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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면

치유와 생존의 경계에서 버티는 모든 이들에게

by 미리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는 멀쩡했나 싶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희미해진 지 오래라 이쯤 되면 이 상태가 그냥 내 평소 모양새인가 보다 싶었다.


거울 앞에 섰다.

눈동자엔 생기 대신 피로가 눌어붙어 있었다.

익지 않은 채 늘어져 있는 노른자처럼.


무언가를 먹고 싶었지만 그게 진짜 허기였는지, 살아가는 일이 귀찮아서였는지는 분간이 안 됐다.


닦이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 피로였다.


가만히 있으니 속상함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예고도, 이유도, 핑계도 감상도 없이 그냥 ‘툭’


말하려면 세 줄은 써야 했고 지금은 그마저도 귀찮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견디는 게 덜 번거로웠다.


온몸이 찔리는 듯 괴로웠다.

살아있다는 게 이토록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통증은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게.






살아 있는 건지, 흘러가는 건지




대신, 또 열이 났다.
체온계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아, 몸이 뭔가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구나'


감정이든 기억이든 지금은 안 된다며 폭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열이 마음에 들 때도 있었다.


통증은 설명을 요구하지만 원인을 알 수없다는 이 '불명열'은 그냥 있는 거니까.


이유를 묻고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서 오고 알아서 나간다.


그 점은 좋았다.


살다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


밤엔 열이 더 차올라 이불속에서 뜨거운 목덜미를 껴안고 누웠다.


참았다.
참는 게 익숙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보다 잘 참는다는 말 많이 들었다.


별로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이제 와선 능력처럼 써먹는다.


그리고 갑자기 울음이 났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눈물은 늘 염치가 없었고 때를 살피지도,

자리를 가리지도 않는다.


슬픔의 타이밍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내 슬픔에 대한 면허를 발급받지 못한 사람처럼, 울 때마다 자격 없는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눌러도 눌러도 마음속 어딘가에 무허가로 쌓여갔다.


그렇게 발급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에 너무도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열은 그다음 날 조금 사그라졌다. 뚜렷한 호전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더 안으로 물러난 그림자처럼, 약간은 옅어져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살아 있는 건지, 그저 시간의 강에 실려 흘러가는 건지 가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씻었고, 밥을 먹었고, 병원에 갔고, 일을 했다.
해야 하니까. 몸이 움직이니까.

그 정도면 나름 괜찮게 살아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고, 열이 오르고, 울컥하고,
그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앉아 있는 것.



그게 꼭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는 꼭 거기서 무너졌다.


'오늘도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누가 해주지 않으니까.


“응, 오늘도 그냥 그렇게 살았어.”


이제는 그 말이 제일 괜찮은 하루 같기도 하다.




그날의 진단명은 떡볶이였다



4월 말,

진료실 문을 열기도 전에 원장님이 먼저 일어나 계셨다.


평소라면 이전 환자의 차트를 마무리하시거나 주사실에서 숨을 고르듯,

나오시던 모습이 익숙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내가 진료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나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듯, 소리치듯 말하셨다.


“천천히”!!


그 짧은 한마디가 기압처럼 가슴을 눌렀다.


불쑥불쑥 오르는 열은 이제 내 일상의 리듬이 되어 있었지만 그때 나는 종종 마음이 다급했고 마음을 늦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속이 먼저 달아오르고 생각은 자꾸만 앞서 나가고 감정은 늘 반 박자 빠르게 추월했다.


나는 원래부터 급한 사람이었지만 내 자율신경은 속도를 하나 더 얹었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에 브레이크 대신 가속 페달이 하나 더 붙은 것처럼.



멈추는 법은 잊고 달아오르는 감정의 열기만 몸에 남았다.


볼은 늘 홍조에 젖어 있었고 몸은 이유 없는 발화처럼 스스로를 태우고 있었으며 그 열기 속에서 그날도 괜찮은 척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뭔가 계속해서 들끓고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모든 걸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는 일뿐이었다.





못 참겠어요, 오늘은 주사 좀 주세요!



“안녕하세요"


“아이구, 또 열이 나네요.

볼 빨간 사춘기인가요?” ^^


익숙하게 웃고, 익숙하게 농담하고, 익숙하게 나의 붉어진 얼굴을 진단하시던 원장님은,

잠시 갸우뚱하시다가 또 한마디를 얹으신다.



“오늘은 떡볶이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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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겨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긴 했지만 그 유머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원장님, 저 오늘 진짜 아프거든요.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주사 맞고 싶어요.”


