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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비행과 고공비행 사이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9)

by 김정훈

정말 뇌용량 자체가 차원이 다른 녀석들은 고공비행, 요령껏 적당히 공부하는 녀석들은 저공비행,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던 의과대학 본과 시절의 이야기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 아홉 번 째 이야기 – 저공비행과 고공비행 사이에서

의예과 2년의 과정을 마치고 본과로 올라 왔다. 이제 진짜 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의예과에서는 교양과목도 있고 성실하게 리포트도 써야하는데 남학생들은 대부분 본과 가면 못 노니까 고등학생 때 못해 본 동아리 활동이나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니 성적이 훌륭하게 나오기 어렵고 여학생들은 그래도 꾸준히 공부도 하고 알뜰하게 리포트도 쓰고 하니까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편이다.


나도 아르바이트 하랴, 아기랑 놀아주랴, 교회생활 하랴, 뭐 정신없는 중에도 내공이 있었던지 본과 진입 성적은 1등이었다.


예과 시절 가장 안타까운 것은 몇 명의 탈락자가 발생한 것인데 한 명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 방황하는 녀석을 신동훈 교수님이 여러 번 면담하고 후원하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이 영 마음을 다잡지 못해 그리 되었고, 한 녀석은 PC방 아르바이트 하다가 가상세계에서 상당히 고수가 되어 인정을 받는데 정작 현실 세계에서는 늘 지각하고 시험에 빠지고 하다가 결국 예과도 다 못 끝내고 탈락하고 만다. 군대도 다녀오고 다른 대학을 다니다 와서 나이도 꽤 있었는데 생각하면 늘 안타깝고 지금은 무얼하고 있는지...


진짜 무대인 본과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말그대로 정신이 없었다.


본과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 때 여관방에 본과 진입생들은 고등학교 동문별로 골학(뼈의 부분 부분 명칭과 위치, 쓰임새 등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하는데 정말 메모리 게임이다. 주로 고대 그리스어가 어원인 해부학 용어들을 외워야 하는데 시간당 30~50가지 정도를 외우고 선배들이 내주는 쪽지 시험치고 또 외우고 쪽지 시험치고 하는 것을 무한반복한다. 잘 못 외우면 몇 날 며칠 잠도 안 재워가며 계속하는데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막상 본과 1학년에서 해부학 수업을 해보니 예과에서 1등으로 올라온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죽자고 공부해도 10등 안에 들기도 어려웠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전체 내용을 조감도로 보듯 조망하고 세부적인 것을 외우는 스타일인데 의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이해한 다음 외우는 게 어디 가당한 일인가! 좀 이해하려고 들면 그 엄청난 양에 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마구 마구 일단 외우고 봐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면 전체 내용을 한 장에 꼼꼼히 정리하여 매뉴얼을 만들기도 했는데 의대에서는 야마 혹은 족보라고 부른다. 이 족보를 완성하고 나면 시험이 코앞이라 확실하게 외우기가 어려웠다. 아래 그림은 지금도 가지고 있는 내가 정리한 신체 부위별 정상세균과 병원성 세균을 한 눈에 보기 위해 정리한 미생물학 족보 중 하나이다. 이렇게 한 눈에 다 보고 외워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늘 시간에 쫒기기 마련이었다.

근데 친구들은 내 족보를 복사해서는 하루 아침에 후다닥 외우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어떤 친구는 책에 나오는 그 많은 내용을 복사하듯 답안지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쓰는 녀석들도 있었다. 우린 그런 녀석들을 복사기라 불렀다.


어쨌든 본과에서 장학금 욕심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래도 틈이 나면 계속 매뉴얼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나눠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학회나 세미나에서 들은 내용은 곧바로 정리해서 병원 매뉴얼에 반영하고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길 건너 편에는 100년의 병원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다. 바로 서문시장인데 수업이 끝나고 짬이 나면 노점에서 파는 순대를 사먹으러 가끔씩 가곤 했다. 그러면 순대와 함께 간이나 다른 내장을 같이 썰어 주시면서 아지매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재밌게 장난을 치신다.

이거는 스몰 인테스틴(소장), 이거는 알지? 리버(간), 요놈은 키드니(콩팥)...


하시면서 순대와 부위별 내장을 해부학 교수님들이 설명하듯 영어로 얘기하시는데 목에는 수건을 하나 두르고 손에 목장갑과 비닐장갑을 끼고 장기를 들어 올리며 웃으시면서 하시는 모습들이 얼마나 정겨운지...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많이 힘드셨을텐데 지금은 좀 좋아지셨으려나...

