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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나를 다시 부른다

자율신경실조증 환자가 고통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by 미리나



달팽이는 느린데 멈추지 않는다.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용기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숨을 쉰다.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멈춘다.

외면할지언정, 가장 정확한 신호는 몸에서 나온다.


나는 믿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확실히 느껴지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절실했으므로.




느림과 멈춤을 반복하며 몸이 회복될 때마다 세상은 처음 살아보는 세계처럼 보였다.


집 앞 나무도, 횡단보도 신호등도, 익숙한 벽의 금도, 구름도, 모두 처음 보는 풍경처럼 다가왔다.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고통을 겪기 전엔 너무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생명력과 감동을 품고 기적처럼 눈에 들어온다.

단지 통증의 소멸이 아니다.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믿고 싶다.


말하지 않아도 몸은 기억했다.

고통도, 애씀도.


나는 여행을 떠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날 본 것들을 잊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순간마다 세상은 잠시 멈춰주었다.

덕분에 나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여행을 매일 떠나고 있다.






치료는 상처와 함께 살아갈 언어를 배우는 일이고 마음의 재배열을 허락하는 아주 느린 여행이다.


‘나’라는 존재를 다시 사랑해 보려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마음마저 의심하지 않는 연습.


어쩌면 나의 '세계'를 다시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




교감신경계의 포로



회복이라는 개념조차 무색할 만큼 내 자율신경은 그마저도 또 다른 위협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주사를 맞을 때조차 힘을 빼는 일이 어려웠다.


몸은 위협 앞에서 '긴장하는 법’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긴장은 어느새 생존의 기본값이 되었고 이완은 낯설고 불안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몸은 끊임없이 공격을 대비하는 중이었다.

끝난 싸움을 끝났다고 믿지 못한다는 듯이.




그 탓에 교감신경계는 끊임없이 과항진 상태로 유지되었고 회복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수술 회복은 지지부진했고 식사 후의 배변 반응조차 공포와 연결되며 만성적인 긴장 상태에 몸을 가두어버렸다.


괄약근 또한 골격근임에도 과도한 긴장과 부교감신경의 기능 저하로 인해 수의적, 무의적 조절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해 왔던 신체 부위일수록 자율신경은 경보체계처럼 반응해 전신에 긴장과 통증을 퍼뜨리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예전엔 아무 일도 아니었던 자극에 심장은 거세게 뛰고 식은땀이 흐르고 소화는 멈추고 호흡은 가빠졌다.



몸이 기억을 되살리는 건 너무도 생생하고 자동적이었다.

작은 근육의 미세한 수축이 불안을 자극하고 그 불안이 다시 전신의 경계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서스펜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포로였던 몸, 돌아오는 중



자율신경계의 과항진을 조절하기 위한 주사 치료를 두 달가량 받았을 무렵이었다.


치료 초반, 눈에 띄는 변화보다는 작고 미세한 반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경계의 긴장을 직접적으로 완화하는 주사 치료는 복부 장기 주변의 자율신경 조절에도 영향을 주는듯했고 소화기, 통증과 긴장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긴장이 극심했을 땐 내 몸은 공포 반응을 생존의 기본값처럼 고정하고 있었는데 치료가 반복되면서 그 기본값이 조금씩 낮아졌다.


자극에 대한 과잉 반응은 점점 무뎌졌고 통증의 빈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자율신경계가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내 신경계는 “문 앞에 낙엽 떨어졌어요” 하고 헬기를 띄우는 타입이었다.

주사 치료는 그 헬기 조종사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쉴게요. 낙엽은 문제 아님.”


주사를 맞으면 이완이 되면서 그렇게 평온할 수 없었다.


이제는 작은 자극은 위협이 아니라는 걸 몸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긴장은 매번 새로 태어났고
희망은 자주 속아도 생겼다.



나는 마치 한물간 레이더 같았다.

무엇이 진짜 위협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어디선가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기만 하면 곧장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


치료를 중단해 컨디션이 안 좋을때면 대구에 있는 주치의 선생님께 얼른 달려가고 싶었다.


