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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맞은 작은 기적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옮겨 다닐 뿐이다

by 미리나


기대를 내려놓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발걸음을 틀어 새로운 길로 뱡향을 바꾸는 일이다.

낡은 바람의 껍질을 벗기고 그 자리에 지금의 시선을 조용히 눕히는 것이다.
오래된 계절의 외투를 벗고, 바람의 결을 따라 걷는 듯한 일.


버린다는 말엔 공허함이 있지만 충만을 위한 여백이다.


무언가가 사라지면 삶은 뜻밖의 것들로 채워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흘러가야 할 자리로 흘러가도록 이제는 눈을 부릅뜨기보다 지켜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낡은 기대가 빠져나간 자리에 평온이 깃들면 그제야 나를 다시 세울 자리가 생기는 것 같다.


새로움은 허무의 끝이 아닌, 이해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기대를 손에서 놓았을 뿐 나는 삶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때부터 나는 삶을 더 다정하게 마주하기 시작했다.

삶이 나를 실망시킨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삶은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바깥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고 있었음을.



이해받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며 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깨지고 나서야, 어디에 다시 서야 하는지를 알게 되듯이.



기대는 바람의 얼굴을 하고 다가와 마음 한편에 자리를 튼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기대는 아픔이 되고, 분노가 되고, 절망이 된다.


‘내려놓는다’는 건 그 고리를 스스로 끊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 이상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고,

어떤 일이 꼭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는 생각을 놓으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실망도 줄어든다.
그 대신 마음엔 여백이 생기고 여백 안에서 숨이 쉬어지고,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앞에 몸부림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삶이 반드시 나를 실망시키려는 게 아니라는 것.


삶은 그저, 그러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 어느 날 선물처럼 문턱을 넘는다.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뜻이 아니다.
다치더라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법,
고통의 가장자리를 따라 빠져나오는 법을 서서히 익혀가는 것이다.





기대는 통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랑을 이렇게 받아야 하고, 노력은 이런 결과로 이어져야 하고, 고통은 이쯤에서 끝나야 한다는 내가 정한 질서, 내가 짠 각본.


그러니 기대를 내려놓으면 쥐고 있던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를 놓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삶이 내 방식대로 흘러가게 두는 용납이 들어선다.


그때부터 관찰자의 시선이 열린다.
일어나는 일들을 다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좋고 나쁨으로 분류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흐름이 그냥 잘 '지나가고 있다'는 것과 거기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다.

상실의 자리를 다르게 채우는 일이다.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며 나를 성장시키는 "움직임"일 수 있다.


삶이 나를 실망시켰다는 생각 대신, 삶이 자꾸만 나를 바깥으로, 더 넓은 세계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어떤 날은 참을 수 없었고 어떤 날은 견디는 척이 더 힘들었다.


이유가 없고 끝도 없었다.

다만, 살면서 한 번쯤은 지나가는 것.


고통은 원래 그러한 것이다.

갑자기 오고, 오래 남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잘못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닌, 살면서 지나가는 날씨 같은 것.


어느 날은 폭우고, 어느 날은 미세먼지고,

어느 날은 맑고, 그래서 더 서글프다.



고통이 나를 삼킨 게 아니라 내가 거기서 잠시 살아냈을 뿐이다.


항문 통증은 내가 살면서 겪은 통증 중 가장 길고, 가장 뾰족하며, 가장 끈질긴 것이었다.


숨을 참듯, 몸을 수그리듯 하루하루를 견뎠다.
고통이 너무 생생해서 그 앞에서는 어떤 감정도 힘을 잃었다.


분노도 슬픔도 위로도, 통증 앞에선 모두 무기력해졌다.

지금껏 미치겠다고 말했던 모든 순간이 고통 앞에서는 거짓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그 단순하고 절박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던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수많은 사람들의 치질 수술 경험담을 내 앞에 펼쳐놓았다.


대부분의 수술이 그렇듯, 칼보다 더 날카로운 건 수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회복이었다.


