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물러난 자리에 말이 남았다
수술 전 입원 수속을 마치고 나니 주치의 선생님과의 약속(미션)이 떠올랐다.
열체크를 보내드렸고 현재 상황을 나중에 말씀드리려 했지만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
2024년 5월, 어둠이 다시 나를 덮쳤다.
삶에 대한 어둠의 그림자가 되살아나 밤낮으로 끝없이 맴돌았다.
기록이라는 건, 때로는 잊히길 바라는 마음과 잊지 말아야 할 기억 사이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흔적 같다.
인스타그램 보관함을 열었더니 불과 1년 전의 절망이 손끝을 스쳤다.
“감정이 말랑해졌다고 했지만...”
잊힌 게 아니라 감정들이 따뜻한 곳으로 숨었다가 느슨한 틈으로 다시 올라온 것이다.
잊는다는 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아지는 일이라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고열이 몸을 집어삼켰다.
두통과 함께 몰아친 열기로 공포가 밀려왔다.
2023년 9월의 고통과는 또 다른 낯설고도 깊은 절망이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될 무렵, 고통은 하나둘씩 따라붙었다.
그 끝 모를 괴로움에 분노를 담은 노트를 찢고 SNS를 거칠게 채웠다. 말과 글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와 그 미움을 온몸으로 토해냈다.
2024년 4월~5월 초
거의 한 달 동안 고통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해저 수천 미터, 빛 한 줄기 스며들지 않는 심연.
몸은 바닥에 눌려 있었고 그 위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무자비하게 덮쳐왔다.
팔다리를 한 번 움직이려 해도 몸이 아니라 의지가 먼저 망가졌다.
고통은 의식이 있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았다.
고통은 흐름이 아니라 공간이었고 나는 갇혀 있었다.
그래서 잤다.
자는 척이 아니었다. 탈출이었다.
고통을 밀어내는 유일한 도피.
숨을 참고 물속으로 가라앉듯 잠은 의식의 조명을 하나씩 꺼뜨렸다.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듯,
잠은 고통의 반대편으로 나를 데려갔다.
기억이 꺼지길 바랐다.
꺼짐이 곧 평온이길, 그 평온이 영원이길 원했다.
살아 있으나, 사라지고 싶었다.
죽음이 아니라 고통의 반대편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머리는 하루에 한쪽씩, 천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네 구역으로 나눈다면 그중 좌우측 바깥, 불룩 튀어나온 뼈 언저리.
통증은 늘 그 어딘가에서 잉태되었다.
기이한 건 고통에 방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한 줄기 통증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 관자놀이를 누르고 머리 옆면 전체를 천처럼 덮었다.
밤이면 정점에 이르렀고 통증은 리듬 없이 들이쳤다.
일관성도 없이 속은 울렁였고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전두엽이 얼얼했다.
5일째 이어진 두통은 진공청소기가 목을 당기듯 머리를 조였다.
벽에 기댄 채 “두통약 광고의 장면처럼” 버티면서도 실제로는 절규하는 시간이었다.
삶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한 연인처럼.
그런데 또,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건 마치 죽음의 연습을 마친 뒤에 잠시 쉬는 숨 같았다.
하지만 두통은 모든 걸 다시 배신감으로 물들였다.
기적도, 미안함도, 감사도 의미 없는 감정 사기극처럼 보였다.
내가 얼마나 성심껏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드라마 속 억울한 주인공이 뿜어내던 대사가 입에서 악처럼 터져 나왔다.
연기 없이, 무대 없이 이 삶 자체가 각본 없는 고통이었다.
그동안 버텨온 것들은 내가 만든 이력서처럼 허약했고 삶을 포기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나를 해부하듯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정상 체온 36.6도.
그것은 따뜻한 물을 붓는 순간 바닥이 빠져버리는 컵 같았다.
잠깐의 안도는 있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곳엔 평온이 아니라 공허가 있었고 무력감이 먼저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고통이 ‘잠시 외출 중’인 상태였을 뿐 행복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다는 사실은 행복의 정의에는 없었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마음은 앓고 있었다.
몸만 고치면, 마음도 자동으로 전부 따라올 줄 알았다.
체온이 돌아오고, 다시 걷고, 먹고, 일상으로 돌아와도
가슴속에 남아 있던 억울함, 설명되지 않는 무기력은 끝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세상은 내가 낫는 걸 기뻐했지만 나는 낫지 않았다.
