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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신경 실조증이 또라이 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은 없다

by 미리나



자율신경실조증 몸의 자동 기능을 조절하는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져 다양한 신체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


불명열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로, 자율신경실조증과 연관될 경우 체온 조절 기능의 이상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음.




연스러운 것이 무너질 때
법처럼 정해진 리듬은 없다.
체는 마음의 메아리라 했던가.
험하지 않으면 모를 파문.

패가 아니라, 잠깐 멈춘 것뿐이었다.
금만 더 내 마음을 들어봐 주었다면
발하지 않는 이 고통에도 진작 제 이름 하나쯤은 붙여줄 수 있었을 텐데.

이름 붙인 순간, 고통은 더 이상 나를 삼키지 못했다.



안은 이름도 없이 말보다 먼저 찾아왔다.

확하지 않은 상실을 껴안는다.

한 밤을 지새우며 나는 나를 설득했다.




치료 기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은 때로 세상을 이해하는 일보다 더 어려웠고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은 분명 이유가 있었다. 견딜 수 없다고 느낀 그 마음마저도 결국은 나의 일부였음을...



나의 고통은 처음엔 말이 되지 않았다.
몸에 퍼지는 통증이 아니라 말끝마다 나 자신이 지우개처럼 쓱쓱 지워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떤 고통은 외면당할까 두려워서, 어떤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아 차마 말할 수 없어서.


그런데 지금은 그것들이 ‘말’이 되었다.


이건 아팠다고, 이건 견뎠다고, 이건 나였다고.
그렇게 한 마디씩,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환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 고장 난 줄도 몰랐던 ‘나’라는 기계가 다시 작동해 보려는 느낌이었다. 삐걱거리지만 멈춰 있진 않았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누군가의 치료 대상이 아닌,
내 목소리로 내 삶을 말할 수 있는 ‘주체’로 세워주었다.


그건 고통을 잘 견뎠다는 훈장이 아니라 버티고 흘러온 시간 위에 어쩌다 남겨진 자취였고 우연처럼 다시 입에 올리게 된 잊고 있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문법도 틀렸고 발음도 불안정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내가 나였다는 걸 증명해 주는 단 하나의 표지였다.


말이 말을 넘어서 회복해 내는 증거.
비로소 내가 나로서 거기 있었다는 흔들리지만 확실한 서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린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종종 의사와 환자, 치료자와 피치료자라는 경계가 없다고 하셨다. 생명 앞에서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누구도 높거나 낮지 않다고.

고통과 회복의 길은 늘 함께 걷는 길이라고.




몸을 누를 때 의사 선생님의 손끝은 늘 조심스러웠다.
압통점을 눌렀을 때는 나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처럼 표정이 가끔씩 일그러졌다.


“여기가 왜 또 아프지.”
“아픈 데가 아닌데.”
“힘을 이 정도 줬는데도 이렇게 아프다고?”


이렇게 아프면 의사 입장에선 진단이 아니라 해석이 되어버릴 것 같다. 통증의 근거를 찾기보다 통증을 납득시키는 설명을 먼저 생각해야 하니까.


수치와 기준, 교과서적인 패턴을 따라야 하는 손끝이 나처럼 정돈되지 않은 통증 앞에선 잠시 멈칫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까지 아프면 어딘가 더 깊은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더 복잡한 사연이 있거나, 명확하게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면 설명조차 조심스러워질 수도 있을 것이고.


“스트레스가 좀 있으신가요?”

같은 말은 너무 무책임해 보이고,


“정신적인 원인일 수도 있어요”

같은 말은 환자의 고통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망설여지기도 할 것 같다.


이상한 쪽은 통증이 아니라 나인 것 같았다.


아프지 말아야 할 곳이 아프고, 아파야 할 만큼만 아프지도 않고, 그저 애매하게, 괜히, 과하게 반응하는 신체가 민망할 때도 있었다.


몸이 아니라 고장 난 감정 회로를 들킨 듯, 내가 참 이상하다는 사실이 손끝을 타고 진단되기라도 한 듯, 주사실에 눕기보다 들켜 눕는 기분이었다.