시험 치기 전날은 거의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밤을 새곤 했는데 새벽 두 세시 경이면 어김없이 허기를 못 견디고 길 건너 서문시장 포장마차를 찾는다. 포장마차에서는 우리 학생 주머니 사정에서 먹을 만한 거라곤 라면 뿐이다. 친구들과 라면을 시켜서 후루룩 후루룩 먹고 나면 얼마나 포만감과 함께 작은 행복이 밀려 오는지... 사실 뜨뜻한 라면 국물을 같이 먹고 나면 외워야 할 분량 뿐만 아니라 졸음과 싸워야 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작은 포만감과 행복감에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본과에서 가끔씩 특이한 친구들이 있다. 우린 대부분 기출문제들을 정리해 둔 것을 먼저 확실하게 풀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다른 내용을 참고하는데 어떤 친구들은 처음부터 교과서를 보고 이해하려는 친구들이 있었다. 드물지만 한 학년에 꼭 한 명씩은 그런 친구가 있는 편이다. Harrison이라는 내과학 교과서를 붙잡고 밤낮 수도승이 성경책을 끼고 다니듯 경건한 표정으로 수업에 임한다. 정말 열심히 책을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과서는 정말 분량이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다. 그리고 교과서가 한 권 만이 아니다 보니 교과서를 다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이런 친구들은 교과서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시험에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탈락을 거듭하거나 아니면 시험에 간신히 통과한다. 이런 친구들은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여러번 시험에서 탈락하다가 학교를 마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학교 정규과정을 무사히 마치면 거의 교수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정말 무사히 과정을 마치고 교수 생활을 하는 친구를 보면 존경스럽고 학교를 마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저공비행"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굳이 그렇게 시험점수가 고공비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땅에 쳐박지 않고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 시험을 그렇게 과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ㅠ.ㅠ 어차피 수련할 때 또다시 배워야 하는데 최소한 알 것만 알고 지나가자는 이 친구들의 처세가 때론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나는 저공이고 고공이고 따질 필요도 없이 최선을 다해야만 시험을 지나갈 수 있었기에 그런 이야기는 뇌의 용량이 차고 넘치는 녀석들의 이야기로만 알고 웃고 지나갔다.


지금 돌아보면 의과대학 학생 시절에 정말로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 그것들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면 의사로 살아가는데 무지무지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통증, 재활, 스포츠, 족부 등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들 외에는 상당 부분 잊어 버렸다. 하지만 매번 학회에서 새로운 내용을 접하고 집에 와서 다시 깊이 찾아 보려고 들면 어김없이 대부분 의대생 시절에 배운 내용들이 기초가 되어 있다.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 생화학, 유전학 등등 모든 분야가 잘 짜여진 모자이크 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배울 당시는 이 많은 것들을 외워서 언제 써먹을까 싶은 때도 있었지만 지금 보니 하나도 불필요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그 많은 양을 다 외우고 평생 간직할 수는 없더라도 배운 기억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때가 되어 필요하면 다시 찾아볼 때 낯설지 않고 쉽게 접근하게 된다.

어찌 어찌 한 번도 탈락 없이 본과 3학년 까지 무사히 올라왔다. 이제는 PK(Poly Klinic) 실습이다. 클리닉이 Clinic이 아니고 왜 Klinic이냐고 물었더니 독일어에서 따와서 그렇다고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이론을 다 배우고 나면 직접 진료하는 모습을 참관하고 수술실이라든가 중환자실 등 정말 현장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선생님들 바로 한 발 짝 뒤에서 따라가면서 다 보게 된다. 비록 학생 신분이지만 흰 가운을 입고 교수님들이랑 전공의 선생님들 뒤를 쫄쫄 따라다니면서 비로소 “아! 내가 의사의 길로 접어 들었는가 보다!” 하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의학드라마에서 교수님들이 회진할 때 우루루 뒤에서 몰려다니는 흰 가운을 입은 뭔가 좀 어색한 사람들의 무리가 주로 PK실습 학생들이다.

환자들을 직접 마주 대하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나는 경영학도 좋아했지만 이토록 실감나지는 않았다.

나는 기민이형을 따라 대구를 오려고 시작한 길이지만 이제는 정말 이 길이 태초부터 준비된 내 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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