겉은 봄인데 속은 아직 골목 안쪽의 음지였다.
겉모습이 햇살 같으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괜찮다는 말을 진통제처럼 씹어 삼켰다.
말할수록 더 괜찮지 않아질까 봐 눌렀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체념 위에 얹은 소망이었다.
기대하지 않는 척하면서 끝까지 기대하고 있었다.
현실은 그런 기대에 아무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기대와 현실의 간극은 슬픔의 틈이 되고 그 틈으로 배신감이 흘러나왔다. 대답 없는 세상 앞에서 무너진 건 체온이 아니라 삶에 대한 신뢰였다.
행복이란 단어를 어느샌가 ‘문제없음’과 바꿔치기하고 있었다.
행복을 정의하는 기준도 바뀌었다.
문제없음 = 행복.
고장 나지 않았으니 정상.
쓰러지지 않았으니 괜찮음.
그 논리는 "살아 있음"이지 살아 있음의 행복은 아니었다.
숨은 쉬고 있는데 버티는 삶엔 숨 쉴 틈이 없었다.
나의 행복은 목표 도달의 보상도, 통증 없는 상태도 아니다.
시들지 않기 위해 울지 못했다
행복은 어떤 성취나 회복의 표지판이 아니었다.
계획대로 흘러간 하루, 정상 체온, 지금까지 살아냈다는 기념 배지는 빈자리를 메워주지 못했다.
행복은 오히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때, 그 말의 체온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마음 안 어딘가에는 끊임없이 뚫린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은 물보다 말을 먼저 마셨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달래며 믿었다.
아프지 않으면 괜찮은 거고 울지 않으면 성숙한 거라고.
알량한 자존심을 조이는 실로 눈물샘을 꿰맨 듯한 하루들이었다.
참다가 울었고 울다가도 다시 참았다.
고통은 자주 물보다 무거운 침묵의 형태로 찾아왔다.
누군가 내 속 이야기를 들을까 봐,
말이 나와버리면 감당 못 할까 봐,
자주 입을 닫았고 나를 뿌리째 고립시켰다.
말하지 않기로 한 말들, 설명하지 않기로 한 고통들이 방 안의 온도를 몇 도씩 깎아내렸다.
나의 그 시절은 봄이 아니라 입춘이 무색한 겨울이었다.
그 겨울은 단지 춥지 않았다.
정지된 감정 위로 얇은 얼음이 몇 겹이고 덮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겨울날들의 연속이었고 감정은 자꾸 시들어갔다.
누군가 물을 안 준 게 아니라 물은 있었지만 뿌리가 뒤틀린 화분처럼.
그 시듦은 죽음도 아니고, 성장도 아닌 버티는 생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햇빛에 반응하지 않는 식물처럼 나는 잘못 심어진 채 몇 번이나 무력하게 지나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
문턱에라도 닿아주면 나를 다시 사람처럼 느끼게 해 줄 무언가.
고통은 나눌 때 줄어들고 이해받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삶이 나아져도 마음은 그늘진 곳에 머문다.
나의 마음의 계절은 아직 해동되지 않았다.
햇살은 뜨거운데 마음은 얼어붙은 웅덩이처럼 텅 빈 채로 반짝이기만 했다.
행복이란 건, 언제부터인가 거대한 목표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끝내야' 얻을 수 있는 결승선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아주 조용한 순간에 그 이름 모를 감정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누군가 건넨 말 한 줄.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한 점.
감당하지 못할 만큼 올라오다 빵 하고 터져버린 눈물 뒤에 찾아온 안도감.
행복은 이겨낸 끝이 아니라 그렇게 지나가다 슬쩍 어깨를 두드리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나에게 묻는다.
‘오늘, 넌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지나왔니?’
좋았니? 안 좋았니?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 않았니?
내가 원하던 행복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아직 갖고 있는 걸까.
그리고 만약, 오늘 너를 단 1도라도 덜 아프게 만든 게 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 작은 1도에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게 어쩌면 나의 회복이 아닐까.
2024년 5월 6일
사람은 누구나 힘든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생명의 위협은 언제든 받을 수 있는 미약한 존재임이 분명하건만, 내가 무어라고 그런 것에서 나만 혜택을 받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되면 안 돼!라고 혼자 잘난 척을 했단 말인가.
모래로 만든 성은 반드시 무너진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나의 실체.
그것을 견뎌야 한다고, 끝내 살아야 한다고, 막연히, 너무나 단호하게 배워왔다.