의사의 표정은 연민과 놀람, 그 사이 어딘가였겠지만, 내 눈엔 '왜 아플까요'라는 말이 자꾸 입꼬리 근처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원장님, 저도 모르겠는데요, 저도 좀 묻고 싶어요. 왜 또 오늘은 여기가 "이렇게" 아픈 거죠? 도. 대. 체!!




진단명은 나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나는 ‘무엇’이 아니라 ‘누구’였다.


만성통증이라는 진단명과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카테고리에, 소카테고리는 불명열.


그 말은 곧, 뚜렷이 보이지도 않고, 명확히 설명되지도 않으며, 치료도 방향이 없다는 뜻 같았다.
이름이 붙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는 진단.


지도 위에 "미지의 영역"이라고 적어두는 것처럼 이름을 적어 넣음으로써 미지인 채로 남겨두는 것.


병명이 생긴 순간 안심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어쩐지 더 떠밀린 느낌이었다. 덜 아픈 것도, 더 명확해진 것도 아닌데 그냥 어디론가 분류된 것뿐이었다.


의학적으로는 분류가 되었지만 내 통증은 여전히 어중간했고 어설프게 고립되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적도 있었다.


수십 번, 거짓말 보태서 수백 번 반복될수록 이름은 있는데 해명은 없고 설명은 있는데 해답은 없어서 통증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이제는 내 몫이 된 느낌이었다.


의사의 손과 의학의 언어를 떠나 "내가 감당해야 할 나"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진단명은 내게 필요가 없었다.


아프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믿게 하기 위해서만 붙여지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허가였다.

고통을 느껴도 된다는 허가.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는 허가.

고통은 애초에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진단이 없을 때도 고통은 있었고 이름이 붙지 않아도 삶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묻지 않는다.
“정말 아픈 걸까?” 하지 않고 느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진단이나 타인의 인정 없이도 고통은 유효하며 나의 느낌과 경험을 신뢰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나는 증상을 채집하고 견디고 끝내 말이 되는 통증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그 이름을 얻게 된 순간, 나는 내가 더 설명 불가능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의사에게는 분류의 도구였겠지만 내게는 낙인의 한 종류였고 병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상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되었다.


진단명은 나를 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책임을 옮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얻고도 나는 여전히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애매한 통증의 언저리에 혼자 남아 있을 때도 있었다.





자율신경 실조증이 또라이 병이라니?


나에게는 베프, 찐친이 세 명 있다. 작년 겨울, 차마 말로 옮길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할 때 그들은 서울에 있을 때마다 곁에 있어줬다. 대구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속으로는 얼마나 입이 간질거렸을까. 그토록 기이하고 설명 안 되는 내 상태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회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A가 웃으며 툭 내뱉었다.


“그 병, 또라이 병이잖아.”


참네, 인스타 메시지로도 또라이 병이라니 웃겼다.
그리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정말 맞는 말 같았으니까.ㅎㅎ


이런 애매한 고통을 지나온 나로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고통이 애매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수치에 안 잡히고 영상에도 안 보인다고 해서 아픈 사람이 “정상이길 바라는 사람들의 시선”에 스스로 맞추려 하다 보면 자신을 지워가게 된다.

"누가 뭐라 하든 고통을 부정하지 말 것!!"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그 두 가지만 있다면 가능하다. 증상의 모양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길.

그 작은 신호들을 놓치지 않고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한다. 아프다고 말하는 건 약한 게 아니라 살아 있으려는 의지다.



“또라이 병”이라는 조롱 반, 진심 반의 말은 어쩐지 속 시원하고 솔직하게 들렸다.


차라리 그런 이름이라도 붙여야 설명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농담이라도 있어야 내가 겪는 이 이상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완전히 납득해주지 않는 통증.


“내가 이상한가”라는 결론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던 긴 싸움이라면 싸움이었던 자율신경 실조증!!


‘또라이 병’이라는 비틀린 작명 안에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걱정과 울화와 우정, 그리고 나를 향한 묵묵한 응원이 녹아 있었던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상한 병’이라고 이름 붙여버리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해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이 틀렸다고 끝까지 부정하기엔 나도 내 몸이 너무 낯설었고 그 말이 전부 맞다고 받아들이기엔 아직 내가 나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신경 실조증은 알고 보니 내게 가장 가까이 머무는 ‘효자병’이었다.


