진심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나왔기에, 고통을 나만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에 비로소 꺼낼 수 있었던 마음이었노라고.
그날 나는 의사 선생님을 업고라도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의학 드라마에서 숨이 끊어지려던 환자가 눈을 뜨고 의사 손을 붙잡고 연신 인사하는 장면.
그게 바로 나였다.
살아 있다는 게 실감 났고 누군가에게 그렇게나 고마운 순간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특히, 나이 든 분들이 왜 그렇게 자신의 주치의에게 고마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몸이 아프고, 또 괜찮아지고,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
그 오랜 시간 동안 곁을 지켜준 한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언젠가 눈물로 스며 나오는 거구나.
십몇 년 전, 외할아버지가 다니시는 병원에 동행했다가 자신의 주치의 선생님 앞에서 아흔이 넘은 노인이
손끝만 만지작거리며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장면이었지만 불현듯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도 그때의 할아버지처럼 나도 지금 참아온 무언가가 터져 나온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좌충우돌 대환장 파티는 그날을 끝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삶은 여전히 흔들렸고 통증은 쉬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렸으며 마음은 몇십 번이나 무너졌지만, 나는 그날의 대화며 제스처까지 선명히 기억하는 그날의 행복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
사람이 절망이어도 단 하나의 행복한 기억으로 버틸 수 있다면 내게는 바로 그 진료실에서의 눈물 한 줌이 가장 강력한 생존의 증거였을 것이다.
나는 삶을 조금 더 믿기 시작했다.
통증도, 고통도, 삶이라는 이 낯선 것도 언젠가는 다른 색을 띠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물속에서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듯 서늘했던 하루들이 아주 조금씩 투명해졌다.
아무리 길고 어두운 터널이라 해도 그 끝 어딘가에는 적어도 한 사람쯤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해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시 한번 나는, 치료라는 터널의 입구에 서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 행복이 어떤 온도인지 몸으로 겪었으니까.
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회복이라는 것은 돌연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이후로 또 다른 길 위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삶에게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부드럽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 발끝의 떨림조차 살아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그전에는 미치겠다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머릿속에서는 수십 번도 넘게 반복됐다.
“안 미친다.”
그 모순된 말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었다.
나는 미친 게 아니었다. 그게 더 미칠 노릇이었다.
명료한 정신으로 이 감정과 생각과 절망을 다 느끼고 있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 나의 뇌가 이런 식으로 작동해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속은 거였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게.
아니면 그냥 나 자신에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고, 왜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지도 모르겠고 모든 게 나를 향한 원망으로 뒤덮였다.
분명, 나는 진심이었다.
살기 위해, 나아지기 위해, 의미를 붙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생각하고 움직였다.
돌아보니 허망했고, 허술했고, 모든 게 거짓 같았다.
내가 그렇게 절박하게 붙잡고 있던 생각들이 실은 "환상"이었단 걸 알게 된 순간 그걸 믿고 움직인 내가 너무 어리석고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날 속인 것 같았다.
그걸 이제야 알아버렸다.
그게 나를 자꾸만 미치게 했다.죽고 싶다는 말은 사실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감정의 무게가, 그 부끄러움의 농도가, 그 자괴감의 깊이가 내 몸을, 마음을, 삶 전체를 숨이 막히도록 침수시키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여전히 안 미쳤다.
그게 내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이성은 남아 있었다.
생각은 또렷했다.
나는 끝난 게 아니었다.
이 말도, 이 감정도,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믿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무너진 당시의 이 순간도 나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모든 병은 완치되지 않는다고.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거라고.
처음에는 꿈 깨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 말은 물처럼 들렸고 그 물속에 잠겼다.
그런데 편안했다.
아, 그렇구나!
병은 나아가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거구나.
회복은 증발이 아니라 공존이구나'
아프지 않은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덜 아픈 날을 맞이하는 것.
견디는 법을, 조금 더 나은 방법으로 익혀가는 것.
기대가 상처가 되지 않으려면 낫기를 바라지 않는 쪽이 덜 절망스러웠다.