이번엔 정말, 그 주사 한 방이면 될 것 같았다.


물론 그 생각이 여러 번 빗나갔던 것도 알고 있었지만,
희망이란 건 그렇게 자주 속아도 또 생기는 쪽이었다.






주사 치료는 과민해진 내 신경계를 다독여주었지만 꺾인 회로를 다시 납땜하듯, 과민 반응하던 경보 체계에

정상 신호를 되돌리는 재코딩하는 작업 같았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회복은 상처가 아물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구나.


신경계는 옛 연인을 못 잊는 사람처럼 지난 고통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몸의 긴장 패턴을 배우고 있었다.




고통이 눕던 자리에 행복이 앉았다



24년 5월부터는 목이 편안했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 때마다 흘리던 비명이 멈췄다.


그리고 나는, 집중치료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믿음은 지루한 시간 속에서 자란다는 것을.


처음엔 자율신경치료를 진통제처럼 여겼다.


내 생각에 주사 몇 번이면 나아져야 하고 약을 먹으면 즉시 통증이 꺾여야 했다.
하지만 금세 나아지지 않았다.


'이 병엔 효과가 없네.'
'이 약도 아니네.'


나는 늘 그렇게 조급했고 진득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에 만성통증, 목디스크로 서울의 통증 병원도 그냥저냥 몇 번 다녔다.


‘주사를 맞는다고 뭐가 나아질까?’
‘정말 좋아지긴 할까?’


머릿속엔 늘 회의가 앞섰고 나 자신에게조차 신뢰를 거두고 있었다.


주사 두세 번 맞고는 금세 관뒀고 효과가 없다고 너무 쉽게 결론 내렸다.


아직 물이 데워지기도 전에 찻잔을 비워버린 셈이었다.


기다림이 주는 치유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 조급함은 누군가의 진심을 헤아릴 기회마저 스스로 저버리게 만들었다.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변화가 ‘내 시간표’를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마치 막 끓기 시작한 국을 한 숟갈 떠먹어 보고는 “왜 이렇게 싱겁냐”라고 툴툴대며 냄비를 내팽개친 꼴이었다.


내가 기대하던 속도와 몸이 회복하는 속도는 애초부터 다르게 설정되어 있었는데 그 다름을 이해할 인내가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기다릴 용기가 없었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몇몇 좋은 의사 선생님들께 내가 너무 일찍 등을 돌린 마음을 사과드린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오랜 치료를 이어온 주치의 선생님이라고 해서 내가 덜 성급했을 리는 없었다.


다만, 내 미심쩍은 눈빛과 성급한 결론에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달랐을 뿐이다.




원장님, 주사치료 효과 없어요.
(숨길 수 없는 마음)



나는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었을까.

참 무례하고 경솔했다.


음식점에 가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게 보통인데 이상하게도 주치의 선생님 앞에서는 불만과 회의, 의심 같은 감정들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애써 눌러보려 해도 표정과 말끝에 어김없이 나와버렸다.


내가 어디까지 말을 하고 어디부터 속마음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만큼 혼란스러운 시기였기에 마음은 좀처럼 숨겨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숨은 마음까지 그분은 모두 알고 계셨다.


말보다 태도로 나를 설득하셨고 한때는 지루하다 싶을 만큼 같은 말과 같은 치료를 반복했다.


‘치료의 의지’를 심어주려는 그분의 노력은 잘 자라지 않는 나무뿌리를 매일같이 바라보는 정원사 같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손길을 멈추지 않는 그 인내가 드디어 새싹을 틔웠다.


그 모든 시간이 결국 나를 낫게 하는 가장 정직한 시간이었다.






끓지 않는 냄비를 들여다보는 듯한 긴 치료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급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뼈저리게 보았다.


반성, 부끄러움, 진심에 대한 미안함.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주치의 선생님에 대한 경외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했다.


작년 1월, 수술을 결심하며 분노한 폭풍처럼 몸부림치던 나였다.