참 이상하다.

타인의 아픔을 보고 문득 내 고통이 덜해졌다는 착각에 빠진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고통 속에서도 서로의 흔들림을 바라보며 묘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그 위로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감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깊은 통증을 꺼내놓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24시간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애쓰지 않아도 건네진 삶



그렇게 봄의 새싹이 고개를 들던 어느 날부터

초여름 더위가 피부에 들러붙기까지 나는 또 한 번 제대로 된 고통을 통과했다.


벼랑 끝.


그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 가장 어두운 통로의 끝자락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오래된 문의 경첩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문은 내가 애써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삶이 아주 우연히 열어준 문이었다.


한동안 그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다시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무너졌다고 믿었던 그 순간이 사실은 시작이었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전환이었다는 것을.



애쓰지 않아도 고통은 삶을 통째로 건네주었다.


원하지 않아도, 바라지 않아도 고통은 삶의 가장 깊은 진실을 한사코 밀어 넣는다.


사랑은 노력해서 얻으려 들고 기쁨은 애써 붙잡아야 다가오며 성취는 수많은 걸음 끝에 겨우 찾아오지만...


고통만은 다르다.
기다리지 않아도, 선택하지 않아도 삶의 본질을 완전히 손에 쥐여준다.



고통은 몸의 구조를, 감정의 결을, 관계 속 진심의 모양을,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의 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고통이 건넨 삶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참으로 진실하다.


그래서일까.
몸이 불편할 때 마음이 가장 가까워진다.


나 자신에게로, 삶의 본모습에게로.


고통은 시련이 아니다.

고통은 삶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다.




위로라는 건 공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생존의 기억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곧장 따뜻함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타인의 고백은 내 고통을 더 또렷하게 반사시켰고 마음은 다가가다 다시 움츠러들었다.



공감이었지만 어쩐지 침투처럼 느껴졌다.
말이 다정할수록 오히려 내 속의 고통이 더 날카롭게 되살아났다.


그건 단지 타인의 고백이 아니었다.

내 안에 고여 있던 감정이 남의 언어를 빌려 제 모습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말은 분명 남의 것이었지만 그 감정의 그림자는 온전히 내 것이었다.


공감은 감싸줄 듯 다가오지만 어떤 감정은 감싸는 대신 더 또렷하게 벗겨지는 것 같다.



위로는 때로 아프다.

치유는 감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벗겨지는 순간에 시작된다.


구원이나 전환은 내가 애써 쟁취한 결과가 아니라 삶이 뜻하지 않게 열어준 하나의 문이었다.


그 문은 예정된 전환이 아닌, 삶의 결을 따라 흘러오다 문득 맞이한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몸의 통증이든 마음의 통증이든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주치의 선생님의 메시지를 살포시 꺼내본다.




“지금 이대로 아픈 대로 고통도 그대로 우릴 어딘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고통은 피하거나 없애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기 쉽다.
그때는 알아차릴 수 없던 고통이 이제는 ‘길’로 보인다.

고통은 길이다!라는 전환은 치유의 시작이 되어주었다.

나를 고장 낸 게 아니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는 인식.



“두려워 말고 당당히 가보라”는 말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통 앞에서 떨고 있는 나를 채근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이제 안다.


그 말은 나를 믿어준 최고의 격려였다는 걸.


나를 ‘못 간다’고 말하지 않은 유일한 말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고통은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다??



경험자의 확신, 자기만의 체험에서 길어 올린 목소리였기에 설득력을 가졌다.


“나에겐 그랬다”는 고백은
“당신에게도 그럴 것이다”라는 희망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 다리를 건너며 회복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불안은 사실보다 수다스럽다”는 말은

많은 정신과 선생님들이나 감정을 다루는 교수님들이 말하는 자동 사고, 인지 왜곡, 과잉 해석이 한 줄로 요약된 것처럼 다가왔다.



진짜 나의 마음은 평온했다.


다만 그 위를 허망한 소란이 쉼 없이 덮고 있었을 뿐.


