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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 시작이다

고통은 나를 구원해 준, 비밀스러운 선물이었다

by 미리나



2024년 6월


내 증상들은 꼭 두더지 게임 같았다.


재난경보처럼 요란하게 울리는 마음의 사이렌.

그 틈을 비집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두더지를
전광석화처럼 내리칠 때 속이 기묘하게 시원해진다.


불안을 게임처럼 다룰 수 있다면 삐걱대는 일상 위에서도 나는 리듬을 주도하는 DJ가 된다.


흐트러진 감정의 주파수 위에 비트를 얹고, 속도를 조절하고 필요할 땐 소리를 낮춘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무대 위에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간다.


불협화음으로 가득했던 하루가 리믹스되면
삶은 잠시나마 음악이 되겠지.


라떼는 오백 원이었는데 요즘은 천 원이다.

천 원이면 되는 위로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다.



고통은 늘 어디선가 튀어나오는데 나는 망치 하나 쥐고 매번 지는 전쟁에 나선 병사였다.


하나 내려치면 다른 구멍에서 더 큰 놈이 튀어나왔다.


이마에 핏줄까지 세우며 내리쳐도 소용없다.

얘들은 맞을수록 신이 난다.


마치 '얘 또 왔네?' 하며 박장대소라도 하는 듯하다.


처음엔 이겨보자며 잡았던 망치는 이젠 그냥 때려보자는 수준의 자포자기용 소품이 되어버렸다.



고통은 내가 포기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게임 밖으로 튀어나온다.


자다가는 물론, 지하철에서, 회의 중에, 운전 중에, 샤워하다가, 심지어 병원에서 치료받는 도중에.

내 일상 구멍마다 얼굴을 내밀었다.


근데 얘네는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깊어지고 놓아주려 하면 손목을 붙잡는다. 정 붙인 기생충 같다.


‘내가 너랑 오래 살았잖아, 이젠 나도 네 일부 아니냐’며 당당하다.


결국 나는 또 두더지 망치를 쥔 채, 오늘도 내려친다.

어디선가 또 튀어나올 걸 알면서도.


나와 고통의 숨바꼭질, 혹은 무한 루프의 코미디.

웃기만 하기엔 슬프다.




알레르기라는 말은 의외로 가볍다.
숨이 멎던 날, 나는 다시 태어났다.



2024년 6월 6일 목요일


파업으로 인해 최근, 그리고 어제 두 번의 응급실 방문은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졌다.


어젯밤, 손목과 겨드랑이에서 알레르기 증상이 시작되더니 새벽 2시경 목덜미가 화끈거리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얼굴은 창백하고 온몸이 붉게 부어올랐다.

귓속과 혓바닥, 목젖까지 강한 열감이 느껴져 119에 신고했다.


"항생제 알레르기 같아요. 숨이 잘 안 쉬어져요."


목소리는 떨리고 끊어졌다.


"조금만 더 크게 말씀해 주세요. 지금 계신 곳 주소는..."






처음엔 별일 없겠지 하며, 전날 밤 9시부터 참았던 게 화근이었다.


‘비응급이야. 괜찮아’


스스로 다독이며 잠옷 위에 가디건을 입었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그 모든 행동이 반 자동으로 일어났다.



폐가 세게 조여오는 느낌에 목구멍이 막히고 그 10초는 정말 길었다.

‘내가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눈앞에 사물이 빙글빙글 돌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구급대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전화가 생사의 갈림길처럼 느껴졌다.


“지금 증상이 어떠세요? 호흡이 안 되신다구요?”


대답도 하기 전에 가슴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말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음식을 잘 못 드신 건 없으시죠?”


“네네. 헉헉...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입술이 떨렸고 치아가 맞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신고자분, 빨리 가겠습니다.

호흡을 천천히 해보세요.”


“괜찮습니다, 저희가 가고 있으니까요.”


집 앞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거푸 세게 눌렀다.


"호흡곤란 여자분인데 갈 수 있는 병원이 있을까요?”


전화기 너머에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차 안에서 1시간 넘게 병원을 수소문했지만 대부분의 병원은 “심정지 환자 우선”이라며 거절했다.