24시간 내내 목이 불붙은 듯이 아파서 숟가락을 들고 고개를 숙이는 것, 돌리는 것 모두 불가능했다.


아프지 않은 하루가 이어지는 건 누군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신기루 같은 경이로움이었다.


내게 통증 없는 하루는 소중한 선물이었고 목이 회복된 후, 자율신경치료의 시작은 두 번째 선물이었다.




당시, 예약을 위해 병원에 전화를 걸면 걸면 이렇게 시작했다.


"치료를 통해 행복을 전하는 행복한 H 병원입니다."


처음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인사말이라 여겼다.


그런데 치료가 조금씩 듣기 시작하고 몸이 가벼워지고 통증이 스르르 물러나는 어느 날, 문득 그 인사말이 마음을 적셨다.



아, 정말로 나는 그들이 전한 ‘행복’을 듬뿍 받고 있었구나.

말은 그냥 말이 아니었다.
어떤 말은 현실이 되어 삶을 바꿨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애프터 파티가 빈번했지만ㅠㅠ


행복은 여전히 ‘행복’이었다.
지금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고통이 다 물러나야만
행복이 오는 게 아니구나.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찾았다.


고막이 먹먹해진 상태에서 퍼지는 저주파의 진동처럼 통증이 물러간 자리에서 사소한 동작들이 먼지를 털고 나온 유물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수저를 들어 국을 입에 옮기는 그 짧은 동선마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찬란한 의식인지 깨달았다.


당연했던 움직임들은 잠들어 있던 기적이었다.


의지와 감각이 완결된 한 편의 예술 작품 같았다.


내 몸이 수행해 온 무수한 동작들이 얼마나 정제된 아름다움이었는지 고통 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기능이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순간임을 알게 되었다.


'고통과 행복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도 같은 자리에서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구나.'


고통이 비워놓은 자리에 조심스레 피어난 작은 기쁨들을 바라본다.




너무 작아서, 너무 커서, 아름다움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감정 안에 공존하는 상반된 크기와 무게를 동시에 다 느낄 수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내겐 너무 벅차고 커서 감당이 안 되는 기쁨이었다.


고통 끝에 만나는 그 작은 평온들이 온 우주를 마주한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참을 수없는 '행복’이라 부르고 싶다.




주치의 선생님이 걱정되었다.



감정을 다 쏟아낼수록 내가 불안하고 불편하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사실 이만큼 좋아졌으면 됐지! 하고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꺼내게 만드셔서 “에라, 이참에 다 보여주고 말지” 하며 체념하는 마음도 있었다.


내 속내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그 무게를 어쩔 수 없이 끌어안는 나 자신이 한편으론 우스웠다.


그래도 내게 주어진 이 시간, 이 공간에선 솔직해져야겠다 다짐했다.


과감히말하고 싶은 욕구와 너무 무겁게 다가갈까 걱정하는 마음 사이에서 내적 균형을 겨우 잡고 있었다.




초기 정신과 상담 때 들은 이야기지만 감정이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봐 망설이는 마음은 공감 능력이 높은 이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주치의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개의치 않으시고 늘 용기라고 불러주셨다.


나는 그 용기를 선택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늘, 말보단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지금까지의 이 모든 말들은 내 안에 갇혀 있던 마음의 첫걸음이었다.


아마도 더는 공포가 아닌 것이 되게 용기 내어 길을 밝혀준 그분 덕분에 이 험난했던 과정을 자부심으로 기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공포를 덜어준 의사 선생님의 진심이 내가 이 과정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게 만든 건 아닐까.


“연결은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말씀이 아직도 들려온다.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면서 본인이 느끼기에 어떤 점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세요?"


"식사는요? 물은 자주 드세요?"


"요즘 마음은 어떠신가요?"


"아직 불안하거나,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요?”



그런데 왜 이런 감정들, 그리고 일상의 작은 습관들이 그분께는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도대체 치료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걸까?



