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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길목에서 참 스승을 만나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8)

by 김정훈

가르치는 사람은 많으나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문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지식을 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경험과 인생이 녹아나는

한 마디, 한 걸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참 스승을 만나

나는 행복했고 풍성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여덟 번 째 이야기 - 의사가 되는 길목에서 참 스승을 만나다.


아내는 서울시 공무원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자치제로 바뀌고 난 뒤라서 대구지역 공무원이 서울로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맞교환을 할 수 있는데 아내의 직무와 맞는 사람들은 최근 3년간 다른 지역으로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구 사람들은 대구를 세상의 전부로 보는 것인지 도통 대구를 떠날 생각을 않는다는 말이다. 게다가 경북지역의 공무원들도 모두 대구로 오기를 원하기 때문에 대구로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어이가 없었다.


대프리카라는 말은 최근 생겨났지만 당시라고 어디 환경이 좋았을까. 지역경제도 전국 최하위 수준인데 어찌 대구 사람들은 그렇게도 대구를 떠나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하는지... 하긴 나도 교회 때문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살다가 다시 대구로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입장이었으니 누굴 탓하랴.


하는 수 없이 아내는 어렵사리 합격한 공무원 시험, 몇 년간 쌓아온 커리어를 뒤로 하고 용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주말 마다 밤기차를 타고 내려와서 잠깐 아이 얼굴을 보고 또다시 일요일 오후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나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만 두라고 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1999년 여름이 지나고 아내는 사표를 내고 대구로 내려 왔고 부모님 댁은 집도 낡고 협소해서 장인어른 댁에 들어가서 살기로 했다. 장인 장모님이 흔쾌히 방을 내 주셔서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대명동에 있는 장인어른 댁에서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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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단 같이 있으니 주말마다 생떼같은 이별은 하지 않아서 좋지만 손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아르바이트를 더 해야 했고 아내도 얼마간은 쉬다가 다시 직장을 찾아서 다니기는 했지만 공무원 생활처럼 쉽지는 않았다.


몇 년이 지나고 아내는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교사로 근무하긴 했으나 훨씬 뒤의 이야기이고 초반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팍팍한 생활에 공부를 병행해야 하니 정작 기민이형을 만날 시간은 거의 없었고 나는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의예과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양세미나 수업에서 자기 소개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띠동갑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듣다 보니 본의 아니게 눈에 띠는 경우가 잦았다. 교양세미나 시간엔 책이나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내가 서울에서 다시 대구로 내려오게 된 사연을 간단하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담당교수님인 신동훈 교수님께서 수업 후에 개별 면담을 하자고 하셨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을 찾아 뵈었더니 의과대학에 오게 된 자초지종과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지 물어보셨다.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기에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내가 한 번 알아 볼테니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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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칠곡에 있는 대구병원 원장님을 찾아가 보라고 연락을 주셨다. 당시 나는 "아!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입원실과 수술실이 갖춰진 꽤 큰 병원이었는데 원장실은 주차장 한 구석에 컨테이너식 조립주택 같은 곳에 마련해 놓았다. 원장실로 찾아가서 교수님 소개로 오게 되었다며 인사를 드리고 이차 저차해서 의과대학에 들어왔고 생활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 병원 청소든 원장님 술 드신 날 대리기사 역할이든 써주시기만 하면 열심히 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추원장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며칠 뒤 연락이 갈테니 딴 생각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 그 말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아! 내가 도움될 만한 일이 없나 보다 .

생각하고 꾸벅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사나흘 쯤 지났을까 추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앞으로 김 선생이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 전액을 책임질테니 모쪼록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다.


"세상에... 나를 언제 보았다고... 선배님이시기는 하지만 나를 어떻게 알고 이런 통 큰 결정을 내리셨을까?" 나는 고맙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고... 여하튼 너무 감사하고 감격했다.


등록금 자체도 큰 돈이었지만 별다른 인연도 없는 내게 그리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보통 마음이 아니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 그 마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꼭 장학금을 타서 원장님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다행히 예과 2년간은 장학금도 받고 올 A+를 받기도 했다. 본과 올라갈 때는 수석으로 상장도 받게 되어 추원장님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런데 내가 본과에 올라갈 무렵 추원장님은 사정이 있어서 미국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그러자 신동훈 교수님은 이번에는 성형외과를 운영중이신 박동만 원장님을 소개해 주셨다.

박동만 원장님도 나를 처음 만나던 날

"졸업할 때 까지 학비 걱정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셨다. 정말 그 마음을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이다. 한 번 씩 가끔 만날 때마다 제가 은혜와 감사를 표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할 정도로 본인들은 전혀 마음에 담고 계시지 않아서 또 한 번 놀란다.


선을 베풀되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정말 君子가 따로 없다. 이런 분들을 선배로 두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계명대학교를 들어간 것이 지금도 내겐 큰 복이고 은혜라고 생각된다. 물론 연구실적으로 치자면 더 좋은 학교가 있을수 있으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이런 분들의 은혜로 지금 흰 가운을 입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의사로서의 내 안에는 이 분들이 흘린 땀과 노고가 배어 있는 셈이고 나는 그 은혜를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흐르게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그 분들은 전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그 분들에게 받은 것을 후배들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선순환되면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이 아침도 신동훈 교수님, 추원호 원장님, 박동만 원장님. 세 분을 생각하면


사람은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

이라던 목사님 말씀이 내게 와서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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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아보면 교양세미나 시간에 신동훈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신교수님은 미국으로 2년간 연수를 가셨다가 오시면서 아내를 위한 까만 작은 핸드백을 갖고 오셨다. 사모님이 고르신 것이라며... 처음으로 집사람은 작은 핸드백을 갖게 된 것이다.


교수님과 사모님의 배려가 얼마나 감사하던지...


교수님이 귀국할 무렵이 우리가 고등학교 후배이자 교회 동생인 손아래 동서네가 구입한 2층 주택에 세를 들어 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아내는 정성스레 고등어구이와 된장찌게를 끓여 놓고 교수님을 초대했다.


대명동 막다른 작은 골목길 끝자락 2층, 조그마한 방에 조촐한 상을 마련하고 교수님을 모시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송구스럽지만 그 당시는 그것이 우리의 전부였기에 내겐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교수님도 흔쾌히 초대에 응하셔서 소박한 귀국 환영행사를 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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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교수님은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부학장을 하시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어떻게라도 돕고 싶어서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문자 그대로 物! 心! 양면으로 말이다. 하나님은 미리 이런 분을 준비해 놓고 나를 부르시는가 보다. 나는 이런 분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 늘 생긴다. 참 스승이신 신동훈 교수님은 의사로써의 내 길에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이다.


몇 년 전 우리 병원에서 꾸준히 치료받으며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후배를 보면서 그 때 사방이 막힌 것 같던 시절, 교수님이 손을 내밀어 주시던 그 순간이 더욱 생각나서 더욱 마음이 쓰였다. 이 친구가 부디 이 과정을 잘 이겨내고 부디 나보다 더 행복한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자신의 쓰디 쓴 고난이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양식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 좋겠다.


교수님은 일 년에 한 두 차례 우리 병원에 들르셔서 허리 치료를 받고 가시는데 연구에다가 외부 강연, 학생들 가르치시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셔서 꾸준히 치료를 못 받으시고 정말 허리를 펴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한 번씩 와서 짧은 치료만 받고 가시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수님을 볼 때 마다 저런 분들은 무언가 더 하지 않아도 그냥 오래 살아 계시기만 해도 지구의 가치가 올라갈텐데 계속 뭔가를 더 하시려고 하니...

마음이 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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