그러자,


“오늘은 주사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


내 상태가 나아졌다는 뜻이었는지,

혹은 더는 해줄 게 없다는 판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계속 웃고 계셨고 나는 가라앉아 있었다.


몸도, 말도, 감정도.



떡볶이는 나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그날, 내 컨디션은 정말 별로였다.
그래서 이번엔 거의 사정하듯 또 말했다.



“원장님, 저 정말 진짜 못 참겠어요. 오늘 주사 맞으면 안 될까요.”


평소라면 치료실로 바로 들어가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든 도수치료든 받고 집에 가는 순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열이 나는 날은 진료실이 빠질 수 없는 코스다.


데스크에서도 “오늘은 면담 먼저 하셔야 해요”라며 한결같은 안내를 받았다.


그 코스는 늘 같았지만 그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시간의 태엽을 인위적으로 감아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것처럼.



끊임없이 말을 거셨다.

묻고, 기다리고, 다시 조금 다르게 묻고.


말끝을 늘이며 버티고 있는 나에게 자꾸 길을 내어주려 애쓰셨다.

그 말들이 꼭 대답을 듣기 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무너지지 않게 말이라는 부목을 대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이 어떻게 가장 힘든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몸의 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 계속 물으시면서도
그 말투에는 언제나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라는 공기 같은 숨구멍이 깔려 있었다.


나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그 버팀을 알아채며 말을 걸어주셨다.


그날의 진료는 치료라기보다 동행에 가까웠다.






열이 언제부터 이렇게 났던 거예요? 지금 어느 게 가장 힘드세요?”


“괜찮았다가 아침부터 지금 또 그래요. 힘이 없고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아요”


질문은 늘 같은 톤이었다.


“그제, 병원에서 집에 가셨을 땐 어떠셨어요?

잘 땐 몇 번이나 깼어요?

몇 시쯤부터 다시 올랐나요?”


“시간은 잘 기억이 없는데 아이스팩 하고 잠들었어요.”


잠이라기보다 의식을 꺼두는 일에 더 가까웠던 밤이었다.



“식사는요? 오늘 아침은 드셨어요?”


“네. 조금 먹었어요”



“얼굴이 빨갛지 않으면 열감은 별로 못 느끼시나요?”


"아뇨, 느끼는 날도 있는데 보통 열 오르면 얼굴도 빨개져요"


한 템포 뜸을 들인 뒤 예상치 못한 말을 하셨다.




***님,


아무래도...


진짜...


사춘기인가 봐요."




볼. 빨. 간. 사. 춘. 기.



ㅋㅋㅋㅋㅋ

이쯤 되면 볼 빨간 사춘기도 울고 갈 컨디션이다.




내 입꼬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올라갔다.

결국 빵 터졌다.




그날, 병원 대기실엔 ‘볼 빨간 사춘기’의 노래가 조금 민망할 정도의 볼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모니터를 보다 말고 또 말씀하셨다.


“저는 내일 예약이라, 내일 오실 줄 알았어요.

오늘은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원장님! 저도 오기 싫거든요.??


그러고는 어깨를 토닥이며 말씀하신다.


“이렇게 힘들어서 어떡해요. 좋아요. 오늘은 치료를 하죠.”


예측하지 못한 통증, 미리 준비하지 못한 마음...


그 사이에서 원장님도 마음이 조급해 지셨을 것 같다.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확인해 주실 때마다 몸은 익숙해졌지만 마음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힘겨웠다.


왜냐하면 매번 ‘이 정도면 이제 낫겠지'라고 기대를 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더 깊은 데까지 꺼져버릴 때가 있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지만 주사 후 좋아져서 행복했다.




무력감과 공감이 맞닿는 지점에서


‘전문가’라는 역할 안에서 사람으로서의 고민이 묻어나는 순간.


진료실을 나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단명 하나로 명확히 떨어지지 않는 증상,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감정,
그리고 회복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여정에서,


“사춘기인가 봐요”라는 농담이 의사에게 허용된 유일한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조금만 참아보세요”라고 말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무책임한 확신을 건네기도 그렇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모호함과 난감함을 마주할까.



언제 괜찮아질까요?라는 질문 앞에 모르겠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날도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가볍게 농담을 얹고 말 대신 어깨를 한 번 토닥이며 지나치지 않고 머물러주셨다.


그 안엔 이렇게라도 몸보다 먼저 닿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감정의 문을 노크하는 법이 뭐 얼마나 많겠는가.


“오늘은 볼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이 말은 안타까움이었다.


혀를 끌끌 차신 걸 보면...