언젠가 문득 ‘나는 지금 정신과에 온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약이라도 줄 줄 알았는데 약은커녕 잔소리까지 서슴지 않으셨다.


"요즘 몇 시에 잠드세요?"

"12시요"


"뭐하시느라구요"

"스마트폰 강의도 듣고 인스타도 하고요"


(눈을 휘둥그레)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듣는 건 좋은데 멀리 두고 주무세요"


“블루라이트가 멜라토닌 분비를 방해해서 수면의 질이 떨어지거든요.”


뻔한 말들이지만 가끔은 그 지극정성스러움이 너무 와닿았다.




배려는 방향이 아니고 순환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물을 제대로 마셨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나의 상태를 묻는 질문을 받다 보니 그 물음들이 일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엔 습관처럼 듣고 넘겼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이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실감할 때가 많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게 물으셨다.


“요즘 물은 얼마나 자주 드세요?”


그냥 조금 마셔요! 라거나 어느 날은 많이 마실게요! 하고 얼버무렸는데 나는, 물을 잘 마시고 있었던가?


“원장님은 물 많이 드세요?”


잠시 말을 멈추고, 당황한 눈빛을 보이더니 웃으며 대답하셨다.


“어... 그러고 보니 저도 잘 안 먹는 것 같네요. 자주 먹나?”


문득...주치의 선생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자신을 돌보는 일은 잊혀 버린다.


누군가의 걱정은 곧 자신을 돌볼 여유를 잃게 만든다.


내 질문이 그분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랐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환자에게 묻고, 진료하고, 학회와 강연, 유튜브 촬영까지...


쏟아내는 말의 양이 너무 많아 목소리가 점점 잠겨가는 의사 선생님을 보며 연민과 존경을 동시에 느꼈다.


질문을 생업처럼 안고 사는 것 같은 의사.


매일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가끔 잊고 지내는구나.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고 그 돌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적도 있다는 걸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깨닫게 되지 않나.






흔히 배려를 ‘누가 누구를 챙기는가’라는 일방향의 움직임으로 여겼다.


의사 선생님은 환자인 나를 걱정하셨지만 나 또한 그분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순환하는 마음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건네는 한마디인 것 같다.


그분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손길을 내밀어 내가 잃어버린 자기애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


그렇게 나에게 자신을 돌보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하신 것 같았다.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으로 그분도 치유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틈새를 촘촘히 채워주셨던 김정훈 원장님의 그 섬세한 배려는 지금도 나에게 큰 힘이 된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나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많던 질문들, 때로는 ‘잔소리’처럼 들리던 조언들이 생활 습관을 바로잡으려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분은 내 감정을 묻고, 기분의 흐름을 살피고, 잠드는 시간까지도 세심하게 확인해 가며 듣고 계셨던 것이다.


통증, 자율신경치료하는 의사가 당연하겠지만 그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요즘 마음은 어떠세요?”라는 질문은 안부이면서도 치료의 가장 깊은 시작점이었다.


나를 마주하게 만들어버리는 치유의 가장 첫걸음!


생활지도를 넘어서 몸과 마음이 균형을 되찾는 데 필요한 핵심을 꿰뚫는 치료였던 것이다.


주치의 선생님이 정말로 다루고자 했던 건 신경도, 통증도, 습관도 아닌 '나'라는 사람 전체였다.


그리고 그 진심은 마음에 깊이 남아 이제는 내가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묻고, 그렇게 다가가고 있다.






가끔 ‘혹시 원장님도 마음 한편에 작은 요동이 있으신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흔들림 하나 없어보였지만 그 사려 깊은 말투와 눈빛 속엔 누군가를 향한 극진한 배려.


모난 감정 하나 묻히지 않게 닦아낸 듯 정성스러운 연습의 흔적이 어른거렸다.


불안을 감추는 것도 어딘가 품위 있게 느껴지는 사람.


그래서 진료실은 물론, 주사 치료실 안까지도 늘 온기가 감돌았다.