옛날에는 거칠고 독했지만 지금은 꽤 얌전해지고 나와 살갑게 지내며 이제는 그렇게 불러줘도 좋을 만큼이다.


아프지 않은 그 시간들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24시간 내내 아픔이 오는 것이 아니어서 그 잠시의 평화는 내게 숨 쉴 틈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잠시 말을 멈추고 잊혔던 나를 다시 불러내는 것만 같았다.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끝없이 흔들리는 파도 속에 휩쓸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 짧은 멈춤은 어쩌면 내게 남은 가장 간절한 위로였고 다시 견디게 하는 고동이었다.




치유는 해명이 아니라 이해로부터


자신이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라는 김정훈이라는 분은 내가 살아오며 마주한 어떤 의사와도 전혀 달랐다.


누군가는 ‘또라이 병’이라 부르는 이 기묘하고 낯선 증상을 안고 있어도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돌발적인 반응이 튀어나와도 그것을 병리로 재단하기보다는 그 모든 것이 나만의 고유한 성향이라도 되는 듯 특별하다는 말로 감싸 안았다.


내가 고통의 문턱을 한 고비 한 고비 넘을 때마다 희미하게 젖은 눈동자를 가만히 떨고 계셨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과 끝내 흐르지 않는 울컥한 침묵.


이상했다.

아팠던 것도, 견뎠던 것도 분명 나였는데...


아마도 그 눈물은 나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 테다.


과거에 치료했지만 결국 지구별 소풍을 떠난 이들,
지금도 병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
그리고 어쩌면 의사야말로 죽을 만큼 아파도 말 못 했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의사에게 환자가 회복하는 순간은 기적처럼 벅차면서도 끝내 구하지 못한 얼굴과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는 잔인하고도 무거운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 눈물은 흐르지 못한 채 흐르기 직전에서 멈춰 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통은 나의 몫이었지만 그 고통을 지켜보는 일은 또 다른 누군가의 몫이었다.


나는 견디는 쪽이었고 그분은 바라보는 쪽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의 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짐조차 서로에게 닿아 있었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 역시 회복의 길목에서 치료의 문턱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자주 울컥했다.


울음을 삼키며 끝끝내 흐르지 않은 눈물은 눈동자를 촉촉이 적셨고 숨은 불안을 그분은 놓치지 않았다.


차마 넘치지 못한 감정의 가장자리에 선 내 마음을 건드렸고 잠시 시선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장면을 나는 몇 번이나 보았다.


감정이 머무는 자리에 함께 머물러 준사람, 그리고 함께 울어준 사람... 바로 나의 주치의 선생님이다.




함께 통과한 하나의 지점


나는 그 눈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치료라는 것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낫게 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조심스레 건네고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 앞에서 역할을 벗고 존재로 만난다.


이 지구별 여정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와 ‘너’로 나뉘지 않는 동행자.


누군가는 손을 내밀고 누군가는 그 손을 붙잡고 그렇게 삶은 계속 이어진다. 나는 그분께 모든 생명을 향한 겸손하면서도 숭고한 태도, 그리고 자신을 도구로 내어주는 일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나’와 ‘너’로 나뉘지 않는 이 길 위에 함께 걸어주는 의사가 있다니 참 따뜻하고 고마운 일이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 준 사람.
그 자리에서 나와 나뉘지 않은 사람.


진단이나 타인의 인정 없이도 고통은 유효했다. 나의 경험은 그것만으로 진실이었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아픔을 의심하지 않는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 다른 자리에 있었지만 고통이라는 하나의 지점을 함께 통과했다.


어느 날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회복이 나에게도 힘이 됩니다.”


자율신경실조증이나 불안이 동반된 상태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늘 작은 회복의 반응에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어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의사 선생님의 마음이 참 감사했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나아지면서 좋아질 때마다 그 행복을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됐다. 불편할 땐 머뭇거리지 않고 다다다 쏟아내듯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덤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참았을 감정들.
흘려보내거나 애써 외면했을 감정들.
이 모두가 치료의 일부가 되어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하지 못했던 시간들은 나를 잠식했지만 말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마치 낡은 관절을 움직이듯 삐걱거리며 꺼내는 감정들이 이제는 생존 본능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말은 약이 아니었지만 분명,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회복이었고 살고 싶다는 내 식의 언어였다.