“서울에서는 아침까지 병원을 못 구할 수도 있어요. 지방까지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거기서도 치료를 못 받을 수도 있어요.”



공허함과 무력감이 교차했다.

한 구급대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를 걸고, 다른 한 명은 호흡과 맥박, 혈압, 산소포화도를 체크했다.



머리와 목을 조정할 때마다 기도가 막힌 것인지, 흡인성 문제가 있는지 불안감이 호흡곤란을 악화시켰다.


구급대원은 조곤조곤 나를 다독이며, “호흡을 천천히 하세요”라며 반복적으로 말했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는 방어가 되어주었다.




그 와중에 핸드폰 메모장에 그날의 기록을 적었다.

불안한 마음을 정리하려는 본능처럼.


감정과 상황을 분명히 하고 싶었고 기록을 통해 정신적 상태를 조금이라도 정리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고통과 두려움이 커질수록 상황을 내가 다룰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는 이상한 심리가 생겼다.


핸드폰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이자, 나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기록을 되돌아보며 현재의 고통과 혼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다.


죽겠다, 죽고 싶다 말하지 않아도 삶은 순식간에 끝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다음 날, 수술을 받았던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공휴일 오전 진료가 있다기에 아침 일찍 갔다.


의사는 내 얘기를 듣고는,


“밤에 또 그러면 병동이라도 오세요.”


"알레르기는 기도에 치명적일 수 있어요.


쇼크올 수 있으니, 다음엔 참지 말고 바로 119를 부르세요."라고 당부했다.



작년 5월, 약 3주간 고통 속에 잠겨 있었다.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던 무통주사가 두 번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주사가 들어올 땐 통증이 8점까지 치솟았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그때 내 의식은 고통을 따라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통주사가 빠졌을 때 외래 가기 전까지 교체되지 않자 10까지 올라간 기분이었다.

다시 그 고통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병원 도착 전, 칼날 같은 고통이 맨살을 쓸고 지나갔다.

의식은 비명을 질렀다. 생존의 외침이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내가 수술 중 가장 오래 걸렸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나는 통증에 민감하지만, 때로는 둔감하다.
몸과 마음은 그 모든 것을 지나쳐가려 했다.


어쩌면 고통을 감지하려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본능이 나를 반복적으로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술만 끝나면 모든 게 괜찮을 줄 알았지만 끊임없는 통증은 깊어졌고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 상상을 훨씬 넘어선 고통이었다.



어느 날은 종일 먹지 못해 먹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눈부시게 귀하게 느껴졌고 편의점에서 사 먹은 간식, 그 한 입은 내게 작은 행복이자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의사는 다른 항생제도 꼭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무서워서 안 먹겠다고 했다.


입원 내내 항생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몸에 무엇을 더 넣는 것이 공포였다.


의사는 수술부위 염증 때문에 안된다며 약을 교체해 주었다.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따라온 불안장애.


다시 올까 걱정이 되었다.


"꿈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현실이어서 고통 속에 갇혀 있었다.





예고는 없다.
응급 상황은 누구에게든,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온다.




알레르기 약을 가방에 항상 넣고 다녔다. 나든 누구든 필요할 순간이 올까 봐.


핸드폰 설정에 의료 정보를 입력했다. 응급상황에서 의료진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거나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핸드폰 잠금을 풀지 않고 긴급 연락처와 의료 정보를 통해 이름, 혈액형, 약물 알레르기, 기저질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폰: 건강 앱 의료 정보- 편집

갤럭시: 설정 -안전 및 긴급 -의료 정보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 상비약으로 알레르기약 꼭 챙겨두시길... 혹시 모를 내일을 지킬 작은 준비가 되길 바랍니다.






처음엔 벌레에 물린 줄 알았다.

아토피를 겪는 친구, 옻이 올라 가려움에 정신을 잃던 선배의 고통이 이해될 만큼 가려웠다.


피부 속에서 불이 붙은 듯 살이 부풀고, 핏발이 서는 듯한 고통!


제어할 수 없어 무의식적으로 피부를 긁었다.
물파스라도 발랐더니 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부는 사포처럼 거칠어졌고 현기증이 돌았다. 몸이 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나에게 문제를 일으켰던 아목시실린



병원 옆 약국은 휴일이라 문을 닫았고 처방약을 받으려 약국을 찾아 헤맨 시간만 한 시간 반이었다.