나는 스스로를 예외라 여겼다.
이만큼 버텼고, 이만큼 조심했고,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살아왔다고.
그래서 나는 이런 일들에서 조금은 비껴 날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별일 없다는 얼굴을 하고 살았지만 실은 그 안이 가장 먼저 무너져 내렸다.
나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존재였고 살아 있다는 건 그저 잠시 동안만 허락받은 균형일 뿐이었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다.
삶의 구조는 너무 가벼웠는데 나는 그 위에 너무 많은 것을 얹었다.
무너진 건 성이 아니라 내가 만든 착각이었을지도.
사람은 무너질 수 있고 그렇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산산조각과 잔잔함, 정적과 나약함.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가 된다.
명치의 통증은 분명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를 채운 답답함...
통증이 떠난 자리엔 늘 다른 것이 들어찼다.
공기보다 무거운 감정,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 혹은 눈물.
밤과 아침 사이 열이 일었다.
강으로 갔다가 중으로 갔다가 다시 강으로 되돌아오는 파도 같은 발열이었다.
한 번 식을 듯하면 다시 타올랐고 잠깐의 평온은 다시 고통이 올 것이라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속상했다.
그게 다였다.
어떤 단어도 그 단순한 진실을 넘지 못했다.
복잡한 원인을 추적하다 말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살아 있어서였을까.
고통의 한복판에서 나를 울린 것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내가 아직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슬픔과 분노가 여전히 내 안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안다.
내가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들이 모두 나의 몸과 함께 살아 있으려는 저항이라는 것을.
아프고, 속상하고, 눈물이 흐른 날.
나는 조금 더 투명해졌다.
조금 더 솔직해졌고, 조금 더 살아 있는 나로 돌아왔다.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려 할 때마다 자율신경이라는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제는 정말 안 된다”는 몸의 절박한 신호가 느껴졌다.
4월까지 치료를 받으며 며칠 동안 두 번 찾아온 변비는 스쳐 지나간 듯했지만, 자고 일어나니 하혈이 흥건히 쏟아졌다.
뚝뚝 떨어지는 피는 심상치 않았다.
굵고 무거운 덩어리들이 몸속에서 불쑥 빠져나왔고 믿을 수 없었다.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피 앞에서
‘이제 진짜 내 삶이 끝나는구나’
물먹은 천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며 화장실로 향하는 길,
피는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 하염없이 바닥을 적셨다.
당장 몸속 어딘가가 터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수술을 예상했고 그 예감은 100% 적중했다.
이토록 많은 피를 잃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께는 단 한 줄의 메시지만 남겼다.
“병원에 입원해요”
그 이상은 쓰지 못했다.
말을 늘어놓으면 두려움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당장 기댈 곳 없는 자의 침묵은 그렇게 짧고 무거웠다.
구급차를 부르기엔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 발로 가고 싶었다.
붉은 피가 계속 쏟아져 처치를 하고 입원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며 의연한 척을 하고 있었다.
피는 뜨겁고, 불쾌했고 무엇보다 계속 두려웠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생명의 체온이 이제는 고통으로만 전해졌다.
진단명: 급성 항문열 Acute anal fissure
병원에서는 하혈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부정출혈도, 위장도 아닌 항문 파열이라는 낯선 고통의 이름으로 번역됐다.
의사의 얼굴은 말보다 먼저 반응했다.
“파열되가지고...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요! 수혈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지금의 나는 위험으로 분류된 서류 없는 진단서 같았다.
상태가 아닌, 결과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판단이 아니라 처리가 필요한 사람.
몸을 비워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대장내시경 약이 건네졌다.
약은 냉기를 품은 액체처럼 식도에서 위장까지 한 번도 익숙해 본 적 없는 이질감을 남기며 내려갔다.
마시는 순간,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리고 곧, 거세게 모든 것을 토해냈다.
화장실을 열 번 넘게 오갔다.
앉는 행위는 더 이상 자세가 아니라 형벌이었다.
찢어진 자리 위로 또 한 번 찢어내는 고통이 쌓였다.
그제야 피나는 고통이란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수술대에 눕자마자 새우 자세를 하라고 한 뒤 의료진의 손길이 바빠졌다.
척추 마취가 시작되고 수면 마취가 연결됐다.
그러나 마취가 완전히 깨고 나서 의식이 돌아오자 통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살 속이 꿰매졌다는 게 이제야 몸 전체로 느껴졌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울상을 한 채 다가왔다.