우리는 말이 아닌 고통으로, 마음으로 서로를 건넜다.

한쪽은 진료실의 의자에, 한쪽은 치료실 베드에 누워 있었지만 그 자리는 결코 수직이 아니었다.


나는 그분의 언어 속에서 치유가 곧 연대임을 알게 되었다. 고통은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옅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같은 어둠을 다른 방향으로 건너며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안부가 되어주고 있었다.


고통이라는 한 줄기의 길 위에서 마주 서서 각자의 무게를 나누며 고통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나를 치료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봐주어서
나는 병명이 아니라 경험을 했다.



지난 5월 6일, 입원 수속을 밟던 날.

주치의 선생님이 내 브런치 글을 여러 편 흥미롭게 읽었다며 말씀하셨다.


“감정 밑에는 욕구가 있어요.”


감정은 그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씨앗이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 씨앗은 곧 ‘바람’이고 그 바람은 자율신경의 흐름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다.


나는 힘겹던 당시의 고통을 꺼내놓고 있었고 원장님은 내 증상을 고이 담고 계셨다. 예컨대 이유 없이 식은땀이 잘 나지 않는 증상, 부인과 질환으로만 생각했던 배뇨 문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기복들...


그런 증상들에 대해 그제야 자율신경 때문이라고 하셨다.


내가 유난해서 그런 것도, 참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 내 몸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증상을 성격 탓이나 멘탈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신경학적이고 생리적인 맥락으로 바라봐 주는 그 시선은 나를 있는 그대로 과학적이자 인간적으로 진찰해주고 있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내 고통은 더 이상 나만의 잘못도, 불투명한 정체도 아니게 되었다.

이유가 있는 현상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는 위안!!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증상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정체 모를 불안과 통증, 복잡한 감정의 파동들에 자율신경 때문이라는 진단명을 내게 붙여주었을 땐 마음속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처음부터 병명에 못을 박았더라면 불안을 더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그 진단이 나를 ‘병든 사람’으로 고정시키는 틀이 될 수 있었으니까.



진단이란, 마음속 안개를 걷어주는 등불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느껴질 위험도 있다.


지금이야 나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지만 예민하고 자기 감각에 섬세한 사람일수록 ‘진단명’은 원인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 전체를 어떤 고정된 병의 이름 아래 가두는 틀이 되어버릴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버텨낸
사람이 아니라 자란 사람이다.


자율신경 때문이라는 넓고 유연한 의사선생님의 설명은 복잡하게 뒤엉킨 내 증상과 감정 사이에 여백을 만들어주었다.


그 여백 덕분에 나는 조급해지지 않고 스스로를 해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게 되었다.


처음부터 병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면 나는 이 모든 반응을 이 병의 '증상’이라 단정 지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 몸의 반응과 감정마저 병의 하위 범주로 규정하며 더 깊이 억누르고 병에 종속시켜 버렸겠지.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내 고통을 조금 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판단보다는 관찰로, 부정보다는 이해로.



고통을 꺼내놓을 때마다 단 한 번도 가볍게 흘려듣지 않으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도 모르겠는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는 듯 나에게 해주신 말씀들은 조심스러웠다.


그런 말은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감사했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았기에....


최근에 입원 전 대화하다가 나에게 트라우마의 충격파에 휘청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진심 어린 ‘이해’처럼 느껴졌다. 이분은 정말로 나를 알아주었다.


그토록 힘든 일을 겪고도 이제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그 경험을 스스로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나의 태도는 정말 특별한 씨앗 같다고.


명상과 수행을 오래 해온 사람들도 쉽게 갖기 힘든 깊이 있는 관점이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건네주셨다.


나를 완성된 사람처럼 존중해 주었고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너무도 행복하고 뿌듯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원장님의 입가에 번진 잔웃음은 촤르르 물결처럼 퍼졌고 그걸 보는 나는 짜릿했다.


그날 나는 병원 입원 수속을 밟기 전이었는데 도무지 실감 나지 않게 들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히죽히죽 웃음이 맺혔다.


나는 고통을 버텨낸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자라나게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 기분을 느꼈다.




감정은 욕구의 언어였다.
회복은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나는 타인의 인정을 별로 목말라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그런데 주치의선생님께만은 예외였다.