치료실에 가니 여러 간호 선생님들도 놀라며 말했다.


"***님, 오늘 얼굴이 더 빨간 것 같아요"



불그스름하고, 맵고, 물컹한 감정들.
씹히는지 흘러내리는지도 알 수 없는 하루.


그날 나는 내가 봐도 진심으로 떡볶이 같기도 했고 반항심 가득한 사춘기 같기도 했다. (웃음)



고통에서 살짝 빠져나온 순간마다

문득 주치의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됐다.


내가 불안해할 때마다 무조건 주사나 약을 먼저 쓰기보단, 유쾌하게 말을 건네며 나의 자연 회복력을 믿어주려 했던 마음.


그 진심이 이제야 감사하다.

그분의 신중함이, 그 따뜻한 여유가 나를 조금씩 안심시켜 주었으니까.




일주일간 발열 체크를 해서
매주 수요일마다
상태를 정리해 보내달라는
의사 선생님의 미션이 떨어졌다.




겉보기엔 간단한 숙제였다.


하지만 하루에도 두세 번씩 열이 오르는 몸으로 그걸 해내는 건 생각보다 꽤 벅찬 일이었다.


몸이 불규칙하게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기적인 어떤 것을 해낸다는 건.


그럼에도 그 미션은 결과적으로 나를 가장 효과적으로 붙드는 치료가 되었다.


아마 원장님은 발열의 평균치, 패턴, 수치 같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게 의사의 방식(?)이니까.


그리고, 나는 환자였고.


그 열이 언제 또 덮쳐올지 몰라 일상이 틀어지고 어딘가 붙잡을 데가 없어 기록을 시작했다.
캘린더에 숫자와 간단한 증상을 적으며 내 몸의 흐름을 눈으로라도 확인해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록은 내게 ‘자료’가 아니라 ‘버팀’이었다.
무너지는 일상 사이를 간신히 기워 붙이던 실밥 같은 것.


불확실한 몸을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의심으로 가득한 하루 속에서도
‘나는 나를 놓지 않고 있다’는 움직임이었다.



좋은 기분도 있었다.

이제는 내가 써 내려간 흔적들이 누군가에게 전달된다는 것.


그 누군가는 그 흔적을 ‘읽어주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나만을 위해 하던 일이 의사 선생님과 ‘연결’되는 순간, 그 기록은 나 혼자만의 버팀이 아니라
서로의 신호가 되었다.


나를 간신히 지탱하던 노력들이 누군가에 의해 읽히고, 이해되고, 답장이 되어 돌아왔을 때,
나는 삶을 조금 더 믿게 되었다.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더라도 그것이면 충분했다.





의사와 환자.


같은 증상을 두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한 사람은 데이터를, 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기록한다.


둘의 목적은 다르지만 그 접점 어딘가에서 매주 수요일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 몸의 언어를 빌려 숫자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을 변화(열, 통증, 상태 기록 등)를 통해 표현했다.



원장님은 그런 신체의 기록과 표현 속에서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들을 찾기 위해 애써주셨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전적으로 대등하지도,

서로를 100% 이해하는 이상적인 관계도 아니었지만
서로의 방향이 어긋나거나 충돌하지는 않았다.


치료라는 목적 아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말이 되지 않는 고통과 말이 되지 않는 마음을 조금씩 꺼내어 보내드렸다.



굳이 내 상태를 정리해 달라고 당부하신 메시지 속 말투엔 딱히 ‘부담 주는 건 아니고요~’ 같은 배려는 없었다.


책임감이라는 건 가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다시 일으킨다.


그 책임감이 나를 움직였다.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기록해 두는 건, 언젠가 다시 길을 나설 때 지도를 미리 그려두는 일이라는 걸.




치료는 멈췄지만 그분은 내 시간에 동행하셨다.


내 캘린더 수요일 칸 한 구석에 살짝 접어놓은 쪽지처럼 머물러 주셨다.


모니터링이 아니라 멈춰 선 시간 속에서도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해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환자’의 껍질을 벗고 온전한 ‘나’로 남았다.


그래서 숙제를 보낼 때마다 조금씩 안도할 수 있었다.

같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통증은 변함없이 날씨처럼 들이닥쳤지만 그 길 위의 나는 혼자 걷는 사람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면 함께 걸어오는 발자국 하나가 늘 따라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더 이상 치료받는 '환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통증과 발열은 계절처럼 되풀이되었다.

비가 오듯, 눈이 오듯 예고 없이 익숙하게.


그러나 1년이 넘는 치료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예상보다 외롭지 않았다.