온기라는 건 한 사람의 마음이 흘러 다른 사람의 체온에 옮겨 붙는 일인가보다.


그렇게 마음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엔 언제나 따뜻함이 남았다.



감정을 나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감정만 고르고 싶어 한다.


슬픔이나 두려움 같은 건 대충 건너뛰거나 “그래도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라는 말로 덮으려 들지 않던가.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말을 더듬어도, 기억이 섞여도, 감정이 들쑥날쑥 이어도, 중간에 끼어들지도 않고, 결론을 내려하지도 않고 끝까지 들어주셨다.


동시에 말이 겹치면 항상 먼저 말하라며 기다려주셨다.


눅눅하던 감정들은 그분 앞에서는 낯빛을 바꾸었다.


마치 화병처럼 터지려던 내 마음을 향해 꽃을 꺾지 않고 조용히 화분을 내미는 사람.


그런 분이 내 치료를 함께 하고 계셨다.






자율신경의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주 깜빡깜빡했다.


단기 기억은 흐릿했고 금방 말하려던 것도 몇 초 사이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머릿속이 뿌옇게 안개 낀 날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고 감정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면 집중력은 산산조각처럼 흩어졌다.


불안이 치고 들어오는 순간, 뇌는 더 중요한 생존만을 우선했고 나머지는 휘발되듯 사라졌다.


자율신경은 스스로를 조절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마음 깊이까지 닿았던 만큼, 나는 어느 순간부터 불편한 증상들이 있어도 가끔은 “괜찮아요”라고 말하게 되는 일종의 부작용(?)을 겪었다.


괜찮다고 말하면 그 말이 그분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어딘가 나 자신에게도 책임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내가 괜찮다고 말했으니 정말 괜찮아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자리를 잡았고 하루가 엉망이어도 괜찮아요! 한마디면 퇴근 도장을 찍듯 그날의 보고를 마무리했다.


감정은 여전히 초과근무 중인데 나는 늘 칼퇴했다.


불안과 불편, 고통이 있었지만 무의식처럼 “괜찮아요”를 반복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은 조금씩 나를 안심시켰다.


말은, 때로 약이었다.

내가 나에게 건네는 천연 진통제.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그 말 너머에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주는 마중물.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조금은 괜찮아지기도 했다.



불안정한 상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내적 기대가 나를 다독였다.


괜찮다고 할수록 불안의 고리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어떠한 감정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서적, 무수한 사람들의 경험담.


물론 도움이 되었다.

어떤 말은 나를 위로했고, 어떤 이야기들은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하지만 정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된 건 늘 내 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준 주치의 선생님의 말 한마디와 조언이었다.


불안은 조금씩 호기심으로, 관찰로 바뀌었다.




책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말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근거로 말하는데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서 비롯된 말을 했다.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감정의 밑바닥에 흩어진, 감정의 단편들은 주치의 선생님의 말속에서 건져 올리자 윤곽을 드러내며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처음에는 그 말들이 뼈아플 때도 있었다.


"안 아프면 이상한 거예요.

지금은 잘 이겨내며 견디는 시간이에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에요.

너무 잘하고 있어요.

지구별 소풍을 자연스럽게 함께 가 봐요."


부끄럽게도 나는 그 시절의 고통 속에서 내가 겪는 이 아픔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 여겼다.


“자연스럽게 함께 가보자”는 말이 처음엔 좀처럼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타인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사이에서

나는 스스로를 쥐어짜듯 괴롭혔다.


고통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다는 모순이 그때의 내 마음을 감싸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 모든 것을 의지한다는 건 그 고통을 조금 덜어내는 대신 내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었고 어쩌면 나는 그게 더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고립된 채 스스로 감당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자율신경실조증이 이런 내 갈피를 못 잡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내 기질이 그러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방향을 바꾸는 듯한 이 기이한 변덕!



그 정체는 늘 알쏭달쏭했고, 그 의문은 점점 더 나를 향하게 했다.