약사님은 놀라시며 알레르기 약물을 적어 건네주었다.

음식이든 항생제든 알레르기는 생각보다 흔하다며 앞으로 병원 가면 꼭 말하라고, 꼭 기억하라고.



힘든 몸을 이끌고 떠도는 서글펐던 시간이 위로됐다.



약국 이름은 행복약국이었다. 그 이름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내가 깃들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행복?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읊조렸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조금이라도 믿어보려 애썼다.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은 끝없이 회전하는 회오리 속에서 그냥 멈춰버릴 테니까.


그 말이 나를 감싸 안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거라면 나는 이 순간을 지나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냥 ‘행복’이란 단어에 기대는 게 나름의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공허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깊이, 깊이 내게 새겨졌다.


참고로, 내가 다니는 병원 이름도 ‘행복한’이다.

우린 그렇게 모든 것을 행복으로 채우고, 포장하고, 나면 끝이 나겠지.


사람들이 말하는 그 행복한 삶이란, 나에게 왜 이렇게 어색하고 쓸쓸했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불쑥 떠오른 건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내가 이런 말들을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더라도 내가 살아간다는 자취이니까.



모든 것이 처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사실 지긋지긋한 과거를 다 덮어버리고 싶어 하는 갈망에 불과했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안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행복이 내게로 다가왔다.




행복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의 요인에 가두어지지 않았다.




순간을 감사히 살아가는 것!! 이 얼마나 진부한 진리인가?


그리고 내가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니 그동안 얼마나 우매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더 이상 고통의 반복이 아닐 것이다.


아니, 그것이 반복되지 않게 내가 만든 기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회의 연속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게 진짜 ‘행복’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회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는 있다.

기회가 온다고 해서 내가 그걸 단번에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내가 그걸 잡을 만큼 잘 될까?


이 말도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교훈이 아닐까. 그들은 말한다.


"행복은 너에게 달려 있다."


그 말에 웃어본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선택의 순간마다 의심할 테니까.



그 모든 아픔 속에서 행복이란 단어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또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 하는 고통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하더라도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내과 협진 결과, 간에 혹이 있단다.

내 몸은 통계 속에 편입되었고 반복되는 검사와 판독으로 삶은 병의 도식에 갇혔다.


만성통증, 자율신경실조증, 뇌하수체 종양, 자궁근종, 난소 물혹, 대장 용종, 간 혈관종.


이쯤 되면 내 인생은 질병의 연대기처럼 하나가 사라지면 또 다른 것이 등장하는 반복이었다.



진료실에서 하나의 증례로 축소되었고 고통은 숫자가 되고 불안은 기록되었다.


나는 점점 병이 될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병력서로만 존재하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졌다.


사실, 두려웠던 진단명들은 나와 살아온 시간의 지문일 뿐인데.




병은 내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온 삶의 편린이 병으로 나타났다.

불완전한 몸이지만, 그 고장들을 통해 나는 나를 읽어간다. 병명을 통해 나를 되찾았다.


병들은 나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 자국이다.


나는 병명이 아닌 그 너머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여전히 병으로 정의되지 않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 있다.


고통은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다른 바람을 타고 온다.


교사처럼 매번 다른 교재를 들고 나를 시험하며 가르친다.






거대한 이슈가 지나가고 나니 드디어 여유가 생겼다.


발열의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남았다.



2024년 6월 12일 수요일


주치의 선생님이 내 준 숙제, 발열 기록을 보내는 날.





좋은 징후입니다.
이 지구별은 배우고 사랑하기 좋은 곳입니다.




내가 매일 열이 나는데 배우고 사랑하기 좋은 곳이라니.



sticker sticker



지금은 절절히 와닿는다.


뜬구름 같은 추상이 아닌, 이 몸과 삶이 여전히 배우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라는 다정한 위로.


발열이 줄어드는 것과 나의 의지뿐만 아니라

내가 조금씩 나를 이해해가고 있다는 진심을 읽어주시고 말해주셨다.




치유의 언어를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회복으로 보셨고 작은 변화와 미세한 차이를 놓치지 않으셨다.