이름 없는 식물처럼 작고 느리게 자라나는 나의 온도, 흐름, 리듬이 그 미션 하나에 다 들어있었다.





그렇게 매주 수요일이면 나는 몸의 변화(발열)를 빠짐없이 적어 보냈다.

원장님은 기록을 깊이 읽어내주셨고 정성스러운 회신을 보내주셨다.


책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을 함께 짊어지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헌신 덕분에 내게 수요일은 ‘공란’이 아니라 치유가 시작되는 요일이 되었다.


숨을 돌릴 수 있었던 날이자 누군가와 고통을 나누며 버텨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 주를 다시 살아볼 이유를 얻곤 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자신에게 허락된 쉼.

그조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실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진료실을 떠나도, 환자들의 이름과 상태는 그분의 생각 안에서 완전히 비워지지 않을 테니까.



수요일은 주치의 선생님의 휴진일이다.


정말 짐을 나눠주시고 친구 같은 의사가 되어주셨다.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힘들었다.

그때 나는 무너진 감정을 어쩌지 못해,


"한계에 다다랐다"
"다시 원점인 것 같다"
그런 말들을 필터 없이 쏟아내고 말았다.


그 말들이 무례했는지, 과했는지 따질 여유도 없이
그저 호흡이라도 더 잘해보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의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잘 이겨내 보겠습니다"

혹은, "그래도 원장님이 계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말들이 내 아픔을 덜어줬을까.

치료는, 관계는, 그리고 나 자신은 조금 달라졌을까.


지금이라면, 고작 몇 마디로도 이토록 많은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때의 내 말들이 더 납작하고 절박하게만 느껴진다.


실은 내가 꺼낼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인간적인 표현이었다.


감정을 포장하지 않은 언어이지만 작은 구원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조금 더 정제된 언어로, 조금 더 누군가가 내미는 손을 붙잡을 준비가 된 말들로,


"원장님! 너무 힘들지만 버텨보겠습니다.

혼자는 어렵지만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저와 같이 걸어주세요. 당신이 계셔서 그게 참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그 말을 이제라도 전하고 싶다.

비로소 감정도, 말도,

이렇게 무겁고도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알아버린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도, 치료자에게도.



종양내과 진료를 권유받았다.

모든 소리가 멀어졌고

마치 실제 물성처럼 내 귀를 때렸다.



그건 분명 ‘치료의 다음 단계’이거나 주치의 선생님 말씀대로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한 안내였을 것이다.
의사의 판단이었고, 과학적 수순이었으며, 어쩌면 가장 신중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 불명열은, 마치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바람은 불확실하게 불고, 파도는 거세게 밀려왔으며, 나침반은 자꾸만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자율신경 실조증의 불명열은 매일 몸 안에 흐르는 이상한 전율 같았다.


몸은 계속 뜨겁게 달아오르면서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과학이 이름 붙이지 못한 저 불확실한 열기가 모든 균형을 흔들어댔다.


그래도 그 말을 따라가야만 비로소 나도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있었다.


그 말은 ‘보내기’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가이드’였고 아직 끝나지 않은 치료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그 권유의 말이 '포기'가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제안하는 책임감이었다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 상태로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내가 느낀 그 '이관'은 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을 옮겨 쥐어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치료를 떠나서 나는 더 이상 병원이 너무 귀찮아서 커다란 단절을 상상해 버렸다.

“이제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들어버렸다.



마음이 큰 추락 속에 놓였다.
내가 이만큼 버텼는데, 내가 이만큼 쌓아왔는데,
그 모든 게 여기서 '다음 진료과로의 이관'이라는 말 한 줄로 끝나는구나! 하고.




무서웠다.

나를 떠미는 건 아닐까.
내가 뭔가 잘못해서, 더 빨리 낫지 못해서, 그래서 결국 주치의의 손에서 나는 흘러내린 존재가 된 건 아닐까.

생각은 순식간에 번졌고 정말 1분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굴욕과 상실과 버려짐과 불안과 두려움이 차례로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버려졌다는 말이 과장이지만 그때의 나는 정확히 그렇게 느꼈다.

어떤 목록에서 제외된 사람처럼.



그전까지는 필사적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안내는 애씀에 대한 무효처럼 들렸고,

매우 매우 드물다는 말을 덧붙이였는데도 작은 바늘로 찔러 가라앉히는 말 같았다.