회복되었다는 그분의 칭찬에 마음이 들뜨는 나를 보며 나도 조금 놀랐다.


글 쓰는 지금, 불명열이 몇 달간 잠잠하다 재발하여 치료 중이라 회복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회복은 ‘더는 아프지 않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웃으며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겪은 그 모든 증상들은 나에게 배움을 주기 위해 찾아왔다.


시인 잘랄라딘 루미의 말처럼 손님이다. 아주 소중하고 귀한 손님.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느꼈다면 그 밑에는 이해받고 싶다, 존중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을 수 있다. 화가 날 때는 공정함, 안전, 자율성 같은 욕구가 무시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걸 또다시 배우게 되었다.

슬픔은 연결, 사랑, 소속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에 생기기도 한다.

감정은 어떤 욕구가 충족되었거나 충족되지 않았을 때 별똥별처럼 튀어나와 오로라처럼 퍼져나가는 것 같다.


아주 잠깐의 반짝임 속에 오래도록 마음을 물들이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감정만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한 걸음 더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되새긴다.

그렇게 하면 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에도 더 깊은 이해와 연결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픔을 노래하는 삶의 연가



25년 5월 10일 토요일

병원에서 하는 독서모임에서 원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정을 무시하고 일을 하라는 건 폭력이에요. 마음의 경고등을 꺼버리는 것과 같아요.
아픔을 모른 척하며 그저 버티고 꾹 참고 일만 하라는 건 몸과 마음을 고장 내는 일입니다."



생존을 알리는 가장 솔직한 언어!!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마음의 감정들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꺼내 놓을 수 있었다.



고통에서 허우적거릴 당시에는 원장님의 글을 읽었을 때 마음이 얼어붙은 겨울 강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쓰다듬듯, 눈 녹듯 녹아내리고 숨겨진 슬픔은 희미하게 반짝인다.


완전하지 않아도 이 세상 한가운데 서 있음을 느낀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도 거기서 피어난 어떤 연민과 사랑이 내게 새벽처럼 찾아온다.


고통과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인이며 그 사랑이 나를 지금 여기로 이끌었음을...

고통마저 노래가 되는 고마운 나의 삶...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덜 무섭고 덜 두렵다.




생존과 감정의 연결, 생명 에너지의 단계적 하락 과정까지 잘 짚어주신 주치의 선생님의 글입니다.


https://brunch.co.kr/@nothing8/199




통증보다 더 아팠던 건 ‘강요’였다.
위로가 되어준 '멈춤'



주사 치료 효과가 유난히 좋았던 날에는 의사선생님께 다음번 치료 때 더 많이 맞고 싶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주사를 많이 맞는다고 해서 금세 나아지는 병이 아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엔 똑같은 주사도 유난히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원장님은 많이 힘드냐며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고 먼저 말씀해 주셨다.


만약 그 자리에서 무조건 맞아야 한다고 했더라면 몸은 강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건 주사 한 번이 아니라 그 모든 순간이 ‘겁’이 되고 ‘트라우마’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통증보다 더 큰 공포로 남아 병원 문턱조차 넘기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닌 그 순간이 내게는 너무 커다란 일이 되어 아프다는 말을 꺼내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지고 고통을 드러내는 것마저도 ‘민폐’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하지만 원장님은 항상 참기 힘드세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춰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나는 그 말들 덕분에 병원을 계속 올 수 있었고 다시 주사실 베드에 누울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저 흘려보냈을지도 모를 그 말들이 내겐 약보다 더 큰 힘이었다.


소리쳐도 괜찮고, 멈춰도 괜찮은 곳이라는 믿음.




그 말들 덕분에 나는 내 통증보다 나 자신을 먼저 믿을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아졌다.


물론 지금도 주사가 편한 건 아니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주사실 앞에 앉아 있던 내 모습, 눈은 이미 반쯤 젖어 있었던 날들. 그땐 정말 몰랐다. 이렇게 좋아질 줄은...


바람만 불어도 아팠던 나였다.

그 멈춤이 나를 살렸다.


예민보스인 나를 부드럽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조금씩 몸을 내어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라 말 한마디가 마음을 다독이고 삶을 견디게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주사치료실에 들어가면 그 말이 떠오른다.