나는 얼마나 분주했던 걸까.


그 소란이 사라지고 나면,
이렇게도 청정한 자리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청정한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본래 마음도 마찬가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불교의 본래면목, 무심, 학회에서 배웠던 '참나'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었다.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본래의 맑음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진실.



내가 자주 주치의 선생님께 던졌던 질문들!!

"나 이제 망가진 건가요?"
"예전의 나로 못 돌아가는 건가요?"
그 절망에 대한 답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크게 배운 것은
불안을 떨치려 애쓰지 말고,
그 목소리를 내는 나를 바라보라는 말이었다.


불안에 휘말리지 말고 알아차리는 것.
그 목소리를 내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그게 자유에 이르는 첫걸음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의 말들은 살을 뚫고 나온 사람만이 건네줄 수 있는
내적 안내서 같았다.

고통을 통과하는 방식,
본래 마음을 믿는 태도,
허망한 생각을 알아차리는 연습,
불안을 몰아내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시선.

그 모든 것이
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도구함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다른 세계의 문을 건너는 중이다.




그때의 불안은 수선을 멈추지 못하는 마음의 재봉틀 같았다.



바늘 끝이 헛바퀴를 돌면서도 계속 천을 밀어내듯
불안은 어딘가로 끊임없이 밀고 있었다.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 마음은 오래된 습관처럼 박음질되어 있었다.

꼭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끝없이 달리려는 마음도 있었다.


자꾸 발이 까졌고, 상처가 덧났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벽지 뒤 곰팡이 같았다.

직접 보이지는 않았지만 냄새로, 기운으로, 기억보다 먼저 몸이 알아챘고 오랜 시간 나를 따라다녔다.


잊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벽 한쪽에서 다시 피어났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착화된 자리에서 모양을 바꿔 옮겨 있을 뿐, 기억이 허락할 때마다 다시 피어났다.


고통은 방향을 바꾸는 힘이었다.


익숙하던 것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멈췄고 그 틈에서 두 세계 사이의 중간을
조금은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은 묻어두었던 통증의 뚜껑을 다시 열어젖혀주었다.

통증을 떠올리게 만든다 싶다가도 잊으려고 애썼던 고통 혹은 말하지 못하고

봉인해 두었던 고통의 덮개를 다시 열어 그 속에 감춰진 진짜 고통, 진짜 나와 마주하게 만들었다.



묻어두었던 통증은 육체의 아픔만이 아닐 수 있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던 절망,
체념으로 봉인한 진실일 수도 있다.


"괜찮아요."
"그 통증, 아무도 과장이란 말 안 해요."
"이건 혼자 감당할 통증이 아니에요."

이런 말들이 환자에게는 ‘뚜껑’을 여는 말이다.


참아온 통증의 실체가 드디어 빛 아래로 올라오는 순간은 고통을 다시 말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준다.

나에게 고통은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되고 돌봄 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바뀌었다.




나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1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치료가 아니라 돌봄의 시작이었다.

“그 통증,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그 한마디에 나는 뚜껑을 덮지 않기로 다짐했다.



알고 보니 통증은
아픈 곳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 몸은 고장 나기 전에 반드시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가 통증이다.

경고이자 몸의 울음이다.


신체의 어디선가 염증이 생기거나,
혈류가 정체되거나,
신경이 압박받거나,
호르몬 균형이 무너졌을 때,
통증은 지금 멈추라고 하고 몸은 외친다.

통증은 물리적인 자극에서만 오지 않는다.

억눌린 감정, 삼켜버린 분노, 풀리지 않은 긴장이
신경계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스트레스를 오래 받고, 불안을 오래 품고,
속으로 울고 있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몸은 그 감정을 대신 느낀다.

근육은 굳어지고,
자율신경은 흐트러지고,
내장기관은 긴장하고,
혈관은 수축하고,
결국 통증은 그 응어리의 형태로 올라온다.