“굉장히 심했습니다.
용종도 아홉 개나 있었어요.”
그러고는 말을 조금 멈췄다.
이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상태에 비해) 회복은 빠릅니다."
말로만 듣던 치질 수술.
유리를 항문으로 낳는 느낌이라는 둥 아프다는 이야기는 익숙했다.
고등학교 친구가 흘리듯 말했던 기억, 유튜브에 참을 수 없었다는 자막들까지...
앞으로 어떤 일이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날의 나는,
‘모른다는 것’이 잠시 평화를 허락하는 순간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순간에도 고통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이토록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체면을 먼저 세우려 했다.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는 다시 고통을 삼켰다.
나는 병명이 많았다.
불명열에 피부도 뒤집히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거기다 졸지에 치질 수술까지 했던 나.
그런데 어느 날부터
퍽하면 “자율신경실조증이래요”라고 돌리기 시작했다.
“자율신경 문제일 수도 있어요.”
배가 아파도, 심장이 두근거려도, 어지러워도,
몽땅 그쪽으로 묶였다.
묶음 발송.
감정도, 통증도, 불면도, 체한 기분도.
다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큰 봉투 하나에 넣어 발송.
병명이 자꾸 늘어나는 것보다
딱 하나로 묶이는 게 마음이 덜 피로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그 병이라는 이름은 내 마음의 무수한 별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했다.
각기 다른 빛깔과 온도를 지닌 별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한 가지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내 삶에 드리운 그림자는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성운처럼 날마다 모양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내가 겪는 고통과 무기력을 먼 은하계의 먼지 조각처럼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 먼지들이 모여 앞을 가리고, 길을 잃게 한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우주가 무음의 바다를 자신의 궤도 안에 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위한 작은 행성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그곳은 아픈 별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곳이었다.
그동안 세상을 보는 나의 렌즈를 왜곡시켰지만 그 왜곡 덕분에 더 많은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쓰러지고, 무너지고, 시들어도 그 모든 고통이 우주에 새겨진 깊은 별자리임을 알았다.
나라는 우주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빛나야만 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처럼 깊고 넓게 퍼져간다.
내 몸은 난리였지만 병명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덜 어지러웠다.
혼란한 감정들을 수납해 주는 작은 서랍장이 되어주었다.
서랍을 열어 통증과 감정을 차곡차곡 집어넣으며 아무렇게나 흘러넘치던 것들이 잠시라도 정리된 척,
괜찮은 사람인 척할 수 있었다.
병은 삶에 틈입했지만 그 틈에 작은 질서가 생겼다.
병명이 나를 옭아매는 족쇄인지 흩어진 나를 한 자리에 모아주는 끈인지 때로는 잘 구분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다.
“어머, 열이 자주 나네요?”
“네! 자율신경이라는 병 때문이에요. 원래 이렇대요.”
대답할 때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생각보다 꽤 편했다.
그들은 걱정을 안은 채
“다행입니다. 어쩜 이렇게 금방 좋아져요?”라고 물었고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웃고 있었다.
가끔은 사람들을 시험하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쉽게(?) 회복되는 몸이라면 아프다는 말은 왜 꺼냈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웃는 얼굴 뒤로는 한 번쯤 돌아버릴 뻔한 순간들이 표정의 끄트머리를 꾹 눌러 붙들고 있었지만.
분명, 몸에서 이상이 있을 가라는 짐작은 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입원 내내 이어진 설명할 수 없는 열이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는 무명(無名)의 열기.
몸은 분명 반응하고 있었지만 그 어떤 진단도, 말도...
그 막연함이 더 아팠다.
의료진의 표정은 수술 때문인가? 하는 듯 점점 신중해졌다.
나는 그 표정을 따라 내 얼굴도 자꾸 굳어갔다.
수술 부위와는 무관한 "자율신경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불명열"임을 설명했고 의료진을 안심시켜야 했다.
아버지가 오셨지만 내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내가 느끼는 방식 그대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호자라는 이름으로만 내 앞에 서 있었다.
고통은 말로 전달되지 않았고 열이 나면 해열제를 써야 하는데 듣지 않는다부터 시작해 무엇을 어떻게 아픈지도 버거워 병명과 증상, 치료 경과를 적은 자료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해 말했다.
“자율신경 실조증과 불명열로 치료 중이에요.”
그 말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명을 멈추기 위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아이러니 속에 있었다.
회복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라 자기 속도로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