'아프지 않은 날' 말고 '조금 덜 아픈 날'이면 괜찮다고.
사실, 완치 같은 게 있을까.
기억도, 감정도, 상처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조금씩 바래지고 흐려질 뿐.
영원한 건 없다.
사랑도, 믿음도, 건강도
모두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들.
잡았던 순간이 전부일뿐.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가는 거다. 다 나아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렇기에 더 간절하게 살아가는 거다.
아프면서도 사랑하고, 흔들리면서도 붙잡고, 무너지면서도 웃는 것. 그 모든 모순 속에서도 살아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은 숨을 쉬는 일조차 뜨겁게 아팠고,
어떤 날은 몸이 납처럼 가라앉아 아무 데도 닿지 못했다. 또 어떤 날은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고통이 이토록 유동적인데 나는 왜 붙들려 있어야만 했을까.
움직이지 않으면 몸은 뭉치고 속을 다 드러낸 식물처럼 쉽게 상처받았다. 그렇게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고통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그래서 조금씩 움직였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말없이 흘러가는 물결을 따라가듯,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말 걸었다. 괜찮다고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그러자 아주 작게, 살 속 어딘가가 반응했다.
의사 선생님께 행복을 고백할 만큼 자율신경 치료의 효과는 폭발적이었다.
불꽃놀이처럼 환희가 터졌고,
"야호! 끝났다!"는 외침이 속에서 솟구쳤다.
몇 번 주사 맞고 나면 이제 이별이겠지 싶었다.
하지만 내 자율 신경은 그렇게 간단히 "안녕"을 허락해주지 않았고 오래된 낡은 집의 전기 배선을 고치는 일과 흡사했다.
외관은 반짝일지 몰라도 벽 속에선 계속해서 쇼트가 났다.
눈에 보이는 회복 뒤엔 미묘한 전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완벽히 멈추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버튼이 눌린 알람시계처럼 꺼도 꺼도 다시 울려대는 불안이 찾아올 때면 이 고통이 간단히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곤 했다. 증상은 숨 고르듯 조용하다가 느닷없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작년 겨울부터 나뭇잎이 가장 푸르던 5월을
만끽했다. 6개월 동안은 아무 일이 없어 기적이었다.
그 시간은 내게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평온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아오는 것이란다.”
다시 올 평온을 기억하라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언젠가 또 돌아올 그 순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기다릴 수 있다.
"끝나지 않더라도 괜찮아,
중요한 건 그 사이사이
평온이 있다는 것!
“6개월이나 평온을 맛본 내가 있으니까, 앞으로는 두 배, 세 배로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도 충분히 가져볼 수 있잖아?”
환희와 절망 사이를 오가며, 오래 비워졌던 이 낡은 집에 다시 불을 켜는 중이었다.
희망이란 불씨는 때로 쥐덫처럼 달콤하게 나를 유혹했고 잡히는 순간엔 행복 같았지만 그 끝엔 어김없이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율신경은 가시 돋친 덩굴처럼 불쑥 나를 휘감았다가도 어느 순간 느슨히 풀어주며 나와의 거리를 조율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 덩굴에 베이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아파서라도
친해져야 한다는 걸 배워가고 있었다.
가까워지면 다칠까, 두렵고, 멀어지면 무너질까 어딘가 조금은 이상한 동행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서로의 빈틈을 조용히 메워주었다.
어긋나면서도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곁에 있었다.
병원 1층에는 약국이 있는데 나는 가벼운 몸으로 그 복도를 걸어 나왔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원장님, 저 정말 행복해요.”
주사의 폭발적인 효과가 나를 감싸 안았던 그 감정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희였고 고통을 잊은 완전한 자유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날의 발열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진짜 회복은 그 복도를 나선 순간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수없이 그리던 무사히 걸어 나오는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건 살아남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레드 카펫과도 같았지만 몸은 조금씩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열은 식지 않았다.