그래서 통증은 어떤 면에선 감정의 물리적 증거다.


풀지 못한 감정이 오랜 시간 안에 쌓여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것.

특히 분노는 더 그렇다.
분노는 폭발하지 않으면 마음에 고여
장기나 근육신경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긴다.



특히 그 시절 나는 소화기관에 압박이 많았다.


무의식 중에 어깨를 으쓱 올리고, 이를 악물고, 턱과 척추를 긴장시켰고 지금생각하면 가만히 있는데도 아픈 몸을 만들었다.


그러니 치료를 해도 계속 재발이라는 결과가 나왔던 게 아닐까.




통증은 누군가를 향하지 못한 분노가 돌아와 나를 찌른다.



그렇기에 통증을 없애려면 약으로만, 치료로만 접근할 수 없다.


그 밑에 깔린 이야기,
말하지 못했던 말,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

도망쳤던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통증이 보내는 메시지를 듣지 않고 없애려고만 하면
그건 마치 불난 곳의 경고음을 끄기만 하고 불은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통증이 계속된다면 몸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는데 고통은 붙잡을 수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1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생각보다 일찍이었다.



사람도, 말도, 약속도 모두 바람처럼 흘러갔다.
기억은 희미해졌고 시간은 내 앞을 지나갈 뿐 한 번도 내 것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통은 내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는 날들 속에서 고통만은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질적이지도 않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붙잡으면 붙잡히는 유일한 실체.


때론 너무 아파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통을 붙잡았다.

다른 건 다 놓아졌는데
그것만은 남아 있었다.

고통은 물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이토록 명확히 느꼈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고통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고통이라면
나는 그것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내 곁에 없는데 그것은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말은 사라지지만 고통은 언어가 된다.


혼란과 무력함 속에서 오직 고통만 ‘현실’처럼 느껴져 고통은 나를 이 세계에 붙들어 매는 닻 같다는 생각을 오래 했다.

모든 것이 흐려질 때 고통은 뿌연 일상 속에서 '여기 있다'는 걸 알려준다.

내가 살아 있고 이 육체 안에 머물러 있다고...


사랑도, 관계도, 감정도 스쳐 지나가는데
고통은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슬프지만 가장 신뢰할 수 있다.

붙잡을 수 없어서 불안했던 세상에서 고통은 나를 붙잡아주었다.





고통을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통은 나를 ‘나’로 만들어준다.




고통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붙잡고 살아남았다는 그 몸의 기억...

어설픈 위로보다 훨씬 더 깊이 지켜준다.

나는 그걸 통해 나의 경계, 나의 깊이, 나의 생존을 알게 된다.


붙잡은 고통은 언젠가 흘려보낼 수 있다.


고통을 붙잡았던 손이 어느 날 그것을 놓는 날이 온다.
붙잡아 봤기에 놓을 수 있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된다.



내가 정말로 버틴 건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붙잡고 견뎌온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중요한 건 고통의 크기보다 그것을 견딘 ‘내 마음’의 크기다.

고통은 비록 불청객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나의 존재는 불확실하지 않다.



고통을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
그걸 붙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낸 거다.




나는 가끔 한밤중의 별똥별처럼 번쩍이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파괴욕이 아니라 삶이 너무 무거울 때 나를 해방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끝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 충동이 주는 좋은 점은 지금까지 잘 살아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너지고 싶다는 마음은 나름 오래 버텼으니 느끼는 지점이 아닐까.
한순간에 부서질 사람은 그런 충동조차 설명할 여유가 없을 테니.

망하고 싶다는 말은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힘들었다”는 초라한 고백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들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사실은 잘 살아낸 나부터 보려고 노력한다.



지나치게 축적된 기대, 압박, 타인의 시선, 나의 자책
이런 것들을 한 번에 날려버리고 싶을 때 올라온다.


단절 같지만 비우고 싶다는 소망이다.
진짜 나만 남기고 싶다.

무너지는 상상을 하면 창조의 시작이 되는 것 같다.