내가 버틴 모든 시간에 대해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네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귀엔 "당신은 예외예요. 해결되지 않는 경우 중 하나예요"라는 뜻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든 걸 다 들여다본 뒤 남는 단 하나의 결론이 ‘당신은 희귀한 문제입니다’라는 식의 정리라면,
그게 어쩌면 가장 깊은 외로움이었다.



생각이라는 건 이상하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괜찮을 거야”라고 나를 달래던 마음이 단 한 마디 앞에서 이렇게 무너진다.


의도보다 해석이 먼저 도착하고, 의사의 말보다 내 불안이 더 빠르게 결론을 내린다.

진짜 나를 무너뜨리는 건 어떤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해석하는 내 마음의 준비 상태였다.


상처는 외부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안에서 깊어지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환자를 돌보는 그 마음은 단순한 책임감이나 직업윤리를 넘는 무언가였다.


몸이 아프던 그 시절, 누군가가 내 상태를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지켜봐 주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건 치료였고, 위로였고, 말없이도 전해지는 강력한 연대감이었다.


고통은 나눌 수 없지만 외로움은 나눌 수 있다.

치유는 약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곁에 있어주는 마음에서 온다.


환자들의 짐을 나눠지고 먼 여정을 함께 하는 친구로

살고 싶으시다는 주치의 선생님.



누구라도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나는 낯선 병원이 싫다.
지금은 제법 잘(?) 간다.

나처럼 치료를 중단하거나 다른 병원을 찾는 것이 꼭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치료적 신뢰가 늦게 형성된다해도 그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초기에는 치료자와의 호흡이 어긋나거나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신뢰와 이해가 쌓여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갑작스레 과다출혈로 응급수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은 내가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종양내과’라는 불투명한 공간에서
나를 탈출시켜 주는 통로가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건 참 이상한 회피였다.


회피라고 말하는 것도 애매하다.
수술은 더 큰 위기였고 몸은 절박했으며 의학적으로도 우선순위가 바뀔 만큼 명백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 와중에도 이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면죄부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일단 종양내과 진료에 가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흘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됐다.


사람이 아플 때 몸은 신호를 보내고 마음은 그 신호를 해석하며 동시에 버티는 법을 생각한다.
그 버티는 법 중 하나는 무엇인가를 미루게 해주는 사건에 안도하는 것이다.


바이탈이 무너질 만큼 생명에 위급한 건 아니었지만 태어나 역대급 고통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주 명확한 현실이었고 대학병원 종양내과라는 '불확실하고 오래 기다려야 하며 더 안 좋은 결론이 나올 수도 있는 공간'보다 차라리 다루기 쉬운 공포였다.


더 큰 아픔을 통해 덜 견딜 수 있는 공포를 잠시 유예할 수 있었던 셈이다.


몸과 마음이 각각 다른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살리기 위해 움직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몸은 수술을 통해 고통을 견뎠고 마음은 한 가지 공포를 유보함으로써 스스로를 붙잡고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 어떤 고통을 이용해서 또 다른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 같다.



불완전하지만 살아남는다.



주치의 선생님이 준 치료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고통의 순간에도 사람은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날에도 나는 웃음을 배웠다.


고통은 늘 날카롭고 비장하게만 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면 진지해야 하고 힘들면 조용해야 할 것 같았다.


고통을 꼭 고통스럽게만 견디지 않아도 되었다.
고통의 형식을 바꾸어버릴 수도 있었다.


누군가 내 얼굴을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나를 아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환자’로만 생각하지 않고 의학 이전의 그분의 인간성은 뜨겁게 데인 마음을 잠시 식혀주는 얼음조각 같았다.



그날 의사가 내게 주고 간 것은 처방전이 아니라
"당신은 아직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확신이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란 것을 잊지 마세요!"



회복은 상처가 없어진 상태가 아니다.

아직 아픈 나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느냐다.


나는 병이 아니었다.

아무도 듣지 못한 그 시절, 천천히 말을 잃어가던 유약한 내가 거기 있었다.


증상은 몸의 언어였다.

나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나를 완전히 말해주진 못했다.



고통을 밀어내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

상처를 견디는 게 아니라 살아낸 나를 발견하는 일.

감정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말해지지 못한 어떤 갈망, 묵음으로 삼켜진 욕구였다.


어떤 말은 약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말은 조심스럽게 건넨 한마디일 뿐인데도

심장을 감싸 안아주는 따뜻한 손이 되었다.



고통은 말할 수 있을 때 줄어든다.

입을 열 수 없는 고통은 점점 날카로워진다.

피를 멈추지 못한 칼날처럼.


치료는 상처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 함께 머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조금 덜 아프다.


완전히 나은 건 아니어도 더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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