“이 모든 혼란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러나 내면의 갈등과 불편함은 한 번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알아차린다고 끝나는 것도, 이해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다 알지 못한 채 그 모순들 속에 앉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가자!!



그 말은 자기 본성에 귀 기울이고 무리하지 말자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써 맞추려 하거나 억지로 고치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흐름 속에서 관계를 바라보고
그 안에 머무르라는 말처럼 들린다.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연결.
그게 진짜 이어지는 거 아닐까.

어쩌면 ‘변화’는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걸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그 시절 내게는 자연스러움을 향한 안도와 동시에 두려움이 함께 있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는 상황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고통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가장 사실에 가까운 이해로 마주하는 것.


세상의 조언은 무수히 많고 넓고 깊지만 그중에서도 나만을 위한 조언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조언은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회복은 증상이 옅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만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 자신을 고립시켜 왔는지를 하나씩 마주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진정한 자유와 평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유연하고 가볍게 살아보자는 그 아름다운 메시지 앞에서는 마음이 뭉개질 수 없었다.



당시 엉망진창이던 내 모습이 귀엽지 않냐고 하실 때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


아무리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나니까.


이왕이면 고통에 짓눌린 무거운 나보다는 그런 나도 귀엽다고 웃어주는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가벼움’이 결코 얕음이 아니다.

가볍게 웃어주는 것이 가장 깊은 이해다.






통증은 신경이 자극을 받아 뇌에서 해석된 결과였다.


주치의 선생님 앞에서는 더 이상 입술을 꽉 다물 필요도, 마음을 증명하듯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처럼 갑작스레 물결이 넘쳐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외치지 않아도 되었다.



통증은 여전히 밀물처럼 찾아온다.


다만, 그 물살의 결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파도는 나를 덮지 않고 스쳐간다.


좀 더 부드러워진, 또 다른 얼굴로.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대학병원 감염내과라는 새로운 관문 앞에 섰다.



“씩씩하게 다녀오겠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또 하나의 언덕을 넘기 위해 발을 굴렀다.



2024년 6월 15일





의사의 길목에서, 참된 스승을 만나셨다고.


혼돈과 재정의가 교차하는 자리 그 경계에서 나는 김정훈이라는 의사를 만났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맞이한 그 만남은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고

방향을 다시 잡게 해 준 중력 같은 전환점이었다.


삶이 흩어지려 할 때 나를 붙잡아 중심으로 이끈 어떤 결정적인 계기.



그분은 아실까.
그때부터 내가 다시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그날의 길목을, 지금도 매일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내가 지금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환자라는 것도.


“나는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입니다.”


그분이 웃으며 말하던 그 말을 나도 언젠가 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환자입니다"


이제는 그 말이 조금씩 현실의 풍경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도, 나보다 행복하다고 하는 환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내 고통이 고통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어딘가로 흘러가
누군가를 덜 아프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의미 있는 고통이다.


나는 내가 받은 상처가 누군가에겐 길이 되기를 바랐다.

넘어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웃으며 지나가길 바랐다.

그게 내가 치유를 꿈꾸는 이유다.

회복은 나 하나만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나 더 많은 사람이 덜 불편해지는 것이다.






나는 바란다.
내가 고통에서 배운 이 마음이 누군가의 회복에 닿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들도 누군가를 위해 이 마음을 한사코 다시 꺼내줄 수 있기를.


고통은 나를 재정의하고 주체적으로 다시 나를 껴안게 만든 필연의 의식이었다.

나는, 피해자라는 이름을 벗고 살아내는 사람으로 나를 다시 부를 것이다.



그리고, 전하고 싶다.
당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너무 크게 내면 무언가 깨져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감싸 안고 함께 나누되, 손상시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마음을 지키며 지금도 나는 그날의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감정의 목격자로서 나를 바라봐준다는 것!


특히 환자로서, 자주 투명 인간처럼 느껴지는 의료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 나를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경험은 말로 건네는 위로보다 훨씬 깊고 따뜻한 연결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한 사람으로서 환한 빛 아래 놓인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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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한 것 이상의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참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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