숨겨진 불안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겪는 고통이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감정과도 깊이 얽혀 있다는 걸 깊이 이해하셨다.


병을 꼭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통과해야 할 고통의 지형으로 바라봐주셨다.



그럴 때면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따뜻한 백반 한 상이 놓인 것 같았다.


내 진심을 알아준 몇 안 되는 분이었다.

언제나 내가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도록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셨다.


늘 작게라도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꼭 확인시켜 주셨고 조금씩 걸어가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도 놓치지 않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마음과 그 말은 ‘약’보다 잘 듣는다.


.


나는 낯선 병원만 가면
주치의 선생님이 생각난다.



의사의 말과 태도는 환자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중요한 순간에 놓여 있다.


절망적인 말만 반복된다면 환자가 치료를 받으려는 의지는 급격히 꺾이게 마련이다.



한마디가 생명의 끈을 붙잡는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절망의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벽이 될 수도 있다.


의사의 언어는 정신적 안녕과 회복 동기를 좌우하는 힘을 지닌다.


절망을 조장하는 말은 환자가 애써 갖고 있던 희망의 불씨를 질식시켜 버린다.


신중하고 따뜻한 언어와 태도는 회복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의사의 진단과 치료가 객관적 사실에 기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달하는 태도와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사의 말과 태도는 환자의 생존 의지를 지탱하는 근간이고 그 무게와 책임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율신경실조, 발열 등 회복이 되고, 유지가 되면 좋아졌다고 원장님께 가장 먼저 들려드렸다.

완전히 낫진 않았지만 조금 나아진 하루를 안고
그 말을 꺼냈다.


그것만으로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나"를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 아픔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을 심어주셨기에.


회복의 작은 빛이 보일 때마다 그 빛을 가장 먼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 빛이 닿는 순간, 나 자신도 다시 한번 힘과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


좋아졌다는 고백은 신뢰와 감사의 선물이자, 나 자신을 향한 회복 의지의 확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정훈 원장님과 내가 주고받았던 메시지들은 마치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다.


서로의 아픔과 희망, 그리고 삶의 작은 순간들도 투명하게 담겨 있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마음과 그동안 견뎌온 시간들의 흔적은 정서적 동행의 발자취다.



그래서 나는 계속 써 내려가고 싶다. 그럴 것이다.


그분과의 치료 여정은 치유가 곳곳에 배어 있으니.


이 이야기를 통해 나도 계속해서 치유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원장님은 내가 느끼기 전에 회복의 가능성을 믿고 계셨던 것 같다.


말보다는 마음으로 기뻐하되 크게 티 내지 않고, 기다리되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


그 마음이 나를 치유했다.


덕분에 나는 고통을 전환하며 다시 태어났고, 고통이 올 때마다 그분을 떠올리기만 해도 힘을 얻었다.


호전은 몸의 변화뿐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이다.



고통에서 해방된 나는, 스스로에게 칭찬 스티커를 붙이며 "잘했어"라고 속삭였다. 유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


고통은 그 어떤 이론도 통하지 않는 원초적인 힘을 지닌다.


찬란한 빛 속에서 길을 잃은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불을 켜기만 기다리는 것처럼.


잘했다는 말은 끝내지 못한 일의 잉여를 닫아주는 열쇠가 되어주는 것 같다.


그런 말들도 없으면 끝내 살아가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5살 그때처럼 늘 웃을 수 있다면...


그 웃음이 신을 거부한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 아닐까 싶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질병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이다.




고통은 알고 보니 나를 제일 잘 아는 친구였다.

다만 말이 좀 거칠었지만.


아픔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능력은 그 어떤 외적 스펙보다 중요한 자질임을 깨달았다.



학벌이나 경력과 같은 가시적인 조건들은 사회적 유효성을 부여할 뿐, 고통을 감내하고 소화해 내는 내면의 힘은 인간적 자산인 것 같다.


아픔을 다룬다는 건 피하지 않고 마주 선다는 것.


버티는 힘뿐 아니라 나만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가며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이력서의 한 줄이지만 나에겐 가장 묵직하고 든든한 스펙이 되어주었다.



어떠한 아픔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아래는 주치의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도움이 되실 듯하여 공유합니다.



https://brunch.co.kr/@nothing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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