내가 강요받은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유의 감각.

완벽한 망함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거기 숨어있는 것 같다.


무섭지만 붙들고 싶다.

거기 진짜 나의 욕망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망해서 아무도 나한테
기대하지 않았으면.


나도 나한테
실망하지 않았으면.

계획도, 역할도
애써 만든 일상도
다 무너져서 처음처럼 텅 비어 있었으면.

그럼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걸 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살고 싶은 방식
하고 싶은 말

나로서의 하루

망하고 싶은 날엔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누구도 안 보이는 바닥 끝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자란다.




무채색 풍경에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인생 최대의 고통과 통증 속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조우한 듯했다.


병실에서 링거 폴대를 질질 끌며 내려와 사경을 헤매듯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1층으로 내려가 구름을 바라보았다.


수술 후 며칠이 지났지만 무통이라는 진통제는 무기력했고 통증은 내 몸에 둥지를 튼 채 조금도 물러설 기세가 없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통만이 시간을 대신해 흐르는 듯한 날들이었다.


우르르 쾅쾅!!


갑작스레 빗줄기가 쏟아졌다.


퍼부은 빗물은 하늘이 안고 있던 고통을 몽땅 쏟아내는 듯 거칠고 격렬했다.


나는 그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창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 앞에 서서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따뜻했다.
고통에 지친 몸보다 마음이 먼저 젖어들었다.


그 빗속에서 주저앉았고 울음이 터졌다.



무너지듯 흐르는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 살아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그 뒤를 따라온 햇살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눈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호랑이 장가간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햇살은 병실 통유리마저 따뜻하게 덮었다.


차가운 공간을 덥히는 듯, 무채색 풍경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믿었던 마음의 끝에서 나는 아주 작은 기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고통은 내 몸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날의 햇살만큼은 분명히 새로운 길로 내 삶을 다시 빛나게 할 어떤 예고처럼 느껴졌다.


그 즉시 주치의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새로운 삶, 고통의 문이 정말 열렸습니다.


다음 날 답장이 왔다.



구름은 늘 변화하고 흐르는 것!!

고정되지 않는 감정의 메타포다.


하늘을 보며 떠오른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지금 내 마음의 진짜 풍경이 담겨 있다.


억눌려 흐트러지지 못했던 감정들을 꺼내어 숨김없이 마주한 그 순간을 정확히 보았다는 말에 울컥했다.


"정확하게 보신 거예요"


서늘했던 어둠이 서서히 풀리고 감춰두었던 슬픔과 기쁨이 뒤엉켜 한 겹씩 피어나는 듯했다.


겉으로 보이는 감정(구름)을 움직이게 하는 건 사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흐름(바람)이다.

감정은 결과일 뿐 그 감정을 만든 건 내면의 갈망, 두려움, 소망이 아닐까?


"어떤 삶을 바라시나요?"


바람은 wind이면서 원하는 바람 wish이기도 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병실에 누워 읽어보며

나는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가? 에 대한 생각을 했다.



감정은 욕망이고 그 욕망은 삶을 이끄는 동력이다.


감정은 욕망이고 삶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다.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그분의 고백과 진실한 나눔 앞에 숨겨진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이 버겁고 불만족스러울 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 환상은 현실을 회피하는 헛된 바람일 뿐이다.


그 바람에 휩쓸려 얼마나 많은 시간과 기회를 잃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변화는 현실과 맞서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 용기야말로 내 삶을 앞으로 밀어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감정에서 시작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소망을 마주하다가 현실 도피라는 함정에 빠졌다가 결국 자각에 이르는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감정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고 그 구름을 움직이는 바람은 나도 모르는 내면 깊은 곳의 진실이다.


바람은 때로는 지금 이 순간을 피하려는 어딘가로 떠나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바람을 따라 떠날 건가요?



그러나 삶은 언제나 이대로가 진실이죠.

삶은 이 자리, 지금 이 순간이다.


기쁨도, 고통도, 혼란도, 심지어 아무 일 없는 평범함도 모두가 진짜다.