그 발열은 그날을 기점으로 1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카펫 위에서 나는 분명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몰랐던 시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행복과 발열은 그렇게 겹쳐 앉아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행복이라는 찰나 뒤에 찾아온 발열은 회복의 시작이었는지, 고통의 서막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은 서로의 옷깃을 잡고 흔들리다,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마주 앉았다.
행복은 웃고 있었고
불안은 그 웃음 틈에서 울고 있었다.
행복은 도착지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잠시 머무는 쉼표 같은 것이었다.
그 길을 걸어온 적 없어도 나는 압니다.
가운 너머로 가려진 외로움을.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누구보다 많은 삶을 다루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곳 하나 없는 그 자리를.
당신의 어깨는 언제나 곧고 단단했지만 그 속엔 누구도 감히 들여다보지 못할 무게가 있었겠지요.
“괜찮아질 거예요.”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습니다."
환자들을 안심시키는 그 말을 건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논문을 뒤지고, 공부를 하고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요?
괜히 입을 열어 동 떨어진 말을 했습니다.
"원장님, 저 언제 좋아지나요?"
"요즘은 주사효과가 없어요.
치료 그만하고 싶습니다.
저 정말 좋아질 수는 있는 걸까요?"
그 말을 꺼낼 때 기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살고 싶다고 말하지 못해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고만 말했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거든요.
당신 앞에 앉아 있던 그날의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아픔에 꽉 붙잡힌 사람 같았어요.
그렇게 몇 번을 울고, 버티고, 진료실을 나올 땐 늘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사실 괜찮았던 적보다 안 괜찮은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요, 언젠가부터 제가 "하면서" 살고 있었어요.
무너진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통증 위에 몸을 세우고 두려움 옆에서 하루를 이어 붙이고 있었어요.
당신은 늘 말했죠.
아쉽지 않게 치료해 준다고요.
그 말이 저를 붙잡아줬어요.
그건 약속이 아니라 제가 계속 살아야 할
이유 같았어요.
지켜지지 않아도 괜찮은,
그러나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었던 말.
그래서 저도 다시 움직였어요.
아무도 몰랐던 속도와 아무도 못 본 방향으로.
끝도 없을 것 같던 고통 속에서 저는 다시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었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그리고 당신이 그 무너진 사람을 어떻게 다시 세워줬는지를 나는 알아요.
내가 던진 것은 물음이었지만 당신은 책임으로, 무게로, 받아내었겠죠?
나는 그때 몰랐어요.
의사의 외로움을.
수백 개의 증상 너머에 있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독을 삼켰는지.
지금에서야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병원 복도를 걸어가며 차마 등을 기대지도 못하던 그 쓸쓸한 순간들이.
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죠. 그 고갯짓 뒤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수많은 두려움과 책임이 숨어 있었겠지요?
이 환자를 낫게 하지 못하면 어쩌나.
내가 놓치는 건 없을까.
그런 마음이 수백 번 수천 번 당신을 갉아먹었을지도 몰라요.
제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 주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주어서 저는 견딜 수 있었어요.
그 무게를 나누지 못해 미안했어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보았던 쓸쓸함과 오너의 책임에서 느꼈던 고독이 당신의 의사가운 자락에도 어려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그 길 위에서 늘 최선을 다해 주셨던 것을 절절히 알고 있습니다.
그 따뜻한 외로움 덕분에 나는 살아 있습니다.
당신의 손끝이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내는 순간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 흐르기를.
당신의 눈빛이 많은 환자들의 눈을 마주할 때 그 마음이 조금 덜 외롭기를.
하루를 마치고 문을 닫는 그 뒷모습에 누군가의 숨결이 살포시 기대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도 고마움이, 기도가, 아무 말 없이 자라고 있기를.
깊은 밤, 누군가의 쏟는 그 헌신 위에 고요한 안식이 내려앉기를.
원장님이 아니었다면, 꺼진 줄만 알았던 제 안의 심지가 사실은 오래도록 저를 살게 할 숨은 불꽃이었다는 걸, 저는 알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평생 모른 채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살아있습니다.
제 존재가 아픈 것이 아니라 아파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 모든 시간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저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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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보칸 환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