“많이 힘드세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적으라는
주치의의 숙제, 그리고 나의 치유



2024년 5월 8일


살만해지자, 치료를 잠시 멈췄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내게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예상대로 주치의 선생님이었다. 매일 아팠고, 매일 열이 났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새롭고도 이상한 숙제를 내주셨다.


이름하여 ‘기록하기'

열이 언제부터 얼마나 자주 났는지 그걸 6개월 동안 평균치를 내며 꾸준하게 작성하란다.


사실 통증일기도 가끔은 벅찼다. 살아 있는 게 너무 분주해서.


그런데 숫자까지? 심지어 평균을 내라고?
흔쾌히 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치료’가 아니라 ‘인내심 훈련’ 같았다.


진료실에서 빠지지 않던 질문.
요즘 감정은 어떤지.
가장 힘든 건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

치료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끝나긴 하려나...)




예상할 수 없는 끝과 예측 불가능한 회복이라 처음엔 그냥 희망고문이었다. 좋아하는 걸 떠올려보라니 초환으로 병원에 왔을 땐 의사가 아니라 면접관 같았다.


아픈 것도 버거운데 가족관계는 왜 묻고 직업은 왜 묻는가. 내 삶의 인사기록카드를 통째로 들춰보는 그 순간 나는 몸을 쭈뼛하며 쑥스러워 움찔 접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자꾸 치료를 받다 보니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은 병을 들여다보는 대신 나를 보려는 의사였다.


통증이 아닌 사람을 마주하려는 용기와 삶의 결을 만지려는 의사답지 않은 손, 환자와 연결되려는 불 필요해 보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마음.


통증일기와 감정일기를 쓰고, 펼칠 때마다 주치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몸이 말을 안 들어도 기록은 당신의 언어가 될 수 있어요.”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적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 실망할 것만 같았다.


처음엔 매일 열이 나는 상황에 살짝 버거웠지만 차츰 마음이 열렸고 이제는 스스로 손이 움직인다. 꾸준히 써 내려가던 글자 사이로 감춰진 감정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아, 나 이때 좀 많이 몸이 힘들었구나.

아, 이건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슬펐던 거구나.


기록은 치료보다는 나와 연결되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시간을 건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시간을 함께 읽어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살아 있는 나’를 다시 적기 시작했다.


약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회복의 언저리에서 언어가 나를 살짝 끌어올려줬다.


치료는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됐다.


나를 쓰는 일.
나를 보는 일.
살아 있다는 건 자꾸 다시 적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는 나를 적고 있다.
조금 삐뚤지만 정확하게.




병원에 가면 보통은 아픈 데만 말했다.


"열이 나요."
"숨이 차요."
"밤마다 통증이 심해요."


삶을 들여다봐주는 의사를 만난 후 통증은 언제나 몸에서 시작되지만 거기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이라는 것은 마음의 언어로도 말한다.


삶이 무너진 자리, 외로움이 쌓인 시간, 희망을 잃어버린 틈 사이에서 병은 더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도 물었다.
요즘 기분은 어떤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치료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약과 처방만으로 치료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철학에 나는 100% 동의한다.


병을 깎아내는 게 아닌 사람을 다시 세우는 일.

기록하라고 하신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몸이 들려주는 말을 조금이라도 눈에 보이게 하고 싶었던 의사의 따뜻한 진심.




횟수, 강도, 빈도를 적다 보니 숫자 속에도 삶이 들어 있었다.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날 하루가 어떤 무게였는지가 담겨 있었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도 중요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내가 나를 살피고 있다’는 건 살아 있으려는 작은 희망이 되어주었으니까.


의사로서 사람의 삶을 묻는 일은 자칫하면 무례해질 수 있는데 그 용기가 너무 멋지신 것 같다.


사람의 통증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


몸의 회복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분.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고, 때로는 기다려주시는 분.


환자를 얼마나 간절히 고쳐주고 싶으면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까.


어느 날 진료 대기실에 있던 내게 어느 환자분이 물으셨다.


"환자분도 원장님이 이런 거 물어보셨어요? 저 여기 처음인데 이것저것 다 물어보시더라고요. 요즘 세상에 이런 의사가 잘 없는데 너무 좋으시네요..."



내 주치의 선생님은 아무래도...

환자 바보이신 같다.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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