조작도 연출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더 나은 어딘가에 닿으려는 욕망, 더 나은 나를 찾아 헤매는 환상에 슬며시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느껴진다.


진짜 삶은 늘 ‘여기’ 있고 언제나 ‘지금’이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 애쓰는 마음은
충분한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라는 걸 그분의 언어가 일러주었다.

나는 그 언어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현실과 화해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깊은 목소리.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아름다움의 이름을 한 환상, 현실보다 빛나 보이는 세계에 끌려 이 소중한 지금을 허공에 흘려보낼 뻔했다.

그 모든 충동, 도망치고 싶던 마음, 더 근사한 무언가를 좇는 조급함, 지금 이 순간을 외면하려던 얕은 소망...



그 모든 것이 스르륵 껍질처럼 벗겨지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는커녕 진실과 멀어지게 만든다.

삶의 무게가 버거울수록 사람은 '천국'을 꿈꾸지만
진실 없는 천국은 환상일 뿐, 스스로를 버리고 도달한 곳엔 진짜 나도, 진짜 행복도 없다.




마음속 동요와 욕망, 불안과 도피 본능이
가라앉을 때야 비로소 감정의 날씨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다.


억지로 멈추거나 흘려보내지 않아도, 조작하거나 해석하지 않아도 감정은 감정으로 머문다.

그 순간 마음은 무풍지대에 들어선다.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 삶을 통제하려는 애씀이 멈춘 가장 진실한 상태.



그 자리에 다다르고 싶다.

감정을 좋고 나쁨으로 나누지 않고, 어느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전제 위에서 모든 감정과 순간을 허용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용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그 너그러움이
나에게서,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서 조금 더 자라나기를.


천국은 멀리 있는 이상향도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허락되는 특별한 장소도 아니다.

감정의 고조도 아니고 어디론가 도달해야만 하는 목적지도 아니다.


‘지금 여기’를 받아들이는 의식의 상태, 마음이 머무는 깊은 자각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자각은 오늘 이 순간의 당신 안에도 있다.


진실을 외면하려는 마음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고통의 연장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자유고 의식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메시지가 나에겐 천국이었다.



누린다는 건 억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감정과 경험을 받아들이고 통과시키는 자각의 상태다.

외면하지 않음이 자유고 수용은 해방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여기(hare and now)는 현재 시제가 아닌, 온전한 깨어있음, 판단 없는 인식,

모든 것을 끌어안는 마음의 상태!


이 인식이 천국이라는 말은 그 당시엔 너무도 익숙하고 추상적으로만 들려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이 갖고 있던 깊이를 천천히 따라 읽게 된다.



세상이 바뀌어야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의 초점이 달라질 때 그제야 천국은 열린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


무심하다는 말이 무관심일까?

집착하지 않는 관찰의 태도일까?

구름을 판단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고 (바꿀 수도 없지만)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눈!!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통증이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다.


통증이 삶을 잠식할 듯 엄습할 때 고통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아픔의 언저리에는 그 너머로 건너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통증이 전부라고 믿던 날에도 삶은 잘만 흐르고 있었고 나는 아주 적은 가능성을 보았다.


삶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바라보는 무심의 시선.


어떤 날은 건조하게 들렸던 주치의 선생님이 전해주신 말씀이 귀하고 새롭게 다가온다.

고통을 살아낸 자가 건네는 깊은 초대처럼 들린다.


행보칸 환자님, 삶은 덜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통을 없애려 애쓰기보다는 의식을 정제하고 시선을 전환해보세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되,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무심(無心)의 자리에 도달한다면
그곳이야말로 진실한 삶이 깃드는 시작점입니다.


그 자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불안정한 시간의 강을 건너는 동안,
기적의 언저리마다 머물러 주신 김정훈 병원장님,


한결같은 시선과 온기로 제 곁을 지켜주신 그 따뜻한 동행, 그 따뜻한 믿음이 제